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5화 (165/254)

“…….”

“뭐?”

드디어 열리는 일부인의 입술 사이를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던 세화도.

눈을 날카롭게 치뜨던 백기하도.

“……그게 무슨.”

이 순간만큼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렸다.

일부인이라는 교룡의 부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어떻게 그 교룡을 아들이라 부를 수 있지?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면 어떻게 당신이 그의 부인이 될 수 있는 건데?”

“실제 부인이 아니야. 이 자리는 그 애가 나를 조롱하기 위해 만든 자리이니.”

일부인은 제가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기 위해 제법 고심했다.

그러다가 그들의 앞에서 길게 내려와 있던 제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꿈치가 시작되는 부분에 작고 둥근 문양 하나가 찍혀 있었다.

“이 문장에 걸린 제약이 있어. 내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그들이 알던 것과는 모양이 달랐으나 신영의 문장을 보고 난 이후이니 저것이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입을 잘못 놀리면 나는 영원히 죽을 수가 없게 돼.”

“하지만 입을 다물면 내게 쓸모가 없어지는데?”

세화가 탁자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그렇잖아. 그 핑계를 대면서 꺼내 놓고 싶지 않은 말들을 삼키는 것일지 내가 어찌 알지?”

“……적룡의 영단이라는 게 있어.”

“적룡의 영단?”

“신영의 검에 박혀 있는 작은 크기의 영단이야.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이게 그거구나 하고.”

세화의 기억이 자연적으로 제가 한 번 소유했다가 서월에게 강탈당한 그 영단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걸 가져다줘. 아니, 그걸 가져와서 네가 가져. 그것만 있으면 나 역시 어떤 제약도 상관치 않고 입을 열 수 있고, 너도…….”

일부인이 세화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며 덧붙였다.

“너도 교룡을 죽이기 위해선 반드시 그것이 필요해질 테니.”

* * *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요?”

“하지만 신영 쪽에 적룡의 영단이 계속 남아 있으면 우리가 곤란해지는 것도 사실이야. 신영은 사용할 수 없다 해도 교룡은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니.”

“……오라버니들을 구해 오며 적룡의 영단까지 찾아서 가지고 나오려면 일이 훨씬 어려워지겠어요.”

“…….”

잠시 고민하던 백기하가 말했다.

“그대 권속도 데려가지.”

“? 그는 왜요?”

“우리만 주가 영지로 잠입하려던 건 우리가 신수의 모습으로 변하면 영지의 결계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었잖아. 그런 의미에서 그대의 영력으로만 만들어진 최장명 역시 걸리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

다시 생각해도 그것이 좋겠다는 듯 백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짐승의 모습을 한 권속이 태어난 것도 이것을 대비해서일지도 모르지. 미리 그에게-.”

“가주.”

그때 무사 하나가 급히 그를 찾으며 접근했다.

“무슨 일이냐.”

“서동 지방으로 떠났던 여가주가 돌아왔습니다. 가주들께 드릴 말씀이 있다며 급히 모든 가주들을 불러 달라 요청하셨습니다.”

“이상하네요. 왜 가다 말고 왔죠?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텐데.”

알만하다는 기색이 스치며 백기하의 입매가 조금 비틀렸다.

“가다가 깨달았겠지. 만약 공격이 정말 시작된 거라면 주가에서 자신을 버린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두에게 버림받기 전에 육문 연합에 변명부터 늘어놓아야 한다는 걸 말이야.”

* * *

아니나 다를까. 백기하의 예상대로 여가주의 안색은 흙빛이 되어 있었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여가주가 무슨 말을 해도 다른 가주들은 그저 백기하를 기다리며 대답 없이 여가주를 빤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여가주는 소리 없이 뻐끔거리다 검게 변한 얼굴로 그들의 시선을 피해 땅을 내려다보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서동으로 가고 계셔야 할 분께서 다시 돌아오시고.”

백기하는 마치 전령에게서 아무것도 들은 적 없는 것처럼 염려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가주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펴졌다.

“수장.”

“급한 일이신 듯하니 어서 말씀해 보시죠.”

“하지만, 저- 아직 다 모이지 않은 듯한데…….”

여가주의 시선이 조금 떨렸다.

하필이면 지금 이곳에 없는 것이 저의 편을 들어줄 진가주였으니까.

“……저, 진가주는 어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갑자기 우리 모두를 불러 모으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진가주가 쓸데없는 말을 한 건 아닐까.

물론 그에게도 속엣말을 다 하진 않았으나, 그럼에도 염려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진가주가 없이는 안 될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럼 말씀해 보시지요. 서동 지방의 상황을 확인하는 일조차 미루시고 돌아오셔야 했던 그 대단히 중요한 말이 무엇인지 저도 몹시 궁금하니까요.”

“!”

불안한 듯 이곳저곳을 훑던 여가의 가주가 백기하의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들켰구나.

그가 입술을 꾹 물었다.

“……혹, 혹시 전령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게 중요합니까? 보고를 들은 이후 신경 쓰지 않아 모르겠으나 어딘가에 잘 있겠지요. 백가에 남았든. 여가로 황급히 돌아갔든.”

비뚜름하게 웃은 백기하가 덧붙였다.

“주가로 갔든 말입니다.”

“……!”

순간 여가주가 의자에서 내려와 다른 가주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여가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뭐?”

“제가 잘못 판단하였습니다. 제가 미흡하여…….”

여가주가 고두하며 소리쳤다.

“용서해 주십시오, 수장.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여가가 육문의 선봉에 서 주가와 가장 확실히 대적할 것입니다.”

백가를 육문의 수장으로 세우기는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가주끼리는 모두 동등하여 서열이 없었다.

하여 지금 여가주의 이러한 모습은 그의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천가주가 그 모습을 보며 이죽거렸다.

“하, 선봉이라니. 그 선봉을 믿을 수나 있나? 가장 먼저 주가를 상대하는 척하면서 막상 본진이 달려갔을 때 주가군에 합류하여 이쪽을 향해 검을 들이대고 있을지 누가 알겠느냔 말이다.”

그 말에 고두하던 여가의 가주가 두 눈을 서슬 퍼렇게 떴다.

“천가주. 말씀을 조심하십시오!”

“지금 누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는가! 자네가 주가 신영에게 제후 가문으로 대우해 달라 거래를 하였다가 주가 쪽의 분노를 샀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

“또 아는가! 지금 상황조차 주가에 제 쓸모를 증명하기 위한 기회로 역이용할지!”

“천가주.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그저 저는….”

여가주가 단번에 태도를 바꿔 천가주를 향해 변명했다.

“그저 저는 제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얻고 싶은 것입니다. 죄 없는 여가 혈족들이, 못난 가주가 한 번의 판단을 잘못한 죄로 모두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

가주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여가 가주가 눈을 질끈 감으며 덧붙였다.

“원하신다면 제가 가주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

“하니 절 용서하실 수 없다 하더라도, 부디 가주를 잘못 만난 불쌍한 여씨들이 이대로 주가의 손에 멸족되는 일만은 없게 선처해 주십시오.”

“…….”

그런 여가주의 모습을 보며 백기하가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쥐고 있을 때였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세화가 백기하의 손을 살짝 폈다.

그리고 가주들의 대화를 끊으며 제 목소리를 냈다.

“우습군요. 물러나면 물러나는 것이지 ‘다른 가주들이 원한다면’이라는 조건은 왜 붙이신단 말입니까.”

“……뭐야?”

“알고 계신 거지요. 자신을 섣불리 물러나게 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세화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주가와의 이차전이 시작되기 전, 멀쩡한 가주가 이유 없이 물러나는 것은 육문 사이의 불화를 증명하는 일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이!”

세화에게 정곡을 찔린 여가주가 발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주위 가주들을 향해 말했다.

“아무리 제가 밉다 하시더라도 이는 육문의 미래를 결정하는 위급한 자리가 아닙니까. 혼인도 하지 않은 저 어린 아가씨가 어찌 감히 가주들의 회의에 끼어들게 하시는 겁니까.”

“뭐야? 너 지금 우리 천주백장 소가주에게-.”

얼굴을 찌푸린 채 앞으로 나서는 천가주를 막아서며 장가주가 말했다.

“안목이 그 모양이니 여가주는 확실히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낫겠군.”

“뭐라고요?”

“이 아가씨가 가주들만이 들어올 수 있는 회의에 들어오고, 다른 가주들이 그녀의 참석도, 발언도 말리지 않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 거란 판단은 해야 하지 않겠나.”

천가주가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지. 그 정도 감으로 여가를 다스리다간 일족을 모두 사지로 몰아넣겠어. 그런 의미로 오늘 자네가 말한 대로 여가의 가주는 다른 이에게 물려주도록 하게.”

“…….”

실제로 물러나라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지 여가주가 입만 뻐끔거렸다.

“아. 그전에 진가주와 어디까지 상의가 된 일인지도 파악을 하여야지요. 아직 말을 맞추지는 못하였을 테니, 추궁을 한다면 지금이 적기이지 않겠습니까.”

당장 호위 무사를 부르려는 가주들을 만류하며 세화가 덧붙였다.

“혹 여가의 후계에게 다른 말을 남기면 곤란하니 가주 위의 인계 역시도 저희의 앞에서 하셔야 하고요.”

“…너, 이, 감히!”

“그렇게 하시지요, 여가주.”

낮고 강렬한 저음이 끼어들었다.

백기하였다.

“수, 수장!”

“가엾은 여가 혈족들을 버리지 말라는 가주의 호소는 잘 들었습니다. 하면 여가주께서도 내게 그럴 만한 성의를 보여 주셔야지요.”

“수장, 하지만 다른 분들이 다 보는 앞에서 후계에게 인계를 하고 혈족들에게 아무 말도 없이 물러나야 한다는 건…….”

“그럴 각오도 없이 배신을 했단 말인가!”

콰광!!

순식간에 마른하늘에 번개가 치더니 말끔하던 창에 산산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

“-수, 수장.”

“가, 가주.”

백기하가 여가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더없이 아름답고 수려한 얼굴 속 새까만 눈썹이 그의 분노를 대변하듯 바싹 위로 치솟았고, 막 벼려진 칼처럼 날카로운 예기가 그의 온몸을 휘감으며 들끓고 있었다.

걸음걸음마다 바닥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그가 여가주를 향해 경고했다.

“그동안 우리가 배신자들을 어찌 처분했는지를 기억한다면 지금 너를 이 자리에서 즉결 처분하지 않는 것 자체가 내 인내심의 끝이라는 걸 알 터인데.”

“그, 그건. 그렇지만 우리를 빼면 연합의 결속이 단단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인데 그런 것이…….”

“내가 그것을 두려워할 것처럼 보이나? 그렇다면 아주 잘못 판단하고 있군.”

“……수장.”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널 죽여 없애지 않는 것은 그저 전령에게 죄 없는 여씨들을 외면하지 않겠다 약조했기 때문이야.”

낮은 목소리가 침착하기만 했으나 그 안에 가득한 흉포한 살기를 그곳에 있는 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선택하시죠. 내가 여가주를 아직 가주로서 대접해 드릴 때 우리에게 협력하실 건지, 아니면 살뜰히 배신자의 대우를 받아 산산이 조각나 육문에서 내쳐질지.”

“……!”

얼어붙을 듯 차가운 백기하의 시선을 받으며 여가주의 몸이 벌벌 떨렸다.

백기하의 영력과 힘이 얼마나 거대한지는 여가주도 잘 알고 있었다.

환계의 지배자인 주가를 단숨에 꺾은 신수의 위용을 어찌 한시라도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백기하를 마주함에 있어 이런 두려움은 처음이었다.

그는 제 품 안에 있는 이에게 칼날을 겨누는 이가 아니었으니까.

한데 저 시선은…….

정말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뭐든.”

신음을 삼켜 낸 여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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