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5화 (175/254)

* * *

전각들은 결국 영력을 품은 불길을 잡지 못하고 모두 불타 버렸다.

모든 시종이 제식에 사용될 귀한 물품들을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움직였으나 뜨거운 열기가 남은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등극식은 당장 오늘 자정에 예정되어 있었고 부족한 물품들을 보충하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결국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주가의 보고가 문을 열었다.

무수히 많은 보물들이 몇백 년 만에 꺼내어져 빛을 보았다.

신영은 조금 전 발생했던 불미스러운 일을 지우기라도 할 것처럼 이전보다 화려하게 등극식을 준비시켰다.

모든 복도에 세 걸음마다 금등을 매달았고, 아름다운 그림과 장식물들을 등극식이 준비되는 장소와 근처 전각들 안에 그득 배치했다.

환계를 구성하는 영력 중 주가 적룡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길일.

하늘 위엔 일찌감치 붉은 달이 떠 있었다.

수천 개의 등 덕분에 너른 저택은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 아름답게 빛을 냈다.

늦은 저녁 시간 이후엔, 등극식 동안 닫혀 있던 저택이 개방되며 문이 열렸다.

자정의 등극식에 참석하기 위한 주가 혈족들의 마차가 그 사이로 끝없이 이어졌다.

주씨들은 준비된 식장으로 들어서며 분주한 시선을 이곳저곳에 흩어놓았다.

“어라? 조금 전 하늘로 솟아올랐던 검은 연기가 화재가 아니었나 봐요?”

“그러게요. 분명 불이 난 것으로 생각했는데.”

“한데 다른 가문의 가주들은 참석지 않은 것 같지요?”

“백가주가 저택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이가 있다니 그는 온 듯하지만, 다른 가문의 자리는 아예 준비되지 않네요. 그 외엔 전부 불참인가 봐요.”

수군대는 혈족들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원로석에 자리한 이들의 표정이 제법 굳어졌다.

“어찌어찌 사고는 드러내지 않으며 준비를 잘 마치긴 했나 봅니다.”

원로 중 하나가 나직이 속삭이자 다른 원로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공물도 없고. 참석자도 없고. 이리 모양새가 안 나는 등극식도 없을 겁니다.”

“뭐. 이번엔 감수해야지요. 육문의 콧대가 하늘까지 높아진 것을 어쩌겠습니까.”

“그 와중에 우리 소가주는…….”

한 원로가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말을 삼켰다.

다른 원로가 쓴웃음을 지으며 소가주를 변명했다.

“마음이 급했나 보지요. 백기하가 쓸데없이 이곳에서 결계를 세운 것은 사실이니까요. 대놓고 너희를 믿지 못하겠다는 표시나 다름없으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트집을 잡고 싶기도 하고, 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혹여 그 화재 사건을 또 트집 잡아 문제를 만들지는 않겠지요?”

다른 원로의 입에서도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전대 신영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소가주를 잘 타이르시며 가르치셨을 것인데. 신영께선 어찌 이리 갑자기 모습도 보이지 않으신 채 양위를 하신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원로들이 그리 서로를 보며 한마디씩 하고 있을 때였다.

“백가주 부처께서 드십니다.”

시종의 목소리에 원로를 제외한 주씨들의 눈이 일제히 동그래졌다.

“?”

“지금 저 시종이 뭐라고.”

“부처요? 백가주께서 혼인을 하셨다고요? 누구랑요?”

주가 혈족들의 시선이 황망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그 사이로 새하얀 예복을 입은 두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백기하의 옆에서 걷고 있는 세화를 발견한 이들이 조금 전보다 더욱 놀라며 입을 벌렸다.

“맙소사. 명윤 원로 댁 그 아가씨네요?”

“세상에. 저 아가씨는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언제 돌아와서 혼인식까지 치른 건가요?”

“아니, 잠깐……. 생각해 보니 명윤 원로께선 갑자기 재산을 모두 정리한 채 그걸 다 배상금의 명목으로 백가주에게 넘기셨잖아요. 혹 딸과 백가주의 혼사를 알고 아예 가적을 옮기기로 한 것이라거나?”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명윤 원로가 그럴 분은 아니시지요.”

“맞아요. 전장에서도 서로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가장 격렬하게 맞붙으셨던 두 분 아닌가요. 백가에 있는 동안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리하신 건 아닐지 생각되기도 하네요.”

그런 말들을 꺼내 놓으면서도 수많은 눈동자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조금도 놓치지 않은 채 세화와 백기하의 뒤를 따랐다.

새하얀 예복을 정갈히 차려입고 등장한 두 남녀의 모습은 온통 붉은 등과 적색 예복으로 가득한 그곳에서 몹시 이질적이었다.

오래도록 정성 들여 간 먹으로 그리기라도 한 걸까.

선명한 백가주의 이목구비는 불꽃이 만들어 내는 음영을 받아 더욱 진하게 돋보이고 있었고.

대단한 무인임을 조금도 의심치 못하게 하는 단단한 몸 역시도 겹겹의 예장에 가려지지 않은 채 탁월한 기품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 옆을 걷는 또 다른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자수가 은은히 들어찬 순백색의 옷을 입은 그녀는 복잡한 모양으로 머리를 땋아 맵시를 낸 주씨 여인들과는 달리 새까만 머리카락을 그대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한데 몇 개의 머리 장신구만 걸친 그 단출한 차림이 얼마나 순수하고 고혹적이던지.

보는 이들에겐 있는 힘껏 공을 들인 제 머리 모양이 너무 요란하고 정신없게만 느껴졌다.

하늘엔 붉은 달이 주가의 영력을 그득 뽐내고 있었건만 마치 지금 이 자리의 주인공은 저들 같았다.

“아!”

그때 백가주의 곁을 걷던 아가씨가 마치 옷을 밟은 듯 잠시 주춤 멈춰 섰다.

그러자 백가주가 몹시도 신속하게 여인의 낭창한 허리를 받쳐 들었다.

그 움직임이 빠를 뿐 아니라 매우 정확하여, 백가주가 걷는 내내 그 여인의 일거수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거기 있는 누구도 모를 수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누군가가 한숨을 흘려내자 마치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일제히 한숨들이 겹쳐지며 흘러나왔다.

“저 아가씨는 얼마나 좋을까요. 육문의 수장이자 환계 유일의 신수가 부군이라니. 게다가 저리 다정하시고.”

“혼인동맹 얘기가 나올 때 내가 제일 먼저 손을 들 것을 그랬어요.”

“맞아요. 나도요.”

모두가 시종도 두지 않고 걸어가는 백가 부처의 뒤를 시선으로 쫓고 있을 때였다.

일보관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백가주 부처를 지켜보는 주경현의 뒤로 조용히 다가왔다.

“명 하셨던 대로 준비를 마쳤습니다. 화재가 났던 전각마다 가지고 있던 백가 영단을 사용해 기운을 묻혀 두었으니 그것을 조사한다고 하면 며칠간 더 저들을 이곳에 억류해 둘 수 있을 것입니다.”

침묵하는 신영을 향해 일보관이 마른침을 삼킨 후 말을 이었다.

“하나, 신영. 낮에 벌어진 일로 원로들의 반응이 좋지 않은 데다 주가 혈족들도 이리 많이 참석하였는데 그리 공개적으로 일을 벌이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적룡의 영단의 봉인을 푼 이상 탈피를 했건 하지 못했건 간에 백기하와 한번은 당당히 맞붙을 수 있지 않겠느냐. 사용하지 못한 영기들도 작동시킬 수 있고.”

“그건, 그렇지만-.”

“혈족들의 앞에서 놈을 몰아붙여야 한다. 그러면서 화재 사건까지 뒤집어씌울 수만 있다면, 만약 탈피가 조금 더 늦어지더라도 내 입지를 확고히 만들 수 있게 돼.”

“혹 등극식에 참여한 육문의 수장을 그리 대했다가 난리가 난다면-.”

“나면 뭐 어쩔 것이냐. 그때쯤이면 적룡의 영단의 기운을 사용하여 저 연놈들을 내가 다 집어삼킨 이후일 텐데. 내게 골수까지 빼 먹히고 난 저 둘을 내놓으라고 해 보았자 애통하고 침통하다 서신이나 보내면 그만인 것을.”

적룡의 영단의 봉인을 푸는 것은 그에게도 정말로 최후의 보루나 다름이 없었다.

환계의 시작부터 전해져온 그 귀하고 방대한 힘을 일회성으로 날려 버리다니.

그러나 그런 배수의 진을 쳐야 할 정도로, 그는 정말로 몰려있는 상태였다.

‘……이만큼 시간이 흘렀다면 그놈은 아마 죽었겠지.’

아들의 혼이 담긴 몸은 당장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달아나 약도 제때 쓰기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 있긴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 혼을 잃은 이상 홀로 탈피할 수있는 가능성이란 희박했다.

그렇기에 무슨 짓을 해서건 이 밤만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주세화야 제 오라비들의 목숨이 내게 잡혀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테고. 무슨 짓을 해서건 백기하를 잠시만 억누를 수 있다면. 그래서 영기들만 발동시킬 수 있다면…….’

서로를 부축하듯 가까이 한 채 걸어가 자리에 앉는 두 남녀를 지켜보며 신영이 흉흉히 눈을 빛냈다.

* * *

“괜찮아? 앉을 수 있겠어?”

“그럼요.”

백기하의 나지막한 속삭임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우아한 움직임으로 제게 주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에서 어떤 불편함도 찾아볼 수 없었던 백기하가 조금 감탄했다.

“대단한데.”

그녀가 조금 전 비틀거렸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몸 위를 흐르듯 고혹적으로 덮은 아름다운 예장 안쪽으로 세화는 단검으로도 모자라 살을 걸지 않은 긴 활과 화살까지 여러 대 숨겨온 것이다.

신영이 결계를 감시하기 위해 세워 두고 갔다가 그들이 쓰러뜨린 무사들에게서 빼앗은 것이었다.

저걸 정말 다 들고 갈 수 있을까.

걱정에 걱정을 더하던 백기하는 세화가 결국 여기까지 그것들을 들키지 않고 가져온 것으로도 모자라 티 나지 않게 자리에 앉기까지 하자 나직이 목을 울렸다.

“그대 정말 대단하다.”

“내가 한다면 한다니까요.”

“응. 알지. 그럼.”

식장 주위로는 어마어마한 수의 무사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건 백기하와 세화의 자리 근처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사들에게 조금 떨어져 있으라 말해 보았자 화재 사건을 핑계로 식을 방해하려는 자가 있을 테니 그럴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올 테고.

세화는 괜스레 움직여 화살촉끼리 부딪치는 금속성을 내지 않기 위해 우아한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며 식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윽고 어느 순간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하더니 곧 제단 위로 커다란 불꽃이 올랐다.

무희들이 제단 앞에 마련된 공간 안으로 부드럽게 움직이며 다가와 양손에 든 붉은 비단을 휘날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장 첫 신영의 등극식, 최초의 적룡의 모습을 형상화한 무도였다.

그 사이로 본래는 소가주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야 하겠으나 오늘만큼은 일보관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일보관은 긴 목함 하나를 정중히 받쳐 들고 제단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한데 그 목함 위로 눈이 있는 자라면 보지 못할 수 없는 붉은 영기가 타오르듯 넘실거리고 있었다.

“!”

이미 한번 적룡의 영단을 소유한 적 있는 세화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건…….”

백기하도 그 영기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적룡의 영단이에요.”

“정말로 가지고 나왔군.”

“한데 저 영기는…. 저게 뭐죠? 저런 반응은 내게 있는 동안에도 한 번도 본 적 없던 것인데.”

그들이 목함을 응시하는 사이, 악사들이 내는 음률이 더욱 커져 갔다.

그 노래 사이를 가르며 소가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사가 만들어 내는 화려한 형태의 적룡이 소가주의 어깨부터 발끝까지를 온통 감싸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신영의 위를 가진다는 생각 때문일까.

정면의 제단을 응시하는 그의 눈이 더없이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를 발견한 주가 혈족들이 “이상하게도 오늘의 소가주님은 예전의 저분과는 조금 달라 보이네요.”, “예복 때문일까요.” 등의 대화를 조심스럽게 나눌 때였다.

신영의 뱀같은 눈이 세화와 백기하를 향해서 일순 움직였다.

살기를 조금도 숨기지 않는 눈빛이 그녀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붉은 피를 삼켜내고 싶은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각기 바라는 것을 가진 두 음영진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했다.

섬뜩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긴 주경현이 제단으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더 떼었을까.

그런 소가주의 속도보다 한발 빠른 속도로.

어떤 목소리가 악사들의 악기 소리에 밀리지 않도록 거칠게 날아들었다.

“황망하고, 비통하구나.”

제식을 흙발로 짓밟는 듯한 노성을 내며 누군가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그곳에 나타났다.

“!”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옮겼던 모두의 눈이 더없이 크게 뜨였다.

여기서 저런 말을 해서는 결코 안 되는 이가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 신영?!”

더없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관을 받기 위해 제단으로 향하던 주경현의 표정 역시도 이때만큼은 격동하듯 흔들렸다.

“신영의 위가 그리 탐이 나더냐? 이리 아비의 목숨줄을 조이고 가진 것을 죄 빼앗을 만큼?”

‘마, 맙소사. ……저, 저놈이 어떻게!’

죽어 가는 제 몸에 가두었던 아들이.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아들이 이 시간 이곳에 나타나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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