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어머……니.”
여인을 멍하니 응시하던 최장명이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한 발을 떼었다.
바삭.
겨울을 준비하는 메마른 풀들이 그의 발밑에서 으스러졌다.
그 움직임을 눈치챈 것인지, 소리를 들은 것인지.
그조차 아니면 그저 눈이 움직인 것뿐인지.
그 순간 그 여인의 열없는 시선이 그를 향해 움직였다.
“!”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여인의 눈동자와 최장명의 눈동자가 동시에 크기를 키웠다.
언제 다가가려 했냐는 듯 그의 발걸음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느낀 것이다.
그를 응시하는 여인의 시선에.
저 검은 동공에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마치 무생물처럼.’
“뭐해?! 어서 와!”
그때 뒤에서 주가윤의 목소리가 최장명을 일깨웠다.
‘큰일 났다!’
지금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자각한 그가 황급히 뒤로 뛰었다.
저 여인이 경비를 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둠 속으로 완전히 몸을 숨기기 전 한 번 더 뒤를 돌았다.
그 여인은 그때까지도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구도 부르지 않고.
그저 멀어지는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 * *
등극식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해 버렸다.
퍼엉!
새하얀 회오리가 무사들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
있는 힘껏 영력을 끌어올리며 검을 세우고 있던 무사들이 영력과 영력이 부딪치는 파동을 이기지 못하고 쓸려나갔다.
풍압은 곧 원로들과 주씨 혈족들이 앉아 있던 곳에 일자로 몰아닥쳤다.
“아악!”
“꺄아악!”
신영이 그에게로 밀려드는 바람을 팔을 교차해 막아 내며 버텼다.
“백기하!!”
“너희가 얼마나 많이 몰려오든. 무슨 능력을 사용하든.”
몸이 떨릴 정도로 냉랭한 살기가 백기하의 흰 예복 주위로 휘몰아쳤다.
“그녀에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애써 몸을 일으켜 달려갔던 무사들이 또다시 신수의 영력을 이기지 못하고 들풀처럼 쓰러져 내렸다.
“너희가 그러고도 주가의 정예 무사냐?! 일어나라! 일어나!”
소리치던 신영의 시선이 저 높이 떠오른, 한 마리 새 같은 여인에게로 닿았다.
붉디붉은 구슬 하나가 위로 뻗은 그녀의 손안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빼앗길 수 없었다. 저 영단만은 절대로!
“!”
그때 그에게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본래 저 적룡의 영단은 신영의 검에 담겨 있었다.
신영의 힘으로만 불러낼 수 있는 신검과 오래도록 공명해 온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연회에서 주세화에게 넘어가는 바람에 잠시 빼내야 했었지만.
‘그 검을 불러내면 저 영단을 이 거리에서도 불러들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 검이 어디 있는가. 검은 전대의 신영이 새로 등극하는 신영에게 물려주는 방법으로 전해져 왔다.
신영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백기하가 일으키는 풍압을 견디지 못한 아들이 노쇠한 몸 안에 갇혀 비틀대고 있었다.
‘저놈의 몸속에 검이 있다!’
하지만 제게 반감을 품은 아들은 내어놓으라 해도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
영력과 영력이 부딪치며 일어나는 폭풍우로 주변은 온통 뿌옇게 먼지가 일어 있었다.
눈먼 공격을 피하기 위해 혈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데다가 모든 주의가 아수라장을 만드는 백기하에게 쏠려 있었다.
아무도 제가 뭘 하는지 관심이 없고 지켜볼 수 없을 지금이 기회였다.
신영이 한달음에 제 아들에게 달려갔다.
누군가가 떨어뜨린 검을 집어 들어 달려간 그 속도 그대로 지금은 아들의 몸이 된, 본래 자신의 몸을 꿰뚫었다.
“……커억!”
“육시를 해도 시원치 않을 놈. 주씨의 명예도 모르고 반편이 백가와 저 어린 년 따위에게 도움을 구해? 저놈들을 끌어들여 감히 신영의 등극식을 망치다니.”
“아버…지.”
“죽을 것이면 조용히 숨이 넘어가 사라질 것이지. 처음부터 내 먹이로 태어난 새끼 주제에.”
낮은 목소리가 그와 자신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흘러나왔다.
“시간이 없다. 어서 죽어라.”
주경현의 몸을 한 신영의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내게 이렇게 적의를 가진 혼이 탈피를 도와줄 수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신영의 검을 순순히 넘겨주지도 않을 테고.”
신영이 손에 든 검을 횡으로 비틀었다.
“……허억. 컥.”
끔찍한 고통과 함께 갈라진 배의 구멍이 왈칵왈칵 붉은 피를 토했다.
“그러니 이제 네 쓸모라고는 어서 죽어 내 눈앞에 검이 나타나게 하는 것밖에는 없지 않겠느냐.”
“아, 아버…….”
신영이 제 아들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 반동으로 검이 더욱 깊숙이 몸에 박혔다.
아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빠르게 피가 빠져나가는 신체는 시체처럼 써늘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그때 어떤 힘이 반탄처럼 그를 밀어냈다.
“!”
그것을 기다렸던 신영이 제 손에 잡혀 있던 아들을 쓰레기를 버리듯 바닥으로 내던졌다.
허공에 그가 오래도록 다루었던 신영의 검이 그림처럼 떠올라 있었다.
젊은 주경현의 손이 단숨에 그것을 낚아챘다.
여러 무사들의 공격과 그로 인한 풍압으로 여전히 허공에 떠올라 있는 적룡의 영단을 향해 일직선으로 검을 뻗었다.
검이 뿜어내는 붉은 영기와 영단이 피워 내는 붉은 영기가 직선으로 이어졌다.
세화의 손끝이 몇 번이고 다시 허공으로 솟아오른 영단에 간신히 닿았으나 그 힘이 한발 빨랐다.
영단은 마치 허상처럼 흩어지며 신영이 들고 있는 검을 향해 날아갔다.
비어 있던 검의 중앙에 정확히 박혔다.
“주세화!! 너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는구나. 네가 육문의 수장과 혼인한 후 수장의 처로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혈족을 짓밟으려 하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붉은 영기를 흩뿌리는 영단을 한 번 바라본 후, 저 뒤에서 쓰러져 부들거리며 죽어 가는 아들을 확인했다.
아들이 더 이상 어떠한 소리도 지껄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득의에 차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모래 먼지 속에서 세화를 향해 소리쳤다.
“내 아버지께 대체 무슨 짓을 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을 납치해 저런 꼴로 만들고 저런 말을 하게 만들다니. 정녕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는 년이구나!”
신영이 검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저 달이 보이느냐!”
뿌연 연무 속에서도 적룡의 기운을 받은 달은 붉은 기운을 드리운 채 그들을 선명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것이 주가다! 환계의 처음부터 저리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무엇으로도 흐리지 못할! 네깟 것들이 아무리 난장을 쳐 보아야 흔들리지 않을. 저것이 주가! 나 신영이란 말이다!”
“하면 달을 지워 버릴 것이다.”
긴 제단 위, 백기하의 옆으로 내려앉은 세화가 신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화를 깨고, 천륜을 거스르고, 법칙을 어지르는.”
화살을 들어 시위에 건 그녀가 그것을 신영을 향해 조준했다.
“너와, 교룡과, 쓰레기 같은 환족들을 막기 위해서 하늘을 가리는 것이 두려울까!!”
탕!!
영력이 담긴 시위가 굉음을 내며 화살을 밀어냈다.
쐐애액!
화살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신영을 향해 날아갔다.
이를 간 신영이 봉인이 풀린 영단을 발동시켰다.
영단에 담긴 힘을 이기지 못한 검이 부르르 떨렸으나 신영은 비죽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검조차 깨어지려면 깨어지라지.
저년과 백기하를 잡을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아까울 것이 없다.
영단을 잃으면서까지 일을 벌인 이상. 이 밤! 반드시 저 연놈들을 잡을 것이다!
파앗!
붉은빛이 영단에서 터져 나왔다. 봉인이 풀려 있던 영단이 실체를 잃고 온전히 힘의 흐름이 되어 검신을 감쌌다.
검붉은 영기가 신영의 두 어깨 위로 치솟았다. 거대한 영력의 회오리가 화살을 단번에 튕겨 냈다.
놀라울 정도로 벅찬 고양감이 신영을 감싸 안았다.
‘맙소사. 이런 힘이라니……!’
이런 힘이 영단에 담겨 있었나.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경지였다.
하늘의 저 붉은 달을 넘어서 태양이 지배하는 환계의 꼭대기까지.
가장 높은 곳을 제 발로 밟고 있는 듯한 성취감이 그의 온몸을 채웠다.
‘진작 봉인을 풀었어야 했다.’
삼키지 못할 힘이라 해도.
일회성에 그치는 힘이라 해도.
왜 진작 이것을 사용해 저 백기하와 육문을 누르지 않았을까 후회가 밀려들 정도였다.
‘아니. 지금 사용했으니 그것이라도 되었다. 저 년을 먹고 나면 분명 탈피가 이루어질 테니까!’
벅찬 환희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도 않으며, 그가 세화를 향해 소리쳤다.
“환계의 역사에서 너 같은 년이 지금껏 없었겠느냐? 하지만 아무도 해내지 못했다. 그 수많은 신수들도 결국 주가를 어쩌지 못하고 굴복해 왔어! 그런 것을 네가 뭘 어쩌겠다고?”
살기 어린 눈을 빛낸 신영이 검을 고쳐잡았다.
“오늘 다시 너희 두 연놈들의 목을 따 내가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 주가가 환계의 지배자라고. 내가 그 주가의 지배자라고!”
그때였다.
제단 위에 선 한 쌍의 남녀를 향해 뛰어오르려는 신영의 발목을 무언가가 있는 힘껏 잡아 세웠다.
“!!”
마치 시체처럼 차가운 체온으로 달라붙어, 이내 산 채로 살을 태우는 듯한 고통을 그의 옆구리에 박아넣었다.
신영의 얼굴에서 순간 표정이 사라졌다.
“……커억.”
천천히 돌린 핏발 선 눈에, 바닥을 기어와 그의 허리를 찢어 놓은 존재의 모습이 먼저 들어왔다.
“아버, 지.”
몰라볼 수 없는 오색의 영력에 휩싸인 단검을 죽자사자 쥐고 있는 것은.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그 검 하나를 놓치지 않고 잡아 누르는 것은 그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너. 너!!”
“그냥. …한마디. 딱, 한마디만.”
아들이 마치 검을 잡고 일어나려는 것처럼 단검을 힘주어 내리그었다.
“컥, 컥…….”
“…하시지. 그러면 저는 말씀대로 멍청한 아들이라…….”
신영의 얼굴을 한 주경현이 젖어 드는 눈을 감추지도 않으며 제 몸을 한 아버지를 응시했다.
“……용서…했을 텐데, 그냥,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너!!”
눈물로 흠뻑 젖은 주경현이 중얼거렸다.
한마디만, 딱 한마디만.
미안하다고.
딱 한마디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