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8화 (168/254)

* * *

조도를 낮춘 회의실 안에서 무언가를 듣던 중년의 사내가 몸에 힘이 풀린 듯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

말을 잇지 못하고 정년을 바라보던 사내가 제 앞에 선 이에게 물었다.

“그럼, ……그러면 내, 내 딸은. 내 딸 수연이는 죽은 겁니까?”

“……아마도.”

“…….”

“미안하네.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주명윤의 말에도 주자윤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멍하니 넋을 놓았다.

‘수연이가 죽었다고? 그 아이가?’

전장에 있느라 내도록 제대로 돌보아주지도 못한 제 여식은 얼마 전 탈피를 마친 아직 어린아이일 뿐인데.

그런 아이를 어쨌다고?

주자윤의 기억이 제 딸과 이별하던 순간으로 날아갔다.

그때도 무언가 이상하긴 했었다.

갑자기 뜬금없는 지역으로 발령이 난 것도 모자라, 갑자기 아이를 신영의 저택에서 맡아 주겠다니.

임무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인가 여겨지면서도,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이미 탈피를 끝낸 아이를 굳이 신영의 저택에서 맡겠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게, 제가 이곳까지 밀려난 이유입니까?”

“그렇겠지. 지금까진 몸을 빼앗긴 자의 가족들을 다 주가 본영에서 밀어냈으니 말이야.”

“…….”

“내 호위인 사단윤이 자네 같은 이들을 모두 찾아냈지. 지금은 내 말이 믿기지 않아도 그들과 만나 함께 대화를 나누어 보면 내 말이 정말이라는 것을 알 것일세.”

“……저는. 저는 그래도-.”

“정신 차리게!”

“!”

“쉽게 믿기지 않는 마음도, 믿고 싶지 않은 마음도 알겠지만 그렇다고 이리 넋을 놓고 있을 참인가? 아비가 되어서 딸의 주검을 수습해 줄 마음은 있어야지!”

주명윤의 노성에 자윤 원로가 이를 악물었다.

커다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일단 말씀하신 걸 믿고 대화를 나눠 보겠습니다. 하지만 형님이야말로.”

그가 붉어진 눈으로 주명윤을 응시하며 경고했다.

“형님이야말로 지금 하신 말씀이 저를 이용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내신 거라면, 그땐 제가 무슨 짓을 하든 감내하셔야 할 겁니다.”

주명윤이 한결 풀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리하겠네.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이라면 자네가 무얼 요구하여도 기꺼이 감내할 것이야.”

* * *

대화가 끝나고 회의실을 빠져나오는 주명윤을, 회의실 바깥 복도에서 내내 기다리고 있던 사단윤이 부축했다.

“괜찮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자식을 잃은 자윤 저이만 하겠느냐.”

“…….”

“저런 이가 총 몇이라 하였지?”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예순넷입니다.”

“하하…….”

‘미쳤구나, 미쳤어. 그런 괴물을 가주라며 믿고 따르고 있었다니.’

세화와 백기하에게 지금껏 실종된 아이들을 신영이 잡아먹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믿어지지 않았었는데.

‘다른 가문뿐 아니라 제 혈족들도 그리 잡아먹고 있었다니. 이번 대에만 벌써 예순넷이라면, 지금껏 얼마나 많은 이들을 희생시켰을지 감도 오지 않는구나.’

주명윤은 일찍이 주가를 떠나며 사단윤을 보내 이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발령으로 영지에서 멀어진 이들을 조사하게끔 했다.

그때만 해도 이런 뒷사정은 모르는 채였다.

그들이 자신과 비슷한 방식으로 신영에게서 버려진 것이겠다는 생각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조사하고 혹 그들 역시 제가 그랬던 것처럼 목숨을 위협받은 적은 없는지 알아보려는 것이었는데.

“자윤이 이곳을 정리하는 대로 떠나자. 다음은 어디냐.”

“이곳에서 동북쪽으로 십 리 정도 들어간 변경 초소입니다. 예전 강변 원로였던 주만의 님과 주종영 님께서 그곳에 계십니다.”

“……명단에 있는 이들을 모두 만나려면 시간이 없겠구나. 우리도 서두르자.”

“네.”

* * *

최장명이 홀로 앉아 있을 세화를 염려해 빠르게 나무를 주워 돌아왔을 땐 아무도 그곳에 없었다.

당황한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주변엔 풀벌레 소리만 가득할 뿐 세화의 흔적이 없었다.

최장명은 백기하에게 이미 주의사항을 들은 뒤였다.

주가의 영지 안에서 펼쳐질 결계 안에선 절대 영력을 끌어 올려서는 안 된다고.

만약 그렇게 한다면 거대한 결계가 침입자를 알아차리고 압박을 가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 섣불리 힘을 쓸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혹 백가주와 따로 나누실 말씀이 있어 자리를 비우시기라도 한 건가.’

그리 생각하니 찾으러 나가기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그는 근처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세화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리던 이는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야영 자리에 모습을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돌아와 자리를 정리하려는 그녀를 발견하고, 그 밤 내내 세화를 기다린 최장명이 조심히 다가갔다.

“짐은 제가 정리하고 들겠으니 조금 쉬고 계십시오.”

“이 정도야 나도 할 수 있으니 괜찮아.”

“…….”

“왜. 할 말 있어?”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데. 무슨 일이야. 아, 너무 휴식 없이 달려와서 그런가. 혹시 피곤해?”

“……그저. 절 두고 가신 줄 알고.”

“응?”

“그것이 아니었으니 괜찮습니다.”

그제야 세화는 제가 나무를 주우러 갔던 최장명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이동했다가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젯밤 만났던 불청객들과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기에 새벽에서야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백기하의 결계 속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안전을 알고 있으니 딱히 말을 전해야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세화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결계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 결계가 펼쳐졌을 때는 아무도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다. 밤사이처럼 결계가 유지되고 있다면 서로 그 안 어딘가에 있는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

“왜 그리 봐, 또 할 말이 있어?”

가만히 세화를 보던 최장명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까진 우울해 보이는 듯하다가 갑자기 저렇게 기분이 좋아지다니. 혹 결계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게 좋았던 건가?

“실없긴.”

“짐은 제가 빠르게 정리해 둘 테니 조금 앉아 계십시오.”

“아니야. 내가…….”

반복된 권유에 세화가 손을 내저으려 했으나 최장명이 한발 빨랐다.

밤새 피워 두었던 불을 끄고 흔적을 지웠다.

야영을 위해 펼쳐 두었던 천 역시 빠르게 걷어서는 거침없이 각을 맞춰 접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때 그들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힘이 서서히 흐려져 갔다.

‘결계를 걷어 내는구나. 대화가 끝난 건가.’

생각과 동시에 그녀의 뒤에서 사박사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백기하가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잘 끝났-.”

“무슨 대화를 나눈 거야?”

“응? 뭐가요?”

백기하가 빠르게 짐을 정리 중인 최장명을 향해 턱짓했다.

“아아. 결계에 대해 잘 모르더라고요. 내가 미리 말을 안 한 탓에 밤새 걱정하며 기다린 것 같아 결계에 대해 설명해 줬어요.”

“핑계가 좋네.”

백기하의 입매가 비뚜름해졌다.

“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

조금 차가운 시선으로 최장명을 본 백기하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화 마무리는 괜찮았어요?”

“응. 서로 아까 말한 대로 행동하기로 했으니 곧 다시 보겠지.”

“그럼 우리도 가죠.”

이대로 대로를 따라 달리면 오후쯤엔 신영의 저택에 도착할 터였다.

세화가 세 자매가 싸 준 짐 하나를 풀어 그 안에서 붉은 겉옷을 꺼내 들었다.

일부러 준비한, 더없이 화려한 황금빛 자수가 붉은 비단 위에서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것을 걸친 후 세화가 말에 올랐다.

묶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움직임에 허공에서 출렁이다 가라앉았다.

정면을 응시하는 적자줏빛 두 눈은 별이 가득한 하늘을 잘라 붙인 듯 반짝였고 그 시선 안엔 두려움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두 남자의 시선이 멍하니 뒤따랐다.

해가 뜨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고 주변은 여즉 어두웠으나, 그녀의 모습만은 이 어둠 속에서도 무엇보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신영이 있는 저택의 방향을 가만히 응시하던 세화는 아직까지 말에 타지 않은 두 남자에 대한 것을 그제야 깨닫고 재촉했다.

“안 타요?”

“……아. 타야지.”

“……타겠습니다.”

어쩐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거나 마른침을 삼키는 두 남자가 말에 오른 후, 세 마리의 전마가 다시 경쾌하게 대로를 따라 달렸다.

그사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어두웠던 밤이 물러가며 부유스름하던 새벽 여명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이내 따스한 태양 빛이 빠르게 대로를 지나는 그들의 위로 내려앉았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깎아지른 절벽 사이를 유려하게 달리던 세화가 절벽 아래로 보인 흐릿한 불빛들에 고삐를 잡아 멈췄다.

바람에 그녀의 붉은 옷자락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가장 반짝이는 빛이 닿는 곳에, 세화가 서 있었다.

바람은 벌써 겨울을 알리듯 차가웠으나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녀의 눈빛보다는 매섭지 못했다.

한참을 제 시선이 닿는 곳을 주시하던 그녀가 다시 말머리를 돌렸을 땐, 예식을 위해 세워 둔 수많은 깃발 사이로 거대한 팔각지붕이 위엄 있게 드러나 있었다.

주가였다.

* * *

쾅!

“아직도 찾지 못했다고?”

“송, 송구합니다.”

신영의 삼보관이 곧 신영으로 등극하는 소가주의 앞에서 몸을 떨었다.

“시체에 가까운 몸을 데리고 그놈이 가 봐야 어디까지 달아났다고 그걸 못 찾는 것이냐!”

“하지만 수색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무, 무사들을 동원해 찾으면 금방 찾을 것입니다.”

“그걸 내가 몰라 비밀리에 찾으라고 했겠느냐?!”

소가주의 노성에 삼보관이 눈을 질끈 감았다.

“찾는 대로 천령 그놈은 그 자리에서 사지를 분리하고 살가죽을 벗겨 버리거라! 그리고 너도!”

뱀처럼 예리하고 섬뜩한 소가주의 시선이 칼날처럼 날아오자 삼보관이 힉, 숨을 삼켰다.

“너도 마찬가지다. 내일까지 그놈을 찾지 못하면 네 몸뚱이 역시 천령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알겠느냐!”

“예, 예!”

사색이 된 삼보관이 방에서 빠져나간 이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신영이 탁자를 또 한 번 내리쳤다.

초조한 시선이 허공을 배회했다.

“젠장. 진작에 어떻게 해서든 이 몸을 탈피시켜 두었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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