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254)

‘저년이 어떻게 이곳에 저런 무기를 가지고……!’

제게로 향한 날카로운 화살촉 앞, 일렁이는 영력의 기운을 본 신영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쏘진 못할 것이다. 이 많은 이들 앞에서 날 공격하진 못할 것이야!’

탕―!!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우레같은 소리가 다시금 땅 위에 울려 퍼지자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신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들이 향하는 곳은 허공이었다.

세 대의 화살이 땅으로 떨어지는 적룡의 영단을 차례로 스치고 지나가며 다시 한번 드높은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안 돼!!!!”

지금 이 자리에서 신영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 작은 영단이었다.

제 모습을 한 아들이 나타나 반역이니 찬탈이니 외치는 지금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가?

아니. 제때 죽이지 못한 이놈이 적의를 가진 채 제 발로 군중들의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이 상황은 어떻게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밤, 백기하와 주세화가 달아날 수 없도록 잡아 영력을 빨아먹을 수 있는가?

아니, 탈피하지도 못하고, 신영의 등극식도 완벽히 치르지 못한 이 몸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니 저 영단이 가장 중요했다.

백기하를 누르고. 주세화를 잡아 놓고.

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주씨들에게, 봉인이 풀린 영단을 사용해 그들을 굴복시키는 것만이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때였다.

탁!

깍지낀 백기하의 손을 밟고 세화가 영단을 향해 뛰어올랐다.

새하얀 순백의 예복이 마치 학의 날개처럼 넓게 펼쳐졌다.

긴 예복 아래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그녀의 다리에 매달린 화살촉들이 부딪치며 차르르 금속성을 냈다.

“잡아라! 저년을 잡아! 어서!!!”

이전 신영과 곧 신영이 되실 소가주의 사이에서 대체 누구의 명을 따라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무사들은 이번에는 지체하지 않았다.

저 적룡의 영단은 대대로 주가를 지켜 온 신물이었다.

아무리 저 여인이 주씨라고는 하나, 육문 연합의 수장과 혼인했다는 이의 손에 들어가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막아라!”

무사들이 허공으로 뜬 세화를 향해 날카롭게 벼려진 검들을 집어던졌다.

궁사들이 곧장 활을 꺼내 아끼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시간상으로는 아주 찰나였으나 금세 푸르게 빛나는 하늘이 은빛의 검신과 화살들로 빼곡히 들어찼다.

그 순간이었다.

펄럭!

무사들이 허공에 던진 덫 사이로 장신의 사내가 긴 의복을 휘날리며 끼어들었다.

“감히 네깟 것들이 그녀를 다치게 하겠다고.”

백기하였다.

단번에 등극식의 의석에서 제단의 꼭대기까지 날 듯이 뛰어 올라온 그는 가장 먼저 날아드는 검 한 자루를 여유롭게 잡아챘다.

“내가 있는 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말과 동시에 새하얀 영력이 백기하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솟아올랐다.

제단을 뒤엎은 주가의 불을 삼키며 거대한 회오리가 그곳을 덮쳤다.

* * *

최장명은 오가는 이가 줄어든 복도를 부지런히 내달렸다.

아직 기운을 숨기는 데 익숙지 않은 그에게, 모두가 등극식에 관심이 끌린 지금만이 명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신영의 저택은 너무나 넓고 그 안을 채운 전각만도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하여 주인이 일러 준 위치를 기억하는 일이 다른 이라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장명에겐 가능했다.

수십 장의 거래 문서를 확인하고 외우는 것을 버릇처럼 해 왔던, 상인으로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하여 그는 결국 그들이 말한 입구를 찾아냈다.

가져온 영단으로 문을 열고, 긴 밀실 계단을 내려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명의 무장을 발견했다.

“누구냐!”

“주가한 님과 주가윤 님이십니까. 세화 님께서 저를 두 분께 보내셨습니다.”

“세화가?”

“네. 어제 백가주와 함께 오셔서 두 분께 내일 꺼내 드리겠다 이미 말씀하셨다 들었습니다만.”

“…….”

“시간이 없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네가 누군데?”

“저는 세화 님의 권-.”

잠시 망설이던 최장명이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세화 님의 노예, 최장명이라 합니다.”

“뭐?!!”

뜻밖의 자기소개에 어둠을 뚫고 경악성이 울려 퍼졌다.

“노, 뭐, 노, …뭐라고?!”

“내 동생은, 노, 노예를 두고 그럴 아이가 아닌데.”

“그리고 어제 백가주께서 오시긴 하셨지만, 세화는 같이 오지 않았는데.”

“두 분이 오시지 않았었습니까? 그러니까 크기가 다른 두 백호가.”

“그러긴 했으나. 세화는 오지 않았는데?”

“……??”

“……??”

지금 주가에 있는 두 백호라 하면 백가주와 제 주인밖에는 없는데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일까.

잠시 이 무장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했지만, 최장명은 곧 단련된 상인의 경험으로 상황을 눈치챘다.

‘백가주와 함께 왔던 백호가 세화 님인 걸 모르시는구나.’

그는 복잡한 상황을 설명하는 대신 곧장 세화가 그들을 향해 보이라 했던 물품들을 꺼내 들었다.

어린 시절의 그녀가 만들었던 향낭이 최장명의 소매 속에서 나타나자 두 무장이 깜짝 놀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건, 이곳에 들어올 때 관리관에게 빼앗긴 것인데 네가 어떻게.”

“주가 관리관들이 이것을 증명 삼아 두 분의 목숨을 쥐고 있다며 세화 님을 협박하였습니다. 함께 나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우린 무죄를 밝혀야 하는데. 이대로 달아나면 없는 죄를 뒤집어쓰는 것이 아니냐,”

“그 일 자체가 이미 두 분께 없는 일을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일단 저를 믿고 함께 나가시지요. 여기 명윤 원로님의 서신도 있지만, 이 어둠 속에서는 글이 보이지 않을 듯하니 나가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도 두 무장은 조금 망설였다.

백가주에겐 별것 아닌 듯 말을 하긴 했으나 그들은 현재 내통죄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이것은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면 일가가 모두 죄인으로 엮여 들어갈 수 있는 중죄였다.

명윤 부처는 친아들도 아닌 그들을 친자식 이상으로 따뜻하게 돌봐 주지 않았던가.

그 은혜를 갚진 못할망정 어찌 그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까.

하여 그들은 혹 목숨값이 필요하다면 자신들의 것을 내놓고 나머지 가족들을 구할 생각으로 이곳에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움직여도 되는 것일까. 아버지와 세화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잠시 고민하던 주가한이 주가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나가자. 혹 일이 잘 못 될 것 같다 싶으면 우리가 제 발로 다시 들어오면 될 것이 아니냐.”

주가윤도 형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제 백가주의 방문도 그렇고 세화가 우리를 빼내 갈 것이라는 말도 그렇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파악해야겠다.”

최장명이 그런 둘에게 설명했다.

“바깥은 신영의 등극식으로 분주합니다. 복도를 오가는 이는 많지 않았으나 최대한 기척을 죽여 움직이셔야 합니다. 어떻게든 두 분께서 무사히 이 저택을 빠져나가셔야 그분께서 자유로이 움직이실 수가 있으십니다.”

“한데 어디로 나갈 셈이냐. 신영의 저택엔 결계가 있어 문이 아닌 곳으로는 갈 수가 없다.”

“이 밀실을 연 소가주의 영단이 있습니다. 영단을 깨고 그 안에 담긴 힘을 사용하면 결계에 관계없이 담장을 넘을 수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이 모든 대화가 오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최장명은 그 얼마 안 되는 시간에도 초조함을 느껴야 했다.

혹 등극식에 적룡의 영단이 나타나는 경우 자신과 신영 사이에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그렇게 되면 신영이 오라버니들을 인질 삼기 위해 끌고 나올 수 있다고, 세화에게 미리 전해 들었던 것이다.

등극식에 온 주의가 쏠려 있는 터라 당장은 그들을 주시하는 이들이 없었으나 이 행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하여 결정이 내려지고 나서 그들은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다.

흔적이 남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리고 최장명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밀실의 끝에서 최장명은 제 옷을 길게 찢어 두 형제에게 내밀었다.

“오래도록 이곳에 갇혀 계셨다 들었습니다. 밤이긴 하나 복도가 밝으니 익숙해지실 때까지만 잠시 눈에 두르십시오.”

두 형제가 그것을 받아 눈을 가린 것을 확인하고 최장명이 문을 다시 열었다.

아직은 세화가 경고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인지 복도는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곧바로 나가도 괜찮은 건가?”

“누군가에게 들킬 경우도 생각해 주십시오. 제가 전투에 익숙지 않으니 그때는 곧장 천을 걷고 그들을 기절시켜 외부로 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막아 주셔야 합니다.”

“그래. 영력을 사용하고 있으니 적응에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소리를 듣고 따라가겠으니 앞장서거라.”

그렇게 눈을 가린 두 형제와 최장명이 복도를 달려나갔다.

이곳까지 잠입한 길과 탈출로가 달라 최장명은 더욱 신중해야 했다.

그때였다.

“잠시만.”

주가한이 앞서가는 최장명의 몸을 잡아 벽에 붙였다.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최장명의 귀에도 저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발소리들이 있었다.

누군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닌 많은 수가.

주가한이 제 눈을 가린 천을 벗겨 냈다.

눈부시게 밝은 빛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잠시 눈을 깜빡였으나 곧 제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파악했다.

“이 발소리는 시종이 아니다. 분명 무사들이야. 저쪽은 안 돼. 이쪽으로 와.”

“어디로 가야 할지 아시겠습니까.”

“어쨌든 담만 넘으면 되는 것 아니겠어?”

이번엔 두 형제가 앞장서 복도를 조용히 달렸다.

그중엔 시중인이 많은 전각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었고, 불 꺼진 창고를 통과해야 할 때도 있었다.

숨을 죽여 전각들 사이를 통과하던 최장명과 두 형제가 그렇게 어느 전각 앞을 지날 때였다.

드르륵.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에 풀숲을 밟고 달리던 그들이 단번에 숨을 죽였다.

검은 전각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소리를 낸 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긴 옷자락이 나무 복도 위를 쓰는 소리가 났다.

소리는 잠시 복도를 맴돌다가 안으로 사라졌다.

하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지 않아 그들은 그대로 한참이나 더 숨죽인 채 있어야 했다.

직선으로 담장과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아왔기에 두 형제도 이곳이 어딘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신영의 저택은 너무나 넓었고 방문자들이 함부로 발을 디디지 못하는 금지 구역도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하나 조금 전 들려온 소리는 분명 여성의 치마가 만들어 내는 소리였다.

시녀들이 발목 길이의 의복을 걸치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높은 신분을 가진 여성이라는 말이었다.

신영의 저택에서 그런 신분을 가진 이들은 오직 팔부인뿐이었다.

‘팔부인들의 전각에서 발견되면 우린 빼도 박도 못하는 유죄다.’

‘안으로 들어간 듯하니 지금 움직이시지요.’

‘그래. 문을 닫지 않은 것을 보니 누군가가 더 올지도 몰라. 서두르자.’

두 형제와 최장명이 조금 전보다 더욱 신중하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그곳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들이 어둠 속으로 몸을 묻을 때였다.

혹시 모습을 들킨 것은 아닌가, 마지막을 달리던 최장명이 확인차 잠시 뒤를 돌아보던 그때.

“…….”

누군가를 발견한 그의 발걸음이 잠시 멎었다.

제가 보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잠시 눈을 깜빡였다.

매의 시력이 아니었다면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밤 그에게 너무나 선명히 보이는 장면이 있었다.

가을바람을 맞이하며 열린 전각 문 너머로.

몇 겹이나 되는 방을 넘어서.

저 안쪽, 빛이 가득한 곳에, 어느 여인이 무료한 시선을 하고 앉아 있었다.

얼어붙은 최장명의 입술 사이로, 한 단어가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어머, 니?”

“장명아. 너도 네 어미의 얼굴은 알아야지.”

“이, 초상화 속 여인이 제 어머니이신가요?”

“그래. ……그녀가 이렇듯 잘 크고 있는 너를 보았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

“네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너를 낳았단다. 너를 아주 사랑했어. 너를 매우 아꼈어.”

“……어머니께서.”

“그러니 너도 네 어미의 얼굴을 잊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시며 아버지께서 어린 그에게 내주셨던.

그 초상화 속 여인이 저기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