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7화 (167/254)

“약이 필요합니다. 가지고 계신 것이 있으시다면 부디 조금만 나누어 주십시오.”

그가 필사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세화 님.”

‘……지금 이게 무슨 말이지?’

세화가 잠시 눈을 깜빡거리며 천령을 응시했다.

소가주 주경현이라니?

원래 소가주였던 주경현은 이미 제 아버지에게 몸을 빼앗기고 죽었는데?

‘그렇다면 이건 혹시, 아들의 몸을 빼앗은 그 신영이 이놈을 이용하여 계략을 꾸미고 있는 건가?’

그녀를 죽이고 영력을 삼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더니. 혹시 초청장의 용도는 이것을 위해서였던가.

세화의 시선이 단번에 사나워졌다. 목소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것들을 당장이라도 얼려 버릴 듯한 매섭고 써늘한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지금 여긴 백가주의 결계 안이다. 넌 대체 여기 어떻게 들어온 것이냐.”

“따, 따라왔습니다. 세화 님을 발견하고 따라오다가 결계가 펼쳐지길래 그 안으로 소가주님을 모시고 뛰어들었습니다.”

“…….”

“이, 상처들이 그때 얻은 것입니다. 저도 이럴진대 그분은 더 크게 영향을 받으셨을 겁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세화가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만 있자, 천령이 이마를 땅에 댄 모습으로 고두하며 절실히 청했다.

“소가주님의 언사로 세화 님께서 상처를 받으셨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두 분께서 서로를 위하며 친하게 지내신 날들이 더 길지 않으셨습니까. 가지고 계신 약 중 부디 한두 병만 소가주님을 위해 나누어 주십시오.”

“그가 어디 있는데?”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모셔 두었습니다.”

“그럼 안내해 봐. 일단 상태를 확인해 볼 테니.”

“저, 정말이십니까! 정말 도와주시는 겁니까?”

“도와준다고는 안 했는데. 확인해야겠다고 했지.”

세화의 쌀쌀맞은 대답에도 불구하고 천령은 그녀가 제 주인을 살려 주겠다 확답이라도 한 양 화색이었다.

“빠르게 모시겠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하지만 그는 황급히 몸을 돌리다 말고 다시금 잠시 망설였다.

이내 그가 마른침을 삼키고 덧붙였다.

“한 가지,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경현 님께서는 지금…… 지금 그분의 몸이 아니신데…….”

“뭐?”

“그, 그분의 몸은 아니시지만 그래도 경현 님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마음이 조급해진 천령이 수풀 속에서 조용히 돌아서며 세화를 불렀다.

“이, 이쪽입니다. 이쪽에 계십니다.”

“…….”

날 선 표정의 그녀가 입꼬리를 비죽이 끌어 올리며 천령의 뒤를 따랐다.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걸까.

아직 저택에 도착하지 않아 방심했을 거라 생각한 건가? 그래서 이곳에서 일을 치려 한 것이고?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얼마나 그릇된 판단이었는지를 톡톡히 알려 줄 것이다.

다른 이의 결계 안에서 저리 자연스레 움직이기 위해서는 제 영력을 근원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인간과 비슷할 정도로 꺼내 놓아야 했을 터였다.

그리하여 그녀나 백기하의 기감에까지 잡히지 않은 것이고.

같은 의미에서 무사들이 몇이나 더 숨어 있다 한들 비슷하게 영력을 깎아 둔 상태일 테니.

‘그렇다면 수백이 덤빈다 한들 두려울 것이 없지.’

그리 생각한 그녀가 차고 예리한 영력을 끌어올려 온몸에 둘렀다.

날카롭게 식은 시선을 하고서 천령의 뒤를 한 발 한 발 뒤따랐다.

조금 후, 어디선가 옅게 부패한 냄새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냄새가 제법 진하다고 느꼈을 무렵 그가 어느 수풀 사이를 걷어 냈다.

“이, 이쪽입니다, 세화 님. 여기 계십니다.”

“……!”

차라리 잘되었다고.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이든 저들을 결코 살려 두지 않을 거라고.

반병신으로 만들어 내 오라비들과 교환할 인질로 사용할 거라고.

그리 이를 갈며 다가온 세화는 제 앞에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어 잠시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분명 선대 신영의 몸이었다.

“……이게.”

“놀라지 마십시오. 몸이, 몸은 다르지만, 분명히 그분이십니다. 주경현 님이십니다.”

“…….”

선대 신영은 지금 주경현의 몸을 차지했을 텐데. 그렇게 몸 바꾸기를 하고 나면 이전의 몸은 사망하는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죽어 넘어갔어야 할 이 몸에 누가 들어 있다고? 주경현?

절로 코를 가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혈과 부패한 살점의 냄새가 이 노쇠한 노인의 몸에서 나고 있었다.

세화가 오색의 불로 지져 놨던 곳들이 치료되지 않아 그대로 살이 뭉그러지는 중인 듯했다.

“정말 주가의 소가주가 맞으면 왜 그가 이런 상태로 이곳에 있는 것이지?”

“……그건.”

“게다가 네가 모르나 본데, 나는 이미 소가주를 만났다. 그가 직접 등극식의 초대장을 주었기에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야.”

“……믿어지지 않으실 것을 압니다. 하지만 세화 님께서 만나신 그분은 경현 님이 아닙니다. 이분이 경현 님이십니다. 정말입니다.”

“그렇다면 사정 얘기는 해야지. 다짜고짜 말도 안 되는 이를 데려와 내 친분에 기대 치료를 종용하는 것인 줄 누가 알겠어?”

세화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하나 천령은 저조차도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들을 세화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가지고 계신 약만 나눠 주신다면, 그래서 이분의 상태를 조금이나마 호전시켜 주신다면 어떤 것을 물으셔도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

“정말입니다. 전혀 감추지 않겠습니다. 뭐든 아뢰겠습니다.”

마른침을 삼켜 낸 천령이 잠시 망설였다.

제가 이 말을 덧붙인다면 세화의 분노를 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떨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그렇게 이분을 살려만 주신다면 세화 님의 가족이신 가한, 가윤 두 무장님에 대한 정보도 아뢰겠습니다.”

“!”

* * *

주경현에게도 좋은 마음이 없었기에 그가 이곳에서 죽든 살든 그녀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으나.

‘……오라버니들이 어떻게 계신지는 반드시 들어야만 해. 지금껏 몸을 바꾼 이들은 모두 죽은 줄 알았는데, 만약 저런 식으로 살아 있는 거라면 그것에 대해서도.’

“내가 치료를 돕는다면 뭐든 얘기하겠다는 네 말이 진짜여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게다가 지금 이곳은 백가의 결계 안입니다. 영력도 없는 제가 어디로 달아나겠습니까.”

다시 한번 땅에 머리를 찧을 듯 고두한 천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 제발 제 주인을 이대로 죽게 하시지 말아 주십시오.”

“…….”

그 모습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기다려라.”

망설이던 세화가 영력을 끌어 올렸다.

그 상태로 힘을 결계에 부딪쳤다.

두 번까지도 필요 없었다.

이상을 감지한 백기하가 단번에 그녀가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뭐지? ……이자는 누구야? 어떻게 결계 안에 있는 거야?”

천령은 여전히 그들의 앞에 고두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기에 상황의 설명은 그녀가 했다.

“……소가주라고?”

백기하의 시선이 만신창이의 상태로 악취를 풍기며 누워 있는 노인에게로 향했다.

그들이 기억하는 것보다 노인은 훨씬 말라 있었다.

안색 역시도 새까맣게 가라앉은 데다가 이곳저곳에 퍼진 일그러진 상처들 때문에 이전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신영의 몸인 것은 분명해요.”

오래도록 주가 혈족들을 틀어쥐었던 저 신영의 모습을 어떻게 알아보지 못할 수 있을까.

대역이 아닌 신영의 몸을 사용한 것은 확실했다.

다만 저 안에 있는 것이 정말 주경현인가 하는 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오라버니들에 대한 정보 때문에도 그렇지만, 저 안에 어떻게 누가 들어갔는지 알기 위해서라도 잠시 깨워 얘기를 들어 볼 생각이에요.”

“제 아들의 목숨을 벌레보다 못하게 취급하던 이가 혹 또 함정을 판 것일 수도 있어.”

“그래도 당신의 결계도 있고. 저 몸을 다 낫도록 치료하지도 않을 거니까요.”

“알았어. 하지만 조심해.”

고개를 끄덕인 세화가 신영에게 접근했다.

파리한 안색을 한 채 누워 있는 신영에게선 죽음의 냄새가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노인에게 손을 뻗자 천령이 기겁했다.

“아니, 약을. 경현 님께선 지금 정말 위중하십니다. 그러니 일단 약을 먼저-.”

파앗!

세화의 손에서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자 시끄럽게 만류하던 천령의 입이 닫혔다.

빛은 노인의 몸 위로 폭포처럼 떨어져 내려 둥글게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주변에 진하게 섞여 든 악취가 조금 가라앉는가 싶더니 천령의 눈앞에서 노인의 상처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

이미 잔뜩 썩어들어 고름이 가득하던 검은 상처의 색이 흐려지고 농이 줄어들었다.

벌레가 들어차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벌어져 있던 살의 균열이 조금씩 좁혀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노인의 안색이 대단히 달라졌다.

곧 죽을 이처럼 새까맣던 안색이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시체처럼 창백하던 입술에도 핏기가 돌았다.

“……으.”

노인이 어느 순간 얼굴을 찌푸리며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그것을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며 세화가 힘을 거두어들였다.

천령이 곧장 노인에게로 달려들 듯 다가갔다.

“경, 경현 님! 소가주님!”

“으……천, 천령, 이냐.”

“네, 접니다. 접니다. 경현 님.”

“…여기, 가. 어디냐. 영, 영지를 빠져, 빠져나온 것이야?”

“아닙니다. 아직 주가 영지 안입니다.”

“아, 아직, 주가, 인 것이냐.”

“경현 님의 상태가 너무 위중하여 더 이동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어떠십니까. 이제 조금 나아지신 겁니까?”

그제야 제 상태를 살펴본 주경현이 정신을 잃기 전보다 훨씬 더 숨쉬기가 편해진 제 상태를 인지했다.

너무 아파 차라리 도려냈으면 하던 상처의 통증도 많이 줄어들어 있었고, 뭐 하나 보이는 것 없던 시야도 조금 밝아졌다.

“그, 래.”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이리, 좋, 좋은 약이, 있었, 어? 약, 을 구, 하기 위, 해 무리를, 한 건 아니고?”

“제가 가지고 있던 약이 아닙니다. 세화 님께서 도와주신 겁니다.”

“……뭐?”

“세화 님을 여기서 뵙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

천령의 말을 다 듣지도 않은 노인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움직였다.

그래 보아야 각도를 조금 트는 수준이었으나 곁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누군가를 발견하기엔 충분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린 주경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 세, 화야.”

“……당신 정말 주경현이야?”

차가운 목소리가 그리 묻자 노인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믿지 않을까 봐. 더없이 힘겨울 텐데도 여러 번, 계속해서.

힘이 없는 몸으로 그리 간절히 움직이던 그가 흐느꼈다.

“나, 나야. 세, 세화야. 그, 그래. 내, 내가 주경, 현이다.”

“…….”

“세, 세화야. 나, 좀 도와, 다오. 내가, 주, 주경현이야. 나, 나야. 내, 내 몸을, 찾, 아야. 내 몸을 찾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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