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9화 (179/254)

툭.

노인의 머리가 흙 위로 고꾸라졌다.

채 감지 못한 눈이 여전히 뜨여 있었으나, 그 안에 생명의 빛이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단검을 틀어박은 손만은 결코 놓지 않았다.

세화의 힘이 담긴 단검이 이전에도 그랬듯 불길 같은 힘을 뿜어내며 신영의 몸을 안에서부터 태웠다.

“아악! 큭.”

챙그랑!

고통에 신음하는 신영의 손에서 힘이 풀린 사이, 적룡의 힘을 두르고 들끓고 있던 검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미, 친 새끼가-.”

여전히 단검을 잡고 있는 아들의 팔을 내던졌다.

신영이 고통에 신음하며 허리를 숙였다.

간신히 제 허리춤에 박혀 있는 단검을 잡아 뽑았다.

하지만 이미 검에 씌워져 있던 오색의 영력이 태운 상처는 걷잡을 수 없이 생명력을 깎아내고 있었다.

‘이, 영력은…….’

이미 한번 당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던가!

‘이 영력이 또다시 내 혼을 이 몸뚱이에 묶어 놓으려 할지 모른다!’

“빨리, 빨리 치료를…….”

주인께 가야 했다.

이 영력이 제 몸을 더 망치기 전에 지금 당장!

상처를 누르며 헐떡인 그가 비틀거리면서도 제 검을 주워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한데 그때였다.

쩌엉――!

귀를 먹먹히 울리는 소리가 공간을 진동시키며 울려 퍼졌다.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는 찾아볼 필요가 없었다.

“!!”

눈앞에 보이는 새하얀 검신에, 신영의 검에 작은 금이 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잠시 손에서 검을 놓친 사이, 힘을 제어하는 이가 사라진 틈을 타 거대한 영력이 날뛰고 있었다.

봉인이 풀린 것을 기뻐하며 저를 구속하고 있는 마지막 한 꺼풀마저 파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쩌엉!

쩌엉―!

격렬히 떨리는 검신에서 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미세한 금이 하나씩 더 생겨났다.

신영의 안색이 그 검신만큼이나 새하얘졌다.

이 검이 없으면 영단의 힘도 사용하지 못하고 그러면 연놈들도 잡을 수 없다.

탈피도 못한 몸으로 등극식도 망쳤는데 신영의 상징인 신검조차 이리 덧없이 잃어버린다면!

“안돼!!!”

고통도 잠시 잊은 그가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검 손잡이를 다시 움켜쥐었다.

하지만.

쩌저적―!

이미 한계까지 아슬아슬하게 거대한 힘을 담고 있던 검은 더 버티지 못하고 제 안에 든 것을 풀어놓아 버렸다.

챙―――!!!!!

“아아악!”

“으악!”

깨어진 파편들이 연무 사이를 날아 주변에 있는 이들을 덮쳤다.

“……!!”

그것은 신영도 마찬가지였다.

방심한 사이 그의 몸을 뚫고 들어온 파편이 그의 한쪽 눈을 완전히 갈라 놓았다.

“신영! 몸을 피하십시오!”

“신영! 위험합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하지만 무사들의 그러한 외침에도. 눈을 뒤흔드는 끔찍한 통증에도.

그는 나머지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며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떤 새빨갛고 흔들거리는 무언가가.

파괴된 검 안에서 꿈틀거리며 빠져나온 무언가가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끼이이이익!

귀를 찢을 듯한 비명 같은 것이 고막을 뒤흔들었다.

저를 속박하던 것을 부수고 자유를 찾은 힘이 마치 살아있기라도 하듯 불꽃을 흩뿌렸다.

환희에 들끓는 듯한 모양새를 하고 하늘로 떠올랐다.

‘저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의 망설임은 순간이었다.

검 없이 저것을, 적룡의 영단에 담겨 있던 저 거대한 힘을 내가 과연 제어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을 떠올린 찰나의 순간에, 하얀 손이 신영보다 먼저 달려들었다.

“!!!”

위급한 순간 저를 보호하려던 백기하를 밀어젖히고, 무사들의 공격 속에서도 아랑곳없이 난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힘을 향해 달려간 세화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대한 붉은 영력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이리 와!!”

콰앙!

영력과 영력이 부딪치는 파동이 그녀를 할퀴고 지나가며, 자유를 잃은 힘이 그녀의 품 안에서 난동을 부렸다.

끼이이익!

귀를 찢는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힘을 둘러싸고 맹렬한 불꽃이 솟아올랐다.

뜨겁고 붉고 세찬 그것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과 의복을, 저를 끌어안은 손바닥을 포함해 모든 것에 불을 붙이며 타올랐다.

극한의 화염이 절절 끓었다.

단번에 그녀를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릴 듯 아우성쳤다.

끔찍한 고통이 그녀의 몸을 찢어 놓는 듯했다.

하나 그녀는 오히려 제 품에 있는 것을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세차게 악문 잇새로 피가 흐르고, 피부를 녹이는 화염 사이로 진물이 들끓어도 있는 힘껏 팔을 더욱 좁혔다.

“넌 결코 달아날 수 없다.”

알 것 같았다. 이것은 낯선 것이 아니라는 걸.

예전의 그 연회, 그곳에서 제가 이미 한 번 각인시켰던 그 힘이라는 걸.

“네 주인이 여기 있다. 내 안으로 들어와!”

그 순간이었다.

화르륵!

끌어안고 있는 것의 열기가 더욱 맹렬해지더니 순식간에 옆으로 불어나며 제 몸집을 키웠다.

“맙소사, 그만둬! 세화!!”

그리고는 널따랗게 펼친 몸집을 굽혀 그녀를 단번에 덮쳐 버렸다.

“안 돼!!!”

세화가 끌어안았던 거대한 영력이 그녀를 산 채로 집어삼키는 모습을 목격한 백기하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찰나에 날아간 그가 영력을 두른 검으로 그녀를 삼킨 붉은 영력을 내리쳤으나 소용없었다.

콰앙!

단번에 검을 부수고 그를 튕겨 낸 영력이 눈을 온통 태워 버릴 듯 강렬한 빛을 뿜었다.

파앗!

잠시 시력을 잃었던 백기하가 눈을 떴을 땐 눈앞에 하늘과 땅을 이을 듯 거대한 붉은 기둥이 일자로 서 있었다.

“안 돼!!”

검을 잃은 백기하가 맨손으로 기둥에 달라붙었다.

“세화! 주세화!!”

기둥을 두드리는 백기하의 몸짓이 절박했다.

하나 제 모든 영력을 퍼붓듯 끌어 올려도 기둥은 파괴되지 않았다.

“주세화!!!”

한데 그때였다.

무언가가 거기 있던 이들의 고막을 진동시켰다.

―――!!

그걸 소리라고 칭할 수 있을까.

마치 귀를 통하지 않고 머릿속을 직접 울리는 듯한 고요한 폭풍이 몰아닥쳤다.

하늘까지 솟아올랐던 붉은 기둥이 터져 나갔다.

“!!!”

“꺄아아악!”

“으아악!”

모두가 밀려드는 풍압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지다 못해 날아가 벽에 부딪히거나 자신들끼리 뒤엉켜 쓰러졌다.

백기하 역시도 날아가듯 제단에 다시금 처박혔다.

“윽, 큭. 세화…….”

너무나 강한 힘이 머리를 진동시킨 탓에 시야가 금방 잡히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어떤 맹렬한 열기가 시력을 온통 끊어 놓는 듯했다.

그래도 눈을 떠야 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파동을 맞은 탓에 온몸이 마치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그럼에도 바닥을 짚으며 일어설지언정.

백기하는 비틀거리면서도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이를 악문 채 제 몸을 일으켰다.

뜨여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치뜨며 영력을 담은 검을 다시 한번 앞으로 빼 들었다.

“……어.”

한데 이게 무슨 일일까.

“……지금 저게.”

‘저게, ……뭐지?’

처음엔 눈이 잘못된 줄 알았다.

온 세상이 적과 황으로만 뒤덮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안에, 붉고 노란 세상 속에 뭔가가 들어 있었다.

몸이라고 불러도 좋은지 알 수 없을 거대한 무언가를 꿈틀거리며, 두 원이 맞붙은 듯한 형태로 허공을 흐르고 있었다.

차르르-

그때마다 마치 유리잔이 부딪치는 듯한 맑은 소리가 울렸고 세상이 적, 황, 흑색의 비단을 뒤집어쓴 듯 색을 바꾸었다.

“…….”

지금 보이는 정경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너무나 거대해 한눈에 담을 수조차 없는.

이런 크기의 것을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 상황을 망연하게 느낀 것은 정신을 차린 신영과 기절한 혈족들 외에 의식을 회복한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그 누구도 어떤 소리도 꺼내 놓는 이가 없었다.

신음조차 흘리지 못한 이들이 공포를 느끼며 헐떡였다.

저게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있었다.

온몸에서 넘실거리는 불꽃을 태우면서도.

하늘을 찌르듯 솟아오른 두 개의 뿔에서 낙뢰를 만들어 내고, 꽉 다문 입가에서 검은 연기를 흘리는 모습으로도.

명백히 살아 있었다.

그 형태는 용과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용인가?

용이라 칭해도 되는 것인가?

믿을 수 없는 크기로 존재하며 그들의 머리 위를 온통 덮어 버린 태양 같은 이런 존재를, 그리 불러도 되는가?

거대한 뿔과 믿을 수 없는 크기의 몸체 주위로 용암 같은 불꽃들이 절절 끓었다.

어둠을 하얗게 깨우는, 눈이 시릴 정도로 뜨거운 불꽃의 비말들과 그 안에서 광채를 발하는 듯한 압도적인 영력의 파동.

그때 허공이 일자로 갈라졌다.

무언가가 황금색 불꽃 사이로 새까만 동공을 드러내며 그들을 내려다봤다.

“신…….”

본능처럼, 마치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혈족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완벽한 적룡이.

태초의 신수가.

“신령이시여…….”

흠 없이 변태한 그들의 왕이 온 하늘을 집어삼키며.

새까만 밤을 깨우며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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