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세화는 제 곁에서 걷는 남자를 흘끔흘끔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그가 세화를 향해 물었다.
“왜? 내게 할 말이 있어?”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당신 많이 화가 많이 났었구나 해서.”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있겠어.”
대답하는 목소리는 부드럽기만 했다.
숨을 삼킬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 또한 그저 따뜻할 뿐이라 말의 내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자는 교룡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일을 벌였어. 육문과 혈족들의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았지. 교룡이 한 짓거리들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말이야.”
위로 살짝 뻗은 그의 눈꼬리가 날카로워졌다.
목소리에서도 온기가 반 정도 사라졌다.
“제 이득만을 위해 나머지 다섯 가문의 혈족들을 단번에 사지로 밀어 넣으려 한 이를 어찌 용서할 수 있을까. 즉결 처분하여 목을 자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참을성을 크게 발휘한 것을.”
“…….”
“왜?”
“당신, 손.”
세화가 오른손을 잡아 오자 백기하가 시선을 내렸다.
손바닥에 피가 설핏 배어나 있었다.
세화가 표정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자꾸 왜 손을 못살게 굴어요.”
“버릇, 인가 봐.”
“…속상하게.”
진심으로 속상해하는 모습에 백기하가 시선을 굴렸다.
“괜찮아. 어릴 때부터 검을 잡아 그리 고운 손은 아닌-.”
“…….”
“앞으론 안 할게.”
“잘 생각했어요.”
세화가 당연하다는 말투로 백기하의 손을 치료했다.
“당신은 내 거니까. 이 손도 내 거야.”
세화의 귀여운 말에 백기하의 눈이 휘었다.
손을 맞잡고 거처로 가는 사이, 세화가 백가의 처소 주변을 둘러보았다.
짧은 시간 내에서도 주가와의 전쟁을 위한 대비를 하는 이들이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난……전쟁을 본 적은 없으니까요. 말은 자신만만하게 해 두었는데, 참혹한 광경을 보고 뒷걸음질 치는 일이 생기면 어쩌죠?”
“그대가?”
엉뚱한 고민을 들은 백기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너무 자신을 모르는 말을 하니까 우습잖아.”
“내가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 있어? 나는 오히려 그대에게 너무 목숨을 걸지는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심정인데.”
그 말은 퍽 그의 진심이기도 해서, 작은 손을 잡은 그의 손끝이 설풋 차게 식었다.
그 변화에 담긴 불안감을 읽기라도 하듯 세화도 그의 커다란 손을 힘주어 맞잡으며 속삭였다.
“응. 나도 조심할게요. 당신도 조심하고. 그래서 우리 아무도 다치지 말고 꼭 건강하게 일을 마무리해요.”
백기하의 손에도 다시 힘이 들어갔다. 둘은 그대로 손을 맞잡은 채 백석저의 복도를 걸어나갔다.
* * *
혹, 젊고 새로운 신영의 등극이 주가 혈족들을 구심시키는 전환점이 되기라도 할까 봐.
혹, 세화에게 밀린 교룡과 아들의 몸을 빼앗은 신영이 무언가 다른 일을 꾸며 힘을 비축하기라도 할까 봐. 일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쪽의 준비도 부족하지만 결코 저쪽의 준비가 완벽하도록 두지 않기로 한 것이다.
가주들이 신중하게 무사들을 집결시켰다.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하며 계획을 짜는 동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 * *
“흐으- 크!”
거대한 침상 위에서 어떤 그림자가 제 가슴을 움켜쥔 채 몸을 비틀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도록 모든 문을 닫아 두었음에도 방 안의 공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너른 방 안을 채운 장식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편의를 위해 놓인 가구 하나하나가 더없이 귀중한 것들뿐이라 방의 주인이 가진 지위를 알려 주는 듯했다.
채 감지도 못하고 어둠을 응시하는 그림자의 두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커다란 손 위로 돋아난 푸른 핏줄들이 그가 느끼는 고통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맥동했다.
어느 순간엔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이를 악물고 있던 그림자가 한참 만에야 빳빳했던 몸에서 힘을 풀며 침상 위로 엎어졌다.
심장이 홀로 저 앞으로 달려나가듯 숨이 가빴다.
하지만 그것을 미처 가다듬을 시간이 없었다.
곧 두 번째 고통이 찾아올 터였으니까.
“흐…… 큭.”
굳어졌던 몸에서 채 긴장이 풀리기도 전에, 백기하가 다시 심장을 파낼 듯 제 옷 위를 부여잡으며 몸을 비틀었다.
아무에게도 이 고통의 원인을 말할 수 없는 그는, 결계로 방 안을 온통 감싸 놓고도 혹 제 신음 소리를 누군가 듣기라도 할까 봐.
그래서 그의 몸의 이상을 알아차리기라도 할까 봐, 핏발이 설 정도로 극렬한 고통 속에서도 제 소리를 대부분 삼켜 냈다.
밤은 길었고,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는 고통은 끝을 모르는 듯 밤보다 더 길었다.
“……세화.”
단단하게 악문 턱 근육 사이로 신음처럼 그 이름이 새어 나왔다.
“주, 세화.”
“그러다 당신이 아플 때면 밤새 그 옆에 앉아 당신을 간호하고. 아프지 말라고 손을 잡아 주고.”
그녀가 보고 싶었다.
온기 어린 손을 부여잡고 너무 아프다고. 내가 많이 힘들다고 토로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밤 내내 당신 대신 아팠으면 하겠죠. ……사랑하니까.”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간신히 들어 올려 방의 결계를 더욱 두껍게 둘러쳤다.
다른 모든 이들이 알아차리게 된다 하더라도 그녀만은 몰라야 했다.
하여 이 방 안의 모든 것이 다 부서져 나갈지언정 어떤 소리도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 상태를 만들어 놓고도 숨을 죽였다.
“흐으…….”
산 채로 사지가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자꾸 그녀가 보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늘 부드럽게 휘어지는 유려한 눈매를 떠올리며 오늘도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더 죽여야 해.
그녀가 죽일 수 없도록.
그리하여 신수의 격을 잃는 것은 나 혼자로 충분하니까.
“주세화.”
전쟁이 다시 한번 시작되면 더욱 많은 이를 죽여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영력을 가다듬어 놓아야 했다.
“주세화.”
다행히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이 고통을 조금은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그 밤 내내 그는 아무도 모르는 힘든 시간을 홀로 버텨 냈다.
* *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뒷일은 맡기겠습니다.”
세화와 나란히 선 백기하가 육문의 가주들과 주명윤, 백만용을 향해 말했다.
장가주와 강가주, 백만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연이어 한마디씩 대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가주. 약속한 신호를 발견하면 계획했던 대로 일을 바로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여가의 새 가주와 진가주 또한 저희가 잘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수장이야말로 혼자만의 몸이 아니십니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우리 소가주 역시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천가주님. 우리 가모님이야 당연히 가주께서 잘 챙기시겠지요.”
“남녀지간의 일은 실제로 혼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뭐 하나 장담할 수 없는 법일세. 또 아는가? 우리 천주백장 소가주가 다른 사내와 혼인하게 될-.”
으쓱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던 천가주는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는 백기하의 시선을 알아채고 머쓱하게 웃었다.
“그저 백가 재상이 하도 얄미워 해 본 말일세. 우리 천주백장 소가주야 당연히 자네와-.”
“계속 그리 부르실 거면 백세화라 부르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
천가주의 말을 냉랭하게 끊고 돌아선 백기하가 주명윤의 앞에 가서 섰다.
“미장 어른께서도 오늘 바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부인과 함께 출발해, 말씀드렸던 일들을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쉽지 않으실 것입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미리 제 호위를 보내 일을 진행시키는 중이었으니 저흰 괜찮을 것입니다. 오히려…… 백가주께 제 자식들을 부탁드려 봅니다.”
“염려 마십시오. 저희는 무탈하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가 주명윤과 말을 나누는 사이, 영채는 짐을 들고 오는 최장명을 보며 눈썹을 아래로 꺾었다.
“저도 아가씨를 수행하며 함께 다녀오고픈데.”
세화가 그런 영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그러면 좋지. 하지만 너흰 여기서 더 중요한 일을 해 줘야 하잖아.”
그녀의 시선이 슬쩍 일부인이 갇힌 상층 방으로 향했다.
“내가 약속한 날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영선과 영무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감시하고, 말씀하신 바를 모두 실행시킬 것입니다.”
“좋아.”
말 세 마리에 약간의 짐을 싣고 나자 단출한 준비가 완성됐다.
백기하와 세화, 최장명이 일제히 말 위에 올라탔다.
“잘 다녀오세요!”
“다녀오세요! 뒷일은 걱정하시지 마세요!”
자신만만한 얼굴로 배웅하는 이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이들이 일제히 말의 배를 찼다.
히히히힝!
커다란 전마들이 그들을 태운 채 놀랄 만한 속도로 달려 나갔다.
6장.
세화와 백기하, 최장명은 휴식조차 제대로 취하지 않은 채 주가를 향해 말을 달렸다.
하여 그들이 영지선의 초소에 도착하는 데는 사흘이 채 걸리지 않았다.
등극 선물도 없고, 호위도 없는 이상한 일행이었으나 초소병들에게 용건을 말하는 그들의 표정은 당당하기만 했다.
감히 신수인 백가주를 막을 수 있는 이가 없었고, 신영의 초대장까지 가지고 있던지라 주가 영지로는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이곳부터 신영의 저택까지는 고작 이틀이면 닿을 수 있었다.
“조금 쉬었다 가지.”
신영의 저택을 향해 달려가던 백기하가 어느 순간 그리 제안하며 멈춰 섰다.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잖아. 내일이면 신영의 저택에 닿을 테니 잠시 체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어.”
백기하는 교룡의 눈을 가리기 위해 주가의 영지 안으로 들어온 이후 줄곧 그들 주위로 결계를 편 채였다.
교룡이 어떤 힘을 어느 만큼이나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일단 주가 적룡의 능력이라 알려진 천리안을 의식한 조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흘 만에 길 곁에서 불을 피우고 야영을 준비했다.
불빛을 바라보는 세화의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아까 초소를 통과하며 본 주가 초소 안의 분위기가 제법 부산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게 오라버니들은 아닐까? 탈출하신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잡히지 않았던 건 아닐까?’
정말로 저택에 오라버니들이 있는 걸까. 혹 여전히 주가 영지 내를 숨어다니고 있었던 거라면 지금까지 무사하시긴 하신 걸까.
걱정한다 해도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애써 생각지 않으려 했지만, 그렇다고 불안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리 어두운 표정으로 가만히 모닥불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백기하는 따라오는 주가 병사가 있진 않은지 잠시 결계 밖으로 나가 살펴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최장명은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더 주워 오겠다며 멀어져 있던 참이었다.
톡.
톡.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는 그녀의 발치로 무언가가 튀듯이 날아왔다.
‘응? 뭐지?’
세화가 자연스레 그것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화 님.”
“……너는!”
“도와, 도와주십시오. 소가주님께서 위험하십니다.”
“뭐?”
“소가주님을 살려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십시오. 세화님.”
소가주 주경현의 호위였던 천령이 피투성이가 된 채 수풀 사이에 숨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