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180/254)

* * *

거대한 공간은 온전히 정적뿐으로.

대지로 떨어진 태양처럼 빛나는 황금빛 눈 아래에서 감히 아무도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숨조차 크게 쉬질 못했다.

신영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커다란 적룡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분명 두려움도 있었다.

하나 그보다는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좌절감이 그의 몸을 짓눌렀다.

‘……어떻게.’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감히. 내가 아닌 저년이, 용이 될 수 있단 말이냐!!’

끓어오르는 분노는 옆구리를 찢어 놓은 통증마저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어떻게 주가의 적룡이 환계를 지배해 왔는가.

그건 강력한 영력뿐만 아니라 세상의 처음부터 끝을 꿰뚫어 보는 힘. 천리안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흑과 백을 가려내는 힘. 그리하여 환계의 조화를 유지해 온 힘.

황금빛 눈 아래에서, 그는 마치 모든 옷이 벗겨진 채 심판장에 세워진 것처럼 모욕감이 들었다.

적룡의 눈이 가진 천리안으로 제 영혼을 훑고 흑백을 심판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면 맨몸으로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심판? 누가 감히 나를 심판한단 말인가? 저년이?’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라섰는데!

신영이 고개를 치켜들어 적룡을 노려보았다.

오로지 대의를 위해. 가문을 위해.

핏줄마저 희생하며 이 자리를 지켰다. 그 기나긴 세월을 그 누가 심판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주마등이 펼쳐지듯, 그가 살아 냈던, 모두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 아찔한 속도로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어림, 없어.’

어떻게 부지해 온 목숨인데.

교룡 따위에게 비참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얻어 낸 생이건만.

‘그런 내가 여기서 죽어 줄 것 같은가? 어림, 없다!’

일그러진 얼굴 사이로 신영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곤 제 옆에서 떨고 있는 측근 무사를 확인하고는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아들에게 찔린 옆구리에서 인두로 지진 것 같은 끔찍한 통증이 일었으나 지금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넌 지금 당장 밀실로 달려가, 그분이 계신 지하 입구를 터뜨려라.”

“……예?”

“머뭇거릴 때가 아니다. 저 적룡이 누구더냐. 조금 전까지 네놈들과 생사를 다투던 그년이 아니냐. 그분을 자극해 저년을 상대하게 하지 않고서야 네놈들에게 살길이 있을 듯싶으냐.”

그 말에 무사의 눈빛이 변했다.

어째서 이런 순간에도 잠잠한지 알 수 없는 교룡을 깨워, 신수를 신수로 대응하게 하겠다는 신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신영이 낮은 목소리로 목을 울리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반드시 그분과 적룡이 서로를 마주 보게 해야 한다. 전각의 지붕을 다 터뜨려서라도. 밀실의 벽을 모두 부숴서라도 그분의 존재를 저 적룡의 눈앞에 끄집어내야 한다. 알겠느냐!”

“예!”

비장한 눈을 한 무사가 저택을 향해 조용히 움직였다.

그제야 신영이 다시 한번 고통에 신음하며 제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신영은 서슬 퍼런 눈으로 하늘 높이 떠 있던 붉은 용을 노려보았다.

* * *

세화의 의식은 아주 먼 허공 속에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하늘이 아주 가까이 있는 듯했다.

마치 방 안에 누워 있는 것처럼, 그녀의 코앞에서 별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

나직한 신음이 그녀의 입가로 흘러나왔다.

마치 누군가 머리를 두드리고 있는 것처럼 극심한 두통이 일었다.

눈을 뜨고 있을수록 너무나 많은 정보가 자연스레 그녀의 뇌리를 파고들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중요한 이치에서부터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아주 사소한 정보까지도.

태양처럼 뜨거운 빛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이게 대체 뭐지. 왜 내게 이런.’

모든 것을 알 것 같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을 잊은 것 같았다.

혼미해지는 정신 속으로, 방대한 양의 정보를 쑤셔 넣으며 누군가가 계속 그녀에게 명령하는 듯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용서하고, 품고, 사랑하라고. 조화를 깨선 안 된다고.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

그것이 너의 운명이라고.

멍하니 깜빡이던 세화의 눈이 굳게 감겼다가 다시 뜨였다.

운명?

그 단어를 들은 그녀의 새까만 동공이 세로로 좁혀 들었다.

준비된 미래에 순응하는 것이 내 운명이라고?

용서하고 품으라고? 사랑하라고?

웃은 것도 같다. 실제로는 긴 입가 사이로 화염 같은 연기를 뿜어낸 것뿐이라고 해도.

입가에서 흐르는 새까만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지다 그녀의 몸이 뿜어내는 열기에 닿아 사라졌다.

거대한 눈이 어떤 의도를 담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저 땅 밑에서, 개미 같은 것들이 빼곡히 들어찬 채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마치 목숨을 구걸하는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을 내리치고. 오빠들의 잘린 머리를 발로 차고. 사단윤의 가죽을 벗기고, 세 자매를 끔찍하게 고문하며 죽였던 것들이.

“참수하라! 참수하라!”

끔찍한 발 구르는 소리가 다시금 들리는 듯했다.

그녀가 다시 웃었다.

운명? 조화? 순리?

‘그게 무슨 소리람.’

조화 따윈 개나 줘야지.

순리 따위가 뭐가 중요해.

이 힘으로 저 개미 같은 것들을 죽여선 안 된다고?

“참수하라! 참수하라!”

그 지옥을 저들은 겪게 해서는 안 된다고?

그런 조화와 순리가 있을 수 있는가?

‘그런 건 없어!!’

“――――!”

그녀의 눈이 번뜩였다.

콰앙! 쾅! 쾅!

동시에 수십 개의 불꽃 낙뢰가 등극식장 위로 내리쳤다.

“꺄아아아악!”

마치 굴이 무너진 개미 떼처럼 지상에 있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다시금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검은 연기를 흘리던 용의 입이 열렸다.

지옥이 시작된 등극식장 위로, 곧 용암 같은 화염이 쏟아져 내렸다.

* * *

“하아, 하아.”

신영의 명을 받은 무사는 쏜살같이 달려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콰앙―!!!

“!!”

귀를 찢을 듯한 폭발음이 연이어지더니 온 저택이 뒤흔들렸다.

비명 소리는 바깥에서만 이어지지 않았다.

저택 내부에서도 시종과 시녀들이 연이어 저택을 벗어나며 비명을 질렀다.

그 혼란스러운 복도를 무사가 거꾸로 달려 간신히 밀실의 입구에 도착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몇 겹이나 되는 밀실 입구의 결계를 조심히 파훼했다.

쿵! 쿵!

그러자 밀실의 저 안쪽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누군가의 존재감이 확연해졌다.

쿠르릉! 쿵!

여전히 저택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충격으로 요동치고 있었고 비명 소리가 온 사방에 그득했다.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부디, 저 적룡의 주의가 이쪽으로 향하기를……!’

콰앙!

제 온몸에서 영력을 끌어 올린 채 눈을 질끈 감은 무사가 밀실의 입구와 제가 서 있는 복도의 지붕을 한 번에 날려 버렸다.

* * *

쿵! 쿵!

“……!”

소리가 되지 못한 비명을 쏟아 내며 교룡이 지하에서 계속해서 몸부림쳤다.

지상에 있는 이들이야 이 진동에 죽건 말건. 그는 비통함에 제 몸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하늘은 어찌 이리 무심하신가.

어찌 저년에게 저 힘을 주시는가.

어찌 저런 신수가 되게 하시는가.

그때였다.

뭔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더니 그를 가리고 있던 결계가 단번에 무너져내렸다.

“!!”

이미 잔뜩 힘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풀린 결계로 인해 팽창한 힘이 이곳저곳에 부딪히며 강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앙!

교룡을 막고 있던 돌벽들이 일제히 터져 나가며 머리 위로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달빛조차 가려 버린 붉은 열기가 거대한 구멍 사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잠시 굳어졌던 교룡의 붉은 눈이 이내 일그러졌다.

허공에 제 몸을 띄우고, 거대한 균열들을 꿈틀거리는 몸으로 부수며 빠져나왔다.

* * *

“――――!”

새빨간 화염이 쏟아지는 등극식장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끔찍한 열기의 불꽃들이 곳곳에서 들끓었고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혈흔조차 남기지 못한 신영의 무사들이 곳곳에서 역한 냄새를 흘리며 타들어 갔으며, 적룡의 힘에 대적하느라 영력을 소진한 무사들 역시도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단번에 모두를 죽일 수 있지만, 그녀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약한 힘으로 고통을 이어 가게 만들었다.

비명을 지르는 이들을 보며 그녀는 웃고 싶었다.

울고 싶기도 했다.

비열하고 간사한 이놈들이 절대로 윤회할 수 없도록, 영혼마저 절절 끓는 화염으로 태워 버리고 싶었다.

분노에 휘감겨 있는 동안 그녀의 의식이 다시 까마득한 저 멀리 날아가는 듯했다.

어떻게 하면 이것들에게 가장 지극한 고통을 내려 줄 수 있을까.

그것만을 고심하는 그녀의 눈빛이 세차게 번뜩이는 동안.

황금빛 적룡의 꼬리 끝에서 새까만 그림자가 번져 가는 것을 그녀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였다.

“……화, 세화!”

수십 개의 낙뢰를 지상으로 쏟아붓는 그녀의 귓가로 무언가가 파고들었다.

“주세화!!”

그것이 그녀의 의식을 바로잡았다.

그녀에게 있어 목숨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목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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