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254)

그녀의 눈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뜨거운 열풍에 온통 몸이 그을려 가면서도 누군가가 선명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얬던 의복은 군데군데가 타들어 가 엉망이었다.

허공에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마저 먼지로 지저분해져 있었으나.

“세화.”

부드럽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는 평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불꽃을 담고 자색으로 빛나는 눈빛 역시도 무엇보다 곧고 뜨거웠다.

“…….”

들끓는 화염을 쏟아붓던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런 그녀를 보고 그가 화염 속으로 손을 뻗었다.

제 떨림을 다정한 목소리로 누그러뜨리며 그녀를 다시 불렀다.

“이리와.”

“…….”

“내게 와 줘. 응?”

모든 것을 태워 버리는 화염이 지척임에도 그는 영력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전해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힘을 사용하면 이런 열기는 그를 괴롭힐 수 없을 텐데.

신수인 그가 저렇게 엉망이 된 채 화상을 입듯 붉어진 얼굴을 할 필요가 없을 텐데.

-…백.

어떻게 당신조차 잊고 있었을까.

내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당신을.

-……백, 기하.

멀어졌던 의식이 바로잡히고 황금빛 눈 사이로 세워진 새까만 동공이 바짝 조여들며 선명해졌다.

그러자 모든 것이 기억났다.

왜 자신이 이곳에 와 있는지.

무엇을 하고 누구를 구해야 하는지.

그녀가 팔을 뻗었다.

저를 향해 불꽃 같은 발톱이 다가옴에도 백기하는 조금도 놀라거나 몸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 한달음에 달려와서는, 화염으로 감싸인 거대한 용의 발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치지직!

제 영력이 그의 옷을 태우는 소리에 온 저택의 상공을 가득 메우던 붉은 몸체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허공에서 너울지듯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사람으로 변한 그녀가 그의 품 안으로 떨어졌다.

“…….”

나직이 떨리던 그의 몸은 그녀를 안는 순간 잦아들었다.

제 품에 들어온 그녀의 몸을 더듬으며, 몇 번이고 그녀가 품 안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 역시 그런 그를 마주 안았다.

“이게 뭐예요. 왜 영력을 안 쓰고…….”

그의 몸은 열기를 그대로 맞은 탓에 의복 위로 드러난 곳이 모두 화상에 덮여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울상이 된 그녀가 재빨리 푸른 영력을 꺼내 들었다.

그 힘으로 불꽃이 스치고 간 그의 피부를 황급히 치료하고 엉망이 된 그의 의복 또한 털어 정리하려 했다.

그런 움직임에도 아랑곳없이 그가 힘주어 그녀를 안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혹시…….”

그녀가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내가 너무 많은 이들을 죽여서. ……저들을 다 죽일까 봐. 그래서 걱정했어요?”

제 그런 모습이 너무 잔인해 보였던가.

복수를 행하는 제 모습에 그녀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녀는 제게 소중했던 이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그 누구도 용서할 마음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잔혹한 그 장면을 이 남자에게 보이는 것만은 부끄러웠다.

‘혹시 그런 내 모습에 환멸이 들었다든가…….’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대를 잃는 줄 알았어.”

“……?”

“그대를…… 잃을까 봐. 걱정했어.”

그의 말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는 재앙을 내리는 쪽인데.

태초의 적룡인 그녀를 이제는 누구도 쉽게 다치게 할 수 없을 텐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그저 걱정했다는 말을 다르게 한 걸까?’

하지만 그의 말은 의미 그대로의 진심이었다.

그는 그녀의 영력도 반응도 전혀 변한 곳이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흘렸다.

“…….”

장부인을 구출하고 셋이서 신영의 처우에 대해 좁은 방 안에서 의논했을 때 했던 생각처럼.

신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았다.

거대한 힘을 바탕으로 순리와 조화를 뒤집는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무작정 그런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화롭지 못한 일에 힘을 사용하면 할수록 신수의 몸은 변질되어 간다.

그 역시도 십 년간의 전쟁 중 너무나 많은 이들을 죽인 탓에 지금까지도 밤마다 고통 속을 헤매고 있지 않은가.

거기다 그녀는 지금껏 본 적 없는 형태와 크기의 영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만큼 감당해야 할 반동 역시도 상상되지 않는 크기일 것이다.

‘그런 건 모두 내가 해 주겠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는 자신보다 강해진 그녀에게 제 도움 따위는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챙겨 주고 싶고, 앞서 위험을 막아 주고 싶고.

격을 잃는 일 같은 건 자신이 대신하고 싶고. 그녀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꼭 얻어 손에 쥐여 주고 싶은 이 마음을.

“……걱정 끼쳐 미안해요.”

이렇게 말하는 이 아가씨가 부디 부담으로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제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이 그렇듯 애틋하게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강한 진동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격렬한 진동은 마치 천지가 뒤집히는 듯했고, 높다란 전각들이 단번에 꺾여 땅으로 쓰러져 내렸다.

콰광! 쾅!

“아아악!”

“꺄악!”

이미 세화의 공격으로 기진맥진해 있던 이들이 다시금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런 이들을 삼키며 쩌억 소리와 함께 지면이 온통 갈라지기 시작했다.

균열 사이에서 새어 나온 끔찍한 시취가 단번에 그 공간을 모두 잡아먹었다.

“!!”

마치 바로 옆에서 시체가 썩고 있는 듯한 역한 냄새로 인해, 다급히 달아나는 중에서도 모두가 숨을 멈춰야만 했다.

그리고 갈라진 땅 사이로, 검고 거대한 어떤 것이 천천히 솟아올랐다.

“저게, ……저게 대체 무슨.”

그것은 마치 허공을 흐르는 검은 강물 같았다.

구불구불 허공을 향해 움직이며 떠올랐고, 몸체에서는 부패한 혈액처럼 검붉은 진액이 뚝뚝 떨어졌다.

어떻게 저런 거대한 것이 이 땅 밑에 있었던 것이지?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만큼 거대한 것은 하염없이 위로 솟아올랐다.

그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는 신영이 입꼬리를 비죽 끌어 올렸다.

‘그래. 저 교룡 새끼도 언제까지 숨어만 있을 수 있을까. 지금껏 그만큼 떠받들어졌으면 응당 그 값을 해야지!’

아무리 주세화가 적룡의 영단을 삼켰다고는 해도 어차피 일회성의 힘.

게다가 그만한 영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 홀로 교룡을 상대하기는 벅찰 것이 분명하고.

‘그리고 그 백가 놈 역시도 현재 몸이 정상이 아니라하니.’

교룡을 상대하기 위해 백기하와 힘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한쪽이 승기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터였다.

‘그래서 모두가 쓰러졌을 때 어떻게든 그놈들의 영단을 취해야 한다!’

그리고 또 혹시 아는가.

의식을 잃은 백기하와 몸을 바꿀 수 있을지도.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옆구리의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신영의 입매가 의기양양하게 위로 솟았다.

신수의 몸을 빼앗을 수 있다면 이깟 신영 후계자의 몸 따위가 아쉬우랴.

한데 그때였다.

타앙!!

우레같은 소리가 악취로 가득한 공간을 울린다 싶더니 오색의 영력에 휩싸인 세 발의 화살이 날았다.

쐐애액!

두 발은 교룡의 새까만 비늘에 막혀 용의 몸을 뚫지는 못했으나 나머지 한 발이-.

퍼억!

새빨간 교룡의 눈에 가서 박혔다.

“……!!”

-끼이이이이이이익――!!!

귀를 터뜨릴 듯한 비명 소리가 고막을 찢어 낼 듯한 음량으로 울려 퍼지자 모두가 고통스럽게 제 귀를 막으며 주저앉았다.

콰아앙! 쾅!

“으아아악!!”

채 땅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교룡의 몸체가 들썩이며 땅을 갈랐고 지상에 있는 이들을 아찔한 깊이의 땅속으로 끌고 내려갔다.

‘주세화 이년이!’

생각지도 못한 일에 이를 문 신영의 눈이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

언제 몸을 피했는지 백기하와 세화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고, 자동으로 화살을 날리도록 불 지핀 끈으로 고정해 두었던 활만이 덩그러니 제단 위를 구르고 있었다.

……튀었다고?

“이 미친년이!!!”

당황한 신영이 그들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흐으. ……크으.”

거대한 붉은 눈이 뜨거운 열기를 입가에서 흘리며 그들을 향해 떨어졌다.

터져 버린 교룡의 눈에서 흐른 피가 땅을 온통 시취로 물들였다.

아주 오랜만에.

천 년 그 이상의 시간을 뛰어넘어 모습을 드러낸 교룡이 제 몸을 상처 낸 이를 찾으며 붉은 달빛 아래 검은 파동을 뿜어냈다.

“……아, 아으…….”

한계를 넘어선 두려움에 모두가 더 이상 달아날 생각도 하지 못하며 새까만 교룡을 올려다보았다.

광활할 정도로 거대한 붉은 눈이 그들에게 서서히 가까워졌다.

‘설마…….’

모두가 멈춰선 그곳에서, 교룡의 파동에 익숙해진 신영만이 주춤주춤 뒤로 몸을 뺐다.

그리고.

“으아아악!”

일자로 벌어진 교룡의 입속으로 무수히 많은 무사들이 한 번에 사라졌다.

옆구리를 틀어쥔 신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대 방향을 향해 달렸다.

“시, 신영!”

누군가 그런 그의 옷깃을 잡아채는 듯했다.

“도, 도와주십시오, 신영! 저 끔찍한…….”

“이거 놔!!!”

거칠게 그 손을 뿌리친 신영이 그 무엇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비명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또 다른 지옥이 그런 그의 뒤에서부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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