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가 이곳에 올 줄은 몰랐더냐?”
노쇠한 신영의 얼굴을 한 주경현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미 이곳까지 오며 많은 체력을 소비하였던지라 호흡이 몹시 가팔랐다.
천령의 부축이 없으면 한 걸음도 떼지 못할 법한 그 모습에서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이 명확했다.
지금 눈앞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주씨들이 눈만 껌뻑였다.
‘신영께서 어쩌다 저런 모습이 되신 것이지?’
오래도록 살아 노화가 진행되긴 했었으나 분명 정정한 이였는데.
거기다 방금 무어라 했던가.
‘아비의 목숨줄을 조여? 가진 것을 죄 빼앗아?’
이게 대체 다 무슨 말인가 하면서도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절대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신영이 아니던가.
포고문엔 주경현이 탈피를 마쳤기에 새 시대의 핏줄에게 양위를 결정하였다 적혀 있긴 했었다.
하지만 축하 선물을 가지고 저택을 방문했던 이들에 의해 그것이 거짓임이 빠르게 알려졌다.
탈피도 하지 않은 아들에게 양위를 하겠다고 했던 것은 그들에게도 의문으로 남은 일이었었는데.
‘갑작스러운 양위 결정 이후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던 신영께서, 저런 모습이 되어 계셨던 건가?’
“무효다. 이 등극식은 무효야! 난 결코 내 손으로 양위하지 않았다!”
“!”
주씨들의 신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술렁이는 반응을 모를 수 없는 신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저게 무슨. 내가 신영이고 내 손으로 양위를 결정한 게 맞는데 저놈이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지만 속이 타들어 가고 할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올지언정 무슨 말을 하겠는가.
사실 내가 신영이라 저건 헛소리일 뿐이라고?
저놈은 가짜라고?
입이 찢어진다 한들 그런 말을 대체 어떻게 하겠는가.
아들의 껍데기를 그가 뒤집어쓰고 있다는 건, 찬탈했다는 오명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것을.
‘저놈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진퇴양난에 빠졌음을 의식한 신영이 턱이 떨릴 정도로 강하게 이를 사리물었다.
‘진작에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탈피야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되는 것이고. 저놈의 혼을 갈가리 찢어 명계에조차 발을 디딜 수 없도록 만들었어야 했는데!’
“이보관!!”
주경현의 얼굴을 한 신영이 소리치자 이보관이 서둘러 달려왔다.
“신영께서 다시 광증에 사로잡히셨다. 저분을 어서 저택으로 모셔라!”
“!”
“신영께선 막대한 양의 영단을 흡수하시다 실패하여 실성하시지 않았더냐. 그런 신영께서 편찮으신 몸으로 이곳까지 오시게 하다니. 너희가 모두 죽고 싶은 것이냐! 당장 저분을 모시거라!”
“예! 뭣들 하느냐! 무사들은 새로운 신영이 되실 소가주님의 명을 받들어 신영을 저택으로 모셔라!”
이보관이 그리 소리치는 모습을 노인은 손을 떨며 응시했다.
일보관과 이보관, 삼보관은 제 아버지의 명밖에 듣지 않는 자들이었다.
저 이보관이 자신이 아닌 저 소가주의 몸을 한 이를 따른다는 것은 저 안에 든 것이 정말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말이었다.
‘이보관도 알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세 보장관들이 지금의 내 상황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게…… 이게 저들에겐 정말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던 거야!’
신영의 몸을 한 주경현의 코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몸을 빼앗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아버지는 아니리라 생각했다.
왜 아버지가 제게는 어떠한 교육도 하지 않았는지. 체력 단련 외에는 검술조차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던 것인지.
영력조차 제대로 사용치 못하게 하면서 왜 그리 영단을 먹였는지.
왜 그리 제 탈피에 매달렸는지. 왜 제 몸이 상하는 것에 그리 집착했는지.
세화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 모든 일이 이해가 되었으나 그럼에도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닐 거라고.
거울을 본 듯 눈앞에서 움직이는 자신의 몸속에 든 것이 아버지는 결코 아닐 거라고.
어떤 다른 무언가가 그의 몸을 빼앗은 것일 거라고.
‘한데 정말 아버지였어!’
믿기 힘든 상황에 온몸이 벌벌 떨리고 눈앞이 젖어 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화를 내고 싶은데. 미친 듯이 분노하고 사실을 모두 까발리고 싶은데.
“어떻게 하다 이리 다쳤어. 어째서 이리도 제 몸을 아낄 줄 몰라. 아비가 속상해 숨이라도 넘어가길 바라는 것이냐?”
그리 말하며 커다란 손으로 어린 저를 일으키던 그 날의 기억이 여전히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차라리.’
한시도 그를 아끼지 않던 순간이 없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를 제가 얼마나 존경하였는데.
‘차라리 말씀을 해 주시지. 대의를 위해 네 몸이 필요하다고. 나와 몸을 바꿔 당신이 조금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신영의 얼굴을 한 주경현이 이를 꾹 물었다.
이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넘칠 것 같았다.
‘땅에 떨어진 주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내게 몸을 내어 달라 하셨다면. 너도 신영의 자식이니 대의를 위해 네가 희생해 달라 설득이라도 하셨다면.’
서로를 붉어진 눈으로 응시하는 그들을 세화 역시 지켜보고 있었다.
오라버니들을 데리고 바로 빠져나갈 수 없었던 것이 적룡의 영단 외에 이 이유 때문이었다.
주경현은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유를 몰라 혼란스러워했다.
그런 그에게 지금껏 신영이 벌여 온 일들을 세화가 말해 주었으나 그는 끝까지 믿지 못했다.
그를 믿게 만든 것은 천령이었다.
누군가 그의 몸을 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신영이 맞을 것이라고.
그런 주경현을 몸을 되찾으라는 명목으로 이곳으로 끌어들였다.
바로 저 장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사죄해.”
신영의 모습을 한 주경현이 낮은 목소리로 요구했다.
“뭐?”
“사죄하라고. 내게 사죄해.”
주경현이 신영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갔다.
“지금이라도 내게 진심을 다해 빌어. 죄송하다고.”
수많은 생각이 이 순간 주경현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지경이 되어서도. 어리석게도 늘 그랬듯 아버지가 팔을 벌려 주길 바라는 자신이 있었다.
오해라고. 불의의 사고였다고.
결코 네 몸을 빼앗으려던 것이 아니라고. 일을 바로잡을 방법을 찾고 있었다고.
어떻게 다른 이도 아닌 네 몸을 빼앗을 수 있겠냐고. 너는 내게 가장 귀한 아들이라고.
그렇게 말해 주길 바라는 자신이 있었다.
제가 모르는 어떤 사정이 있었다고, 아비의 입에서 그런 변명이 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한 말씀만 해 주세요. 미안하다고. 이해해 달라고. 대의를 위해서였다고. 아버지께서 때때로 말씀하셨던. 주가의 적룡으로 거듭나 꼭 다시 주가의 명예를 모든 환족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려놓겠다는 꿈 때문이었다고.’
그런 바람을 가지며 눈앞을 응시하느라 그는 지금 제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핏발이 선 눈으로 자신의 모습을 한 아버지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도.
덜덜 떨리는 턱을 한 채 입술을 물고 있다는 것도.
그 모습이 보는 이들에게 ‘찬탈’이란 단어를 상기시켰다.
날카롭고 써늘한 시선들이 날아오자 주경현의 모습을 한 신영이 더는 망설이지 않고 노성을 질렀다.
“뭣들 하느냐?! 등극식은 이미 시작했고 내가 이미 신영이다! 내가 신영이야! 그러니 무사들은 내 말을 들어라! 광증을 일으키신 전대 신영을 어서 빨리 안으로 모셔!!”
무사들 역시 있을 수 없는 부자간 대치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차대 권력자를 따르기로 하며 우르르 노쇠한 몸을 한 주경현을 억류하러 달려갔다.
주경현의 입가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든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제 아버지가 저리 나오는 것만큼은.
사죄의 말 한마디 없이 당연한 듯 저를 내치는 이 상황만큼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속에서 땅이 갈라지고 불길이 터지듯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제 몸을 통제조차 할 수가 없었다.
피가 날 정도로 세차게 혀를 물어 그런 몸을 통제한 주경현이 다시 눈앞에 있는 제 몸. 그 안에 든 제 아비를 향해 노성을 질렀다.
“광증? 실성?! 천하에 둘도 없을 패륜아가 아비를 죽이고 자리를 찬탈하려 하면서도 저리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다니. 이것이 말이 되는 것이냐!”
피가 섞인 침을 땅에 퉤 하고 뱉었다. 이에 베인 살점이 일부 떨어져 나갔으나 그는 아픈 줄도 몰랐다.
“그래도 나는 네가 잘못했다고! 주가를 살려 보려 그리했다고!! 내게 무릎 꿇고 사정하면 이해하려 했다! 널 이해하고 넘어가려 했어! 한데 그런 내게 돌아오는 것이 이것이냐? 이것이 네 대답이야?!”
“뭣들 하느냐니까! 당장 신영을 모시래도!”
“모실 것 없다! 내 발로 돌아갈 테니. 하나 지금은 아니다.”
살기 등등한 얼굴을 한 노인이 천령의 부축을 받은 채 멈춰 선 무사들의 사이를 헤치고 걸었다.
절룩이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제대로 걷기 위해선 시간이 꽤나 필요했다.
드넓은 회장엔 어느새 음악이 사라져 있었다.
보는 이들의 숨소리조차 억눌러져 있던 탓에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선명히 들릴 정도로 고요한 상태였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주의가 신영과 소가주 두 사람에게 쏠려 있었다.
제단 저 위에서 목함을 든 일보관의 주의조차도.
그 상황에서 세화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앉은 자세 그대로 몇 겹이나 되는 새하얀 의복 사이에서 긴 활과 화살을 꺼내들었다.
촉이 날카로운 화살을 동시에 세 손가락에 낀 채 시위에 걸고 잡아당겼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으나 세화에겐 충분했다.
탕―!!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우레가 운 듯 거대한 소리가 식장을 뒤흔들었다.
쐐액!
이내 번개처럼 날아간 화살 세 개가 목함을 일보관의 손에서 분리시키며, 걸쇠를 망가뜨려 뚜껑을 열었다.
목함이 떨어지는 속도보다 느려 마치 허공에 멈춘 듯 존재를 드러낸 적룡의 영단을 더 높고 먼 허공으로 띄워 보냈다.
“!!!”
눈앞에 있는 아들의 존재에만 신경 쓰고 있던 신영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 제 최후의 보루가, 봉인이 풀린 적룡의 영단이 붉은색 영기를 흩뿌리며 떠오르는 장면을 눈에 담았다.
‘안 돼!!’
“반역이다!”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세화가 적자줏빛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소가주는 천륜을 저버린 채 제 아비를 구속하여 밀실에 가두고, 신영의 위를 찬탈하려 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와 동시에 주씨 혈족들이 일제히 숨을 삼켰다.
“제 아버지를 고문하여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도록 몸을 망가뜨리고, 가문을 제 손에 넣기 위해 이지를 상실했다 불명예를 씌우기까지 하다니!”
말이 끝나자마자 주씨 혈족들이 가득한 단상들을 돌아본 세화가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도 그간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신영께서 소가주에게 어떤 아버지이셨는지. 소가주의 몸에 난 작은 상처를 제 몸을 뚫고 지나간 칼보다 더욱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며 아끼신 분입니다.”
주씨들의 눈앞으로 지금껏 소가주의 안위에 누구보다 무엇보다 정성을 다하던 이전 신영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분께서 저렇게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육문에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소가주를 세상 무엇보다 귀애하시던 분께서! 소가주가 달라는 것이면 그 무엇이라도 아끼지 않고 내주셨을 신영께서! 저리 실망하시고 용서할 수 없다 결심하시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겠습니까!”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어느새 주가의 원로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하여, 나, 주세화는.”
어느새 다시 한번 활에 세 개의 화살을 동시에 건 세화가 주경현의 얼굴을 한 신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결코 네가 신영이 되게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