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피는 환족에게 그릇을 넓히는 의식이나 마찬가지였다.
탈피하지 않아도 영력은 사용할 수 있으나, 탈피 후에 사용할 수 있는 영력의 크기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평범한 환족이라면 언젠가는 모두 자연스럽게 탈피가 이루어질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몸 뺏기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혹, 탈피하지 못한 몸을 차지하게 된 경우.
바꿔 넣은 혼과 정신, 영력이 빼앗은 몸에 정상적으로 안착한 후에도 계속 탈피를 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자신이 빼앗은 아들의 이 몸 역시도 아직 탈피하지 못한 채였다.
정신을 잃게 해 두었으니 언젠가 탈피를 마치면 그때 사용하려고 했건만.
‘……그년 때문에. 그년 때문에!’
신영이 이를 사리물었다.
이게 다 명윤의 여식이 그 이상한 힘으로 제 몸을 지져 놓아 생긴 일이 아니겠는가.
오부인의 경우처럼, 혼이 몸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가능성만 생기지 않았어도 이리 숨 가쁘게 몸을 바꿀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바꾸고 남은 영혼은 진작에 소멸시켜 버려야 안전하건만 그것조차 하지 못하고.’
신영의 위를 계승해야 하니, 자신에겐 바꿔 탈 다른 몸도 마땅치 않았다.
하여 탈피를 위해 필요한 아들의 혼을 죽어 가던 제 몸뚱이에 넣어 놓아야만 했다.
비몽사몽인 채 간신히 생명만을 유지시키다가, 이 몸이 계속 탈피하지 못한다면 사용해보려 한것인데 그 혼을 그대로 도둑맞았으니.
‘아니다. 반드시 찾을 수 있어. 반드시 찾아야 하고!’
미간을 일그러뜨린 그가 피가 나올 정도로 세차게 주먹을 움켜쥘 때였다.
밖에서 누군가가 입실을 고하더니 문을 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신영. 백가주와 명윤 원로의 여식 주세화가 저택에 당도했습니다.”
“뭐야?”
신영이 황급히 창가로 달려갔다.
상층에 위치한 그의 방에서, 저 멀리 저택의 정문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어렴풋이 누군가가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왔구나.”
그가 희열에 가득 찬 채 속삭였다.
‘그래, 아들의 혼 따위 찾지 못한다 해도 저년을 먹으면…….’
저 정도 영력이라면 강제 탈피를 이뤄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소가주의 몸을 한 신영의 눈빛이 탐욕으로 사납게 번뜩였다.
그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인영을 보며 갈증이 난 듯 마른 입술을 축일 때였다.
피처럼 붉은 장옷을 걸친 여자가 일순 자리에서 멈춰 섰다.
“……!”
이어 신영과 세화의 시선이 정확히 맞닿았다.
쿵, 쿠웅.
그가 있던 창문틀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엄청난 힘의 기세가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영의 뒤로 서 있던 이들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이내 주저앉았다.
아, 이 기세라니!
쨍그랑 소리와 함께 신영이 있던 창문의 틀이 일그러져 산산이 조각났다.
세화가 서 있는 바닥 또한 쩌적,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 어서 오거라. 네가 시작이었지.’
긴 생을 살아오며 처음으로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던 영력의 보고가 이곳에 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주가에 시종들과 가신들이 혼비백산했으나, 세화와 신영은 그저 서로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릴 뿐이었다.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살기를 몸에 두르고서.
* * *
그녀의 영력의 파동을 아무 징조도 없이 겪고 난 이후여서일까.
시종들은 더없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세화와 백기하, 최장명에게서 고삐를 넘겨받았다.
또 다른 시종이 방으로 안내하겠다 나서는 사이 저택의 입구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세화야, 네가 왔구나.”
말하는 이의 귀 끝에서 새까만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늘 부드럽게 휘어져 있는 눈 또한 그녀를 향해 다정한 호의를 숨기지 않았다.
하나 그 미소 안쪽으로, 세화는 사갈 같이 빛나는 정제된 살의를 읽어 낼 수 있었다.
주경현의 얼굴을 한 그가 웃으며 그들을 맞아들였다.
신영이었다.
“일전에 뵈었을 때보다 안색이 훨씬 좋으시네요, 소가주님. 그간 잘 지내셨나 봐요.”
“내가 힘들 것이 뭐 있겠느냐. 그저 기다릴 뿐이었는 것을.”
그들은 조금 전 충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신영이 조금 울적하게 덧붙였다.
“신영의 등극식은 환족 모두의 의식일진데, 이렇듯 너 외엔 다들 모른 척할 줄이야.”
“오랜 시간 이어 온 전쟁의 후처리로 정신없는 때이니까요. 저와 백가주가 왔으니 그 정도는 양해해 주세요. 그래야 자애로우신 우리의 신영이시죠.”
세화와 신영의 시선이 다시 부딪쳤다.
둥글게 휜 세화의 눈가를 본 신영이 물었다.
“이해하지 못하면 신영이 아니다 그건가?”
웃는 낯과 달리 조금 서늘한 목소리였다.
“좋은 날 심기가 상하실 화제는 거르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드린 말씀이에요.”
“그래. 내가 오랜 시간 챙겨 온 너조차 이리 등극식 날짜를 딱 맞춰 도착할 정도이니. 다른 가주들에게는 뭘 기대하겠느냐. ”
“너무 급하게 날짜를 잡으신 건 생각지 않으시고 이리 비꼬기만 하시니 가슴이 아파 등극식에 참석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하. 여전히, 한마디도 지지 않는구나. 말에 베일 듯하니 이만해야겠다. 아 백가주. 백가주께도 인사가 늦었군.”
신영이 계속 세화의 뒤에 서 있던 백기하를 그제야 발견한 듯 아는 체를 했다.
백기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채 말했다.
“긴 여로에 피로가 쌓인 터라 들어가 쉬었으면 합니다만.”
“아, 그래. 내가 그대들을 너무 오래 세워 두고 있는가 보군. 들어가 보게. 아참.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 할지라도 몸수색과 짐수색은 한번 진행하여야 하네. 이만저만 중요한 예식이 아니기 때문에. 이해해줄거라 믿네.”
“그럼요.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하십시오.”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신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곁에 시립해 있던 시종들이 백기하와 세화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앞서가는 세화와 백기하의 뒤로 최장명이 세 마리의 말에서 내린 짐을 든 채 빠르게 뒤따랐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신영이 턱짓했다.
멀찍이 서 있던 일보관이 급히 다가왔다.
“지시했던 대로 시작하라.”
“예, 신영.”
대답을 마친 일보관이 서둘러 어딘가로 떠나갔다.
신영 역시도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운 채 거대한 저택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 * *
셋의 짐을 꼼꼼히 확인한 후 침소로 안내하던 시종은 계단을 올라 복도가 갈라지는 곳에서 다른 시종을 불러들였다.
“백가주께서는 이쪽으로 오시지요.”
“우리는 혼인한 상태로 둘이 같은 방을 사용할 것이니 구분할 필요가 없다.”
“……예?”
“다른 방은 필요 없으니 내게 준비된 방으로 곧장 안내하라 이 말이다.”
“하, 하지만…….”
“뭐 문제 있나?”
“저, 정녕 두 분께서 혼인하신 겁니까?”
삼보관에게서 반드시 둘을 멀찍이 분리된 방에 묵게 하라는 명을 받았던 시종이 희게 질린 채 되물었다.
“그런 큰일에 거짓을 말하진 않으니 쓸데없는 말은 거두고 빨리 앞장이나 서거라.”
“…….”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눈앞의 아가씨는 장신구뿐만 아니라 머리 모양 역시 그 전과 다르지 않았다.
장신구야 먼 길을 온 참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혼인한 여성들이 모두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리는 것을 떠올린다면 거짓말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으나.
“주가의 시종들은 모두 이런가? 도무지 한 번에 말을 들어 먹는 법이 없군.”
제 말을 잘라낸 백기하의 시선이 날카로워지자 바짝 얼어붙은 시종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 * *
시종이 안내한 방은 식을 준비하는 소란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한적한 별관이었다.
“이곳입니다.”
너른 방 안은 주가의 위상이 변함없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두 방향의 커다란 창 너머로 보이는 가을의 정원이 아름다웠다.
전체적으로 운치 있는 경관을 가진 좋은 방이었다.
하나 백기하는 이 방이 침입자가 들기 쉽고, 복잡한 정원의 지리를 알지 못하는 한 빠져나가기 어려운 장소라는 것을 단번에 읽어 냈다.
커다란 방에 딸린 곁방에 최장명이 짐을 내려놓으러 들어간 사이, 그들을 방까지 안내한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곧 두 분의 시중을 맡을 사용인들이 당도할 것이니 그전에 하명하실 것이 있다면-.”
“있고말고.”
그 말과 동시에 백기하가 곁에 선 세화의 입술을 제 것으로 덮쳤다.
“……!”
시종이 숨을 삼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는 세화의 가는 허리를 힘주어 안고 제게로 바짝 끌어당길 뿐이었다.
세화 역시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의 단단한 목을 끌어안았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그가 전하는 온기에 도취된 듯 눈을 감았다.
약간의 시간 후 입술을 떼어 낸 백기하가 시종을 향해 차갑게 덧붙였다.
“우린 그만 누워 쉬어야겠으니 너는 이대로 나가 부를 때까지는 전각에 접근도 하지 말아라. 너뿐만이 아니다. 어떤 사용인이든 감히 내 허락이 없이 이곳에 접근하는 기색이 느껴진다면.”
그의 몸 위로 세찬 영력의 파동이 바람처럼 폭사되어 시종에게로 날아갔다.
“감히 일각이라도 더 숨을 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버려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
사색이 된 시종이 허겁지겁 그들의 앞에 고두했다.
몇 번이고 명심하겠다는 대답을 반복하더니 빠르게 그곳에서 사라졌다.
이 시종이 실제로 백기하의 명령에 따라 떠나간 것이건 신영에게 황급히 보고하기 위해 사라진 것이건 간에.
별관의 잡일을 위해 배치되었던 이들마저 모두 사라지고 나자 그렇지 않아도 조용한 저택이 더욱 고요해졌다.
그들이 모두 별관을 빠져나간 걸 확인하자마자 백기하는 내부에 두텁게 결계를 둘렀다.
숨소리 하나 새어 나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게 결계를 선 것을 확인하고 겉옷을 벗은 다음, 밤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변용했다.
거대한 신수가 두려울 정도로 푸른 눈을 빛내며 방안에 나타났다.
“그럼 말했던 대로 결계의 유지를 부탁해.”
“맡겨 주십시오.”
어느새 곁방에서 나온 최장명이 백기하가 미리 내준 신수의 영단을 쥔 채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세화 역시 겉옷을 벗은 후 몸을 변용시켰다.
그들이 일을 벌이더라도 막 도착한 지금 벌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할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종류별로 갈라 낸 그녀의 여러 가지 힘 중 새하얀 힘이 소용돌이 형태로 방에서 요동쳤다.
바람을 피해 최장명이 눈을 가리던 아주 짧은 시간 후.
그곳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대신 작은 백호 한 마리가 최장명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작디작은 백호는 잠시 뭔가를 망설이다 장명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동그란 볼과 얼굴처럼 귀여운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끼뀨, 휴.”
“…….”
“뀨, 뀨.”
평소라면 이런 소리를 낼 바에야 입을 다물었을 테지만, 염려되는 마음에 그가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당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최장명은 웃지도 않은 채 다시금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주십시오.”
그의 대답을 들은 작은 백호 역시 최장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몸을 돌려 저를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백호의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갔다.
몸을 낮춰 준 큰 백호의 목덜미 위로 기어 올라가 자리를 잡자 최장명은 세화가 미리 맡겨 둔 작은 영단 하나를 꺼내어 백호의 앞에 놓아 주었다.
“뀨.”
“맡겨 주신 명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행하고 있겠습니다. 보중하시고 잘 다녀오십시오.”
인사와 동시에 커다란 백호의 몸이 사라졌다.
어느새 결계를 빠져나간 짐승이 기척을 죽인 채 너른 복도를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