소설리스트

182화 (182/254)

* * *

비명이 난무한 공간을 뒤로하고.

마치 흰 선처럼 잔상을 남기며, 새하얗고 거대한 무언가가 기척을 죽인 채 빠르게 내달렸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것의 등에는 똑같이 흰옷을 차려입은 여인이 매달려 있었다.

주세화였다.

교룡의 시취를 맡던 그 순간 그들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지금 달아나자.’

‘그래요. 모두의 시선이 저 교룡에게 쏠린 이 틈에.’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속내를 읽어낸 그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가 적룡으로 변하면 교룡과 맞붙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일부인과 적룡의 영단이 저 교룡의 목숨줄이라 하지 않았던가.

두 가지가 모두 이미 자신의 손에 들어왔는데 뭐하러 굳이 저 교룡과 정면으로 맞붙겠는가.

‘지금 중요한 것은 두 오라버니의 생사인 것을.’

일이 실패하면 신호를 보내기로 한 최장명의 기척이 잠잠한 것을 보면 그들은 다행히도 이곳을 잘 빠져나간 듯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두 오라버니를 데리고 먼저 백가로 돌아가고자 몸을 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세화의 적자줏빛 눈이 빛을 머금은 채 교룡에게로 향했다.

‘저 교룡의 실체를 드디어 보게 되었는데 이대로 그냥 헤어질 수야 없지. 그건 너무 아쉬우니까.’

입꼬리를 끌어 올린 그녀가 사취가 진동하는 그 순간에도 빠르게 화살에 영력을 실었다.

그것이 저절로 날아갈 수 있도록 시위를 잡아당긴 천 끝에 불을 붙여 놓는 일도 잊지 않았다.

과녁이 저리 크니 빗맞히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작업을 마친 뒤 서둘러 그곳에서 몸을 빼내 달아났다.

그런 그들의 뒤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큰 기대를 하지 않은 화살이 제 역할을 해 준 모양이었다.

그녀를 태운 거대한 백호는 발소리도 남기지 않으며 모두가 탈출한 주가의 전각들 사이를 빠르게 달렸다.

이윽고 높은 담장에 이르러 주변을 살핀 백호가 단숨에 그것을 뛰어넘었다.

“백가주!”

“세화야!”

“아가씨!”

백기하가 자신을 찾아올 수 있도록 영단을 들고 있던 최장명과 주가한, 주가윤 두 형제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그들을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왔다.

“지금은 다른 설명을 할 틈이 없어요.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요.”

“어디로 가는 것이냐?”

“백가로 갈 거예요.”

“백가??”

“일단 빨리 타요!”

세화의 말에 거대한 백호의 등 위에 커다란 장정 셋과 여인 하나가 올라타게 되었다.

“…….”

거대한 백호의 이맛살이 잠시간 찌푸려지는 듯했다.

콰앙!

하나 담장 안쪽, 신영의 저택 어딘가에서 굉음이 들려오자 단번에 땅을 박찼다.

공중을 뛰는 듯 날아 하늘로 솟아오른 그들의 눈에 난장판이 된 저택 안쪽의 상황이 생생히 들어왔다.

새빨간 불꽃에 삼켜진 건물들 사이로 몸을 뒤틀며 전각을 부수는 검은 용의 존재가 있었다.

“뭐, 뭐야, 저게!”

“설마 용, 용이야?! 주가에 신룡이 남아 있었다고?”

“신룡이 아니에요.”

놀라 입을 벌리는 두 형제를 향해 날카롭게 표정을 굳힌 세화가 반박했다. 그녀의 번뜩이는 눈이 한쪽 눈이 터져 버린 교룡의 모습을 확인했다.

백기하 역시도 지옥도가 펼쳐진 저택을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공중을 뛰는 듯 날아 영지선이 있는 곳으로 한 번도 쉬지 않고 내달렸다.

* * *

백만용은 눈을 감지 않은 시간에는 늘 주가가 있는 먼 하늘을 확인하고 있었다.

분명 아무 일도 없으시겠지. 아무렴.

그의 가주와 가모가 얼마나 대단한 분들이신데.

하지만 그 매, 아니 쪼그만 참새 같은 자식은 호위로도 시종으로도 부족할 텐데, 시중은 잘 받고 계신 걸까.

그 새가 두 분의 발목이라도 붙잡아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호위도 없이 떠나신 것만으로도 걱정이건만 굳이 하나를 데려가신 것이 그런 매, 아니 참새 같은 자식이니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나.’

그런 연유로 그는 오늘도 동도 트지 않은 새벽, 별조차 다 사라지지 않은 하늘 아래를 서성이는 중이었다.

“흥! 그러고 있으면 백가주와 아가씨가 더 빨리 돌아오시기라도 한대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백만용이 이맛살을 콱 구겼다.

가모님에 대해서는 한 점 불만도 없고, 가모님의 가족분들에 대해서도 찬양을 늘어놓진 못할망정 불평을 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 여자와 이 여자의 자매들만큼은 너무 불편하단 말이야.’

얇은 겉옷 한 장을 걸친 채로 제 뒤에 서 있는 영채의 모습을 확인한 백만용이 빈정대듯 말했다.

“행색을 보아하니 그쪽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이유로 나온 것 같은데, 대체 누구한테 하는 소리지?”

“누가 그래요? 난 그냥 산책 나온 건데.”

“아, 그렇군. 만화가 만발한 후원을 두고 말이지. 굳이 주가의 영지로 향하는 이 정문 쪽으로 산책을 나왔다고.”

“그래요. 꽃은 지겹거든요. 철문이 멋있길래 구경 좀 와 봤어요. 문제 있어요?”

“아니. 뭐.”

떨떠름한 얼굴로 영채를 본 백만용이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태연한 목소리와는 달리, 여자의 시선에는 초조와 염려가 그득했다.

‘지금 명윤 원로께서는 주가에서 이상한 이유로 밀려난 이들을 규합하러 떠나셨고. 천수아 부인 역시도 가모께서 인계의 임금에게 부탁했던 일의 확인을 위해 자리를 비우셨으니.’

그녀의 두 자매들은 천수아 부인을 배행하기 위해 함께 떠났고.

가모를 모실 인원이 하나는 남아 있어야 해 남긴 했으나 그렇게 떠난 이들이 모두 소식이 없으니.

‘저 여자도 답답할만 하지.’

그 자신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몇 번이고 하늘을 응시하는 영채를 확인한 백만용이 목을 골랐다.

‘뭐, 크게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아가씨께서 가모가 되신 이상 앞으로 자주 봐야 할 사이이긴 하니까.’

게다가 가모님께 제 쓸모와 충심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저 세 자매의 호의를 얻어 두어 나쁠 것이 없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백만용이 천천히 영채에게 다가갔다.

다시 한번 큼큼 목을 고르며 너무 염려치 말라고. 우리 가주께서 가모님을 세심하고 살뜰하게 보살피셨을 것이라고.

명윤 원로와 수아 부인께서도 아무 일 없이 돌아오실 것이라고.

대단치는 않았으나 누군가에게 한 번 더 듣고 나면 안심되는 말들을 쏟아 내려 할 때였다.

“맙소사! 아가씨!!”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영채가 백만용을 밀어젖혔다.

“왜 앞을 막아서는 거예요! 날 막고 당신이 먼저 달려가겠다 이거야?!”

“??”

그러더니 영문도 모르는 백만용의 어깨를 치며 달려 나갔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제야 돌아본 백만용의 눈에 땅으로 내려앉는 커다란 백호와 그 위에 올라탄 세화의 모습이 보였다.

“맙소사! 가주! 가모님! 돌아오셨군요!”

그가 달려가는 사이, 며칠 만에 바닥을 디디고 선 백호의 위에서 긴 시간 털을 잡고 매달려 있던 이들이 구르듯 땅으로 내려왔다.

영채가 제일 먼저 달려가 세화와 오랜만에 보는 두 주가 무장들을 부축했다.

“도련님들 모두 무사히 오셨군요!”

너무 높은 곳을 비행해 오느라 어지러운 시선을 바로 잡던 주가윤과 주가한의 눈이 부축한 이에게 닿고 크게 뜨였다.

“영채? 너도 여기 와 있었느냐?”

“그럼요. 저뿐만 아니라 원로 부처께서도 모두 여기 와 계십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도?”

그런 그들에게 백만용 역시 서둘러 달려가 인사했다.

감히 제 가주의 등에 타고 있다 내려오는 최장명을 향해 콱 눈살을 찌푸리는 일 역시도 잊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백가 재상 백만용이라 합니다. 백가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 인사에 가한과 가윤 두 무장의 시선이 백만용에게 향했다.

이 백가 재상은 십 년의 전쟁 동안 전투에는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보급품을 직접 가지고 온 그를 먼발치에서 본 적은 몇 번 있었다.

“가주. 저 썩어 빠진 뱀 대가리들을 밤낮으로 잘라내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크십니까.”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째서 하늘께서는 저것들에게 스스로 제 목을 잘라 생명을 꺼트리는 것이 세상을 향한 봉사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지 않아 우리 가주를 이리 힘들게 하시는지.”

그리고 분명 그것 외에도 비슷한 말들을 들어 본 적이 있는데.

“……환영?”

한다고? 우리를?

“그럼요. 저희 가모님의 오라버니분들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물론 저희 백가의 큰 어른이 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제야 아까부터 들려오던 의미불명의 그 단어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가모라니.”

“세화가?”

두 남자의 시선이 제게 쏠리자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본 백호와 세화가 동시에 난감한 얼굴을 하다 동의했다.

“……그렇게 되었어요.”

“!!”

“그, 그럼 백가와 혼인했다는 것이 사실이었단 말이야?”

“가모라니! 그럼 너와 혼인했다는 백가가 백가주라고?”

놀라서 눈만 껌뻑이는 두 장수의 앞으로 백만용이 급히 끼어들었다.

“자자. 일단 먼 길을 급히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이쪽으로 오시지요. 두 분께서 쉬실 곳과 말씀을 나누실 조용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런 백만용의 얼굴엔 절대로 이 두 사내의 호의를 사겠다는 의미의 완벽한 미소가 그림으로 그린 듯 떠올라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