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0화 (170/254)

* * *

“그, 연놈들이 뭘 해? 지금 뭘 했다고?”

신영이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그런 제 모습을 자각하고 이를 갈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혼, 혼인을 하셨다 하였습니다. 두 분이 서로를 매만지는 모습을 보아하니 거짓 같지는-.”

“그래서 각자 방으로 가지 않고 한 방으로 들어갔다, 이거냐!”

“네. 게다가 방해받고 싶지 않다 하시며 결계를 두껍게 올리신 탓에 준비한 것들이 효력을 발휘하는지 그 여부를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일보관은 뭘 하고 있느냐.”

“명윤 원로의 여식을 위해 주룡실에 준비했던 것들을 서둘러 옮기고 있습니다.”

“…….”

“신영, 이후엔 어찌할까요.”

“…….”

신영의 손이 초조함을 채 삭이지 못하고 안으로 곱아들었다.

등극식은 자정부터 시작될 것이고, 식이 끝나면 저년은 제 손을 떠나 백가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들이 등극식 날짜에 딱 맞춰 온 탓에 가뜩이나 시간이 많지 않은데.’

혼인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딴 핑계로 그의 계획을 처음부터 차단해 버렸다.

아들의 혼이 든 그릇도 빼앗겨 탈피를 장담할 수 없는 마당에, 제 마지막 수단이 될 그년의 영력까지 잃게 된다고?

“그럴 순 없지. 절대 그럴 순 없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팔걸이를 두드리던 신영이 일순 고개를 치켜들었다.

“결계를 펼쳤다 했지?”

“네.”

신영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교룡에게 이미 백기하의 몸이 성치 않은 것에 대해 언질을 받았던 터였다.

안위를 지키기 위해 저따위 변명으로 서로를 한 방에 두고 결계를 쳤나 본데.

‘결계는 공격을 막을 뿐 아니라 바깥에서 무슨 일을 하든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을.’

정상이 아닌 몸으로 언제까지 저 결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만약 유지할 수 있다 하더라도 힘을 저렇게 사용하고 있으니 분명 어딘가에서 탈이 날 것이다.

날카롭게 눈을 치뜬 신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지금 곧 다과를 풍족히 준비해 가지고 오거라.”

“네? 신영, 어디로 가실 예정이십니까.”

“어디긴. 당장 백기하의 처소로 가야겠다. 이보관!”

“예! 신영.”

호명을 받은 이보관이 신영의 심기를 상하게 하지 않으려 재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지난번 네게 준 것을 잘 보관해 두었느냐.”

“신영께서 맡기신 것을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할 수 있겠습니까. 목숨처럼 보관하고 있습니다.”

“친분 있는 두 사람이 혼인을 했다는데 내가 혼인 선물을 주지 않을 수가 없구나. 그것을 가져오거라.”

“네!”

“제까짓 게 아무리 결계를 거두고 싶지 않다고 해도 나를 바깥에 세워 둔 채 자정까지 버틸 수는 없겠지.”

신영의 얼굴이 살기를 담은채 일그러졌다.

“어떻게든 저것들이 이곳에 있을 때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 서둘러라.”

* * *

별채야 오가는 이가 적어 고요하기 그지없었으나 어디까지나 별채에 한정된 이야기일 뿐.

신영이 머무는 거대한 전각은 자정부터 있을 등극식의 막바지 준비로 모든 시종이 분주했다.

그 사이를 거대한 백호의 몸이 오가는 이들의 눈을 신중히 피하며 잔뜩 기척을 죽인 채 나아갔다.

쉬운 일은 아닌 데다가 시간이 제법 걸리는 일이었으나 신수의 형태여야 어떤 결계에도 걸리지 않을 수 있기에 변용을 풀 수조차 없었다.

작은 백호가 그런 신수의 목덜미 위에서 몸을 낮춘 채 정면을 응시했다.

“가한 님과 가윤 님은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밀실 입구로 들어가면 만나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입구를 열 수 있는 영단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다행인 것은 밀실 입구에 대한 설명이 제법 자세했다는 것이었다.

접근하기는 어려웠으나 그 장소에 도착하니 어떤 곳이 입구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백호의 모습을 한 백기하가 벽에 바짝 몸을 붙이자, 세화가 천령에게서 받은 주경현의 영단을 입에 물고 입구에 가져다 댔다.

쿠르르릉.

나직한 소리를 내며 벽이 열렸다.

새까맣게 어두운 통로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안에서 다시 문을 닫은 그들은 잔뜩 숨을 죽였다.

함정인지 아닌지를 날카롭게 판단한 후, 통로 안으로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아무리 이동해도 어두운 통로 안에선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라버니들은 어떤 상태이셨어? 두 분 다 무사하셨어?”

“그게 저…….”

“저, 뭐?”

“……아닙니다. 제가 본 것만으로는 판단하기 무리가 있으니 세화 님께서 직접 보시고 판단하시면……. 일단 두 분 다 목숨에 지장은 없으실 것 같으셨습니다.”

천령은 대체 왜 말을 아꼈을까.

목숨에 지장은 없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실제로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조금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이 통로가 너무나 고요해서 더더욱.

‘……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데 여기 정말 오라버니들이 있다고?’

그런 의문을 품은 채 계속해서 새까만 어둠 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였다.

작은 목소리 하나가 빛 한 점 없는 공간 저 안쪽에서 나직이 전달되어왔다.

“형, 들어오려다 무슨 일이 생겨서 다시 나간 건 아닐까? 아무도 여기까지 오는 기색이 없는데?”

“!”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란 세화가 튕기듯 앞으로 뛰어나갔다.

지금 제가 무슨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잠시 잊고서.

“뀨, 꾸?!”

그녀가 어두운 통로 안에서 바람 소리를 내며 튀어 나가자마자 통로가 꺾어지는 곳에서 상황을 살피던 그림자 하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주가윤이었다.

“뭐, 뭐지?”

제게 달려든 것이 저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는 듯하자 가윤이 눈을 껌뻑거렸다.

세화의 머리 부근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이 어둠 속에서 사물은 식별할 수 있지만 자세한 외형은 구분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 사이 세화 역시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주가윤과 그 옆에 서 있던 주가한의 모습을 확인하고 꼼꼼히 훑었다.

천령의 말처럼 따로 다친 곳이 없어 보였고 또렷한 시선에선 독이나 환약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강아진가? 혹시 저 문을 네가 열었어?”

그 말과 동시에 백기하가 통로 안쪽에서 거대한 몸을 드러냈다.

빛 한 점 없던 공간에서 새파란 눈이 전등처럼 떠올랐다.

“!”

가윤은 물론이거니와 잘 놀라지 않는 주가한까지도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멈췄다.

작은 백호가 큰 백호를 올려다보며 소리를 냈다.

“큐, 꾸.”

신호를 받은 큰 백호가 그들이 있는 밀실을 세세히 들여다보았다.

푸른 전등처럼 새파란 눈이 고개를 끄덕였다.

채 풀리지 않은 결계가 있다는 말이었다.

이곳에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기감을 죽인 보람도 없이 신영에게 신호가 갈 것이라는 말이기도 했고.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사람의 말도 할 줄 모르고. 오라버니들이 모르는 모습으로 변용해 있는 참인데 대화는 어찌해야 하는 걸까.

세화가 잠시 난감함에 얼굴을 찌푸렸을 때였다.

자신들을 해치려 덤벼들지 않는 백호 두 마리를 가만히 응시하던 주가한이 큰 백호를 향해 물었다.

“혹시, ……백가주이십니까?”

“!”

이리 반가운 질문이 세상에 또 있을 수 있을까!

‘맞아요! 맞다고요!’

세화는 제게 물은 것도 아닌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가주, 이런 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저희를 구하러 오시기라도 한 겁니까?”

커다란 백호 역시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곧장 이들을 데리고 달아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형님들을 찾자마자 등극식이고 적룡의 영단이고 개의치 않고 일단 빠져나갈 생각이었지만.’

신영의 모습을 한 주경현과 만나 무언가를 계획한 지금은 사정이 조금 바뀌었다.

하지만 그걸 여기서 모두 설명할 수는 없고.

핑!

마음이 급한 나머지 아기 백호가 야무지게 발톱을 꺼내 들었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그것을 움직여 주가한의 다리 위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었다.

글자임을 바로 알아챈 주가한이 제 피부 위로 새겨지는 감각에 집중했다.

“내일. 연회. 도중. 그리고. 세화. ……세화?”

하지만 글씨를 빠르게 적는 데에 너무 집중해서일까.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었을지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나열됐다.

아니나 다를까.

“응? 내일 세화가 여길 온다고? 여기? 신영의 저택에?”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세화.>

“……뭐라고? 세화가 나씨와 혼인했어?”

“뭐? 세화가 혼인을 해?”

‘아니 그게 아니라.’

<눈앞에. 나. 세화.>

“나씨와 혼인한 세화가 내일 이 밀실 안에 나타나 우리를 꺼내 갈 거라 이 말이냐?”

“나씨가 누구지? 저택을 출입하던 놈들 중에 나씨가 있었나?”

“아. 그 세화에게 전해 달라며 종종 꽃을 놓고 가던 그놈 아니야?”

“아냐. 그 새끼는 사씨잖아. 가문이 없는 놈 중에서 찾아야 하니. 아, 그 눈매가 매섭던 그놈인가? 방계 원로들이 방문할 때 매번 소식을 가져오던.”

“직접 물어보면 알겠지. 아가야, 세화가 혼인했다는 나씨가 눈이 이렇게 찢어진 새끼가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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