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254)

백기하가 참담한 신음을 삼켰다.

본래는 두 형님들에게 이곳 밀실을 출입하는 주경현의 영단을 미리 내줄 생각이었다.

하여 위급 상황을 대비하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의사소통이 이리도 되지 않으니…….

‘이런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서신을 적어 왔어야 하는데.’

하지만 비장한 표정을 지은 형제는 백기하를 향해 가슴을 두드렸다.

“백가주께서 왜 이곳에 계신 것인지 이제야 상황을 알겠군요. 세화에게 저희를 꺼내 달라는 부탁을 받으셨다는 것을요. 하나 백가주.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그리고 그 비장한 입술 사이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말들을 쏟아 냈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도망을 치긴 왜 칩니까?”

“……?”

“……??”

“저희는 이대로 이곳에 남아 저희의 무죄를 명명백백히 증명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을 위해 제 발로 이곳에 들어온 것을요!”

“?!”

“!!!”

‘미친. 뭐? …지금, 지금 뭐라고?’

“세화가 알게 된 것을 보면 다들 아시게 된 것 같군요.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가족들에겐 우리가 있는 곳을 절대로. 절대로!! 밝히지 말아 달라 신신당부를 했건만.”

“입막음을 단단히 해 두었는데 대체 어디서 소식이 새어 나간 건지.”

세화와 백기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입을 떡 벌렸다.

‘아, 아니. 지금 이 두, 두 바보가 대체 뭐라는 거야?’

기가 막혀 목소리도 내기 힘들었던 세화가 허겁지겁 다시 발톱을 꺼내 주가한의 다리 위에 무언가를 써 내렸다.

“응? ……아버지, 서신. 받는다? 아버지에게 서신을 받은 적 있냐고?”

아기 백호가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아버지께서 서월의 습격이 있던 그때 어머니와 오라버니들에게 서신을 보냈다고 했다.

“네가 아기라 아직 뭘 잘 모르는구나. 우리 무장들끼리는 낯간지럽게 서로를 염려하는 서신을 전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렇단다. 무사의 안위는 그저 마음속으로 염려하면 되는 것이지!”

“……!”

‘미친. 못 받았구나.’

입만 뻐끔거리던 세화가 황급히 또 다른 말을 적어냈다.

“…어머니. 상황. 알다. 음? 우리 어머니의 상황을 알고 있냐고?”

아기 백호가 또다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어머니께서도 무장이나 마찬가지이시란다. 그분께서도 십 년이 넘는 전쟁 내내 의료사로 전장을 누비셨으니 지금도 그 변경에서 책임을 다하고 계시겠지.”

“어머니 같은 대단한 분을 염려하는 것 자체가 그분을 무시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단다. 전쟁의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 이후 뵈면 되지 않을까. 하하.”

“…….”

‘맙소사.’

뭘 몰라도 이렇게까지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세화는 도무지 뭐라 더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저희 걱정은 마십시오, 백가주. 여기가 어두워서 그렇지 저희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백가주께서 칭찬해 주신 대로 저희가 전장에서 참 위엄 있었지 않습니까. 이곳을 관리하는 이들 또한 그걸 잘 알고 있어 대우가 괜찮습니다.”

“저희 입으로 말하기는 참 그렇지만, 이 일로 인해 스스로는 알지 못했던 저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게 되었고요. 이런 것이 바로 전화위복인가 싶습니다.”

“…….”

“…….”

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그들에게 뭐라 더 말도 하기 싫은 기분이었다.

열의 없이 주가한의 다리 위에 ‘내일. 온다.’ 같은 단어를 적은 아기 백호가 풀죽은 상태로 커다란 백호에게 돌아갔다.

제 몸보다 두꺼운 다리를 툭툭 치며 소리를 냈다.

“뀨. 큐.”

-가죠.

“크릉.”

-……그래.

아기 백호가 큰 백호의 목 위에 오르자 주가윤이 백기하를 보며 말했다.

“걱정이 되어 세화가 저희를 찾아오려는 마음은 알겠으나 저흰 이리 잘 지내고 있습니다.”

주가한도 말을 보탰다.

“네. 그러니 백가주께서 세화가 저희를 위해 나서다 곤란한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부디 도와주십시오.”

백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두운 돌길을 다시 걸어 올라갔다.

그런 그들의 뒤로 형제들의 밝은 목소리가 쫓아왔다.

“그래도 혹시 내일 세화를 볼지 모르겠네.”

“그럼 이러고 있을 수가 없구만. 오랜만에 만나는 것인데 더없이 위엄 있는 무사로 성장한 이 오라버니의 모습을 자랑하기 위해서라도 잠깐이나마 더 단련해야겠어.”

“나도 같이하자. 나씨가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면 살려 둘 수 없지.”

“좋아. 어제 하던 거 이어서 하자.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둘.”

“…….”

“…….”

백호가 다시 돌길을 걸어 내려갔다.

“엇! 왜 다시 오셨습니까?”

챙!

날카로운 금속성을 내며 신수의 발톱이 선연한 예리함을 드러내며 뽑혀 나왔다.

그 발톱을 들어 백호는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던 주가한의 다리에 세화가 그랬던 것처럼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주세화. 혼인. 백씨. 백씨. 백씨.>

“……헉! 세화가 백씨와 혼인을 했습니까? 나씨가 아니라요?”

“뭐라고? 나씨가 아니야? 그리고 정말 혼인을 했어?”

* * *

“빨리 서둘러라. 어서!”

일보관의 다급한 손짓에 허겁지겁 달려온 시종들이 들고 온 영기(靈器)들을 풀숲 사이에 재빠르게 숨겼다.

영기는 영력을 사용하여 특정한 능력을 발휘하는 물건이었다.

그런 영기들이 이미 지천에 숨겨져 있었건만 또 다른 영기들을 가져다 나르는 손길들이 분주하기만 했다.

‘언제 이 결계가 사라질지 모른다.’

일보관이 별채 주위로 여전히 새하얗게 올라와 있는 백가의 결계를 보며 생각했다.

일보관의 측근 시종이 불안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이리 대놓고 일을 벌여도 되겠습니까. 이러다 백가주가 결계를 푸는 순간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죄 보게 될 텐데요.”

“그런 말을 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옮기거라.”

일보관이 화를 낼 새도 없이 대답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그는 시종을 시키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제가 직접 영기들을 옮겼다.

백가주가 보는 곳에서 직접 작업한 것도 아니니 제 발로 별채로 들어간 이가 뒤늦게 따진들 그가 무슨 책임이 있으랴.

누가 남의 영지에 들어와 저리 대놓고 결계를 올리고 있으라 하였나.

그보다 걱정되는 것은 신영의 심기가 매우 좋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이러다 내가 몸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몸을 빼앗기게 생겼어.’

일보관은 신영의 측근으로 지내는 동안 모을 수 있는 만큼 영단을 챙겨 왔다.

하여 본래 지닌 영력에 더해 다른 원로들에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대단한 영력을 지니게 되었다.

‘지금껏 이 영력은 내 자부심이었건만…….’

하지만 지금 신영은 자칫 잘못하면 탈피를 못 해 새로운 몸을 찾게 생긴 지라.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자신은 주인의 먹이가 되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일을 제대로 해내고 있을 때는 보아 넘겨 주실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명령하신 일들을 수행해 낼 수밖에.’

백기하가 신수든 주세화가 혈족의 여식이든, 알게 뭐란 말인가?

이미 주가에 들어온 이상, 그들은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신영은 주가가 환계의 긴 역사와 함께 모아 두었던 수많은 영기들을 이번에 모두 꺼내 들었다.

이 등극식을 통해 그들을 반드시 잡아먹고야 말겠다는 결심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영기 여러 개를 한 번에 발동시킨다는 것은 위험 부담이 생기는 일이었다.

마치 좁은 공간에서 생겨난 큰 불길이 스스로 꺼지는 것처럼.

대기 중의 영력이, 영기가 사용하는 양을 뒷받침하지 못해 모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멈춰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여 영기들을 두 곳에 나누어 작동시키려 한 것인데.

“이렇게 마구잡이로 넣어도 되겠습니까? 이러다 하나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벌써 일이 틀어졌다. 백가주의 별채에 준비해둔 영기들만으로는 두 거대한 영력의 소유자를 한 번에 제압할 수 없어. 짧은 시간이나마 확실히 누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불길한 소린 집어치우고 어서 준비를 마치거라. 이러다 일이 틀어지면 신영께서 너라고 가만히 두실 것 같으냐!”

그때 그들의 뒤에서 누군가 급히 달려왔다.

호흡을 고를 새도 없이 일보관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신영께서 이곳으로 오십니다!”

“뭐야?!”

당황한 일보관이 서둘러 상황을 종료시키고 시종들을 불러모았다.

오래지 않아 거침없는 구두 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곧 주경현의 모습을 한 신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시중인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일보관이 잔뜩 긴장한 채 제 주인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신영.”

“어떻게 되었느냐?”

“아직 결계가 풀리지 않은 것을 보니 공격이 있을지 모른다 생각해 경계하는 중인 듯합니다.”

“영기는 어떻게 작동시킬 계획이고?”

“오히려 결계를 펴 주어 저희에겐 잘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언제까지고 저런 힘을 유지할 순 없을 테니까요. 결계가 사라지는 대로 바로 영기를 발동시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쳐 두었습니다.”

“그래? 일단 저 안에 그놈이 있는 것은 확실히 확인한 것이냐.”

“네?!”

뜻밖의 질문에 일보관이 깜짝 놀랐다.

“……그, 그렇지 않겠습니까. 일행이라고는 고작 셋뿐이었는데 그중 저런 결계를 펼칠 수 있는 것은 백기하밖에는 없으니까요.”

신영의 눈이 가늘어지는 듯하자 소매 속 일보관의 주먹이 안으로 말려들었다.

긴장으로 손끝이 창백해질 정도였으나 그런 티를 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물었다.

“한데 신영께서 가져오신 저 많은 물품들은 다 무엇입니까? 저것도 영기입니까?”

“아니. 내 혼인 선물이다.”

“혼인 선물이요?”

“그래. 대대로 신영의 혼인 선물이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

비릿하게 웃은 신영이 뒤에 시립한 이보관에게서 상자 하나를 받아 들었다.

그것의 정체를 익히 아는 일보관이 더욱 창백해진 안색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내 지금부터 이것을 전해 줄 것이니 너는 혹 누군가가 결계를 깨고 빠져나가려 하면 곧장 영기를 발동시켜라.”

바짝 다가온 신영이 드글드글한 살기를 드러낸 채 일보관을 향해 말했다.

“어떤 경우에도 백기하와 주세화 그 연놈들을 결코 놓쳐선 안 된다. 실패한다면 너 역시 살아남을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신영의 손에 들린 상자를 애써 외면한 일보관이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예, 신영.”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