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수장인 백기하가 주가에 대한 제 태도를 분명히 한 이상 이미 주가와의 두 번째 전쟁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 배신자를 품고 일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
완벽한 증거를 가지고 배신자를 공표하여 축출하든. 이번 일은 눈 감은 채 여전히 동맹의 형태로 함께 가든.
영지가 하나 무너져 내린 여가 가주가 어찌 나올지가 관건이었다.
“하니, 여가와 진가의 가주에겐 새로운 신수에 대한 말을 전하지 말고, 그들의 동향을 잠시 지켜보기로 하지요.”
“그럽시다. 그동안 나머지 가주들은 이차전을 준비하며 병력을 재정비하고 있는 것으로 하고요.”
그리 뜻을 모으고 나서 여전히 백주천장인지, 주천장백인지, 주백천장인지. 팽팽히 신경전을 벌이던 이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러고 나니 너른 회의실에는 순식간에 백기하와 그녀 단 둘뿐이었다.
“우리도 가죠.”
“아침부터 여러 가지 일로 식사도 하지 못했잖아? 준비시킬 테니 잠시 먹고 가.”
“아니에요. 아까 일부인을 심문하려다 말았으니 그 일을 마저 처리하고 먹는 게 좋겠어요.”
세화가 몸을 일으키자 그 순간 백기하가 세화의 손을 잡아당겼다.
앗, 하는 순간에 그녀의 몸이 백기하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단단하고 두꺼운 팔이 작은 몸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단정한 입술 사이로 흐르는 호흡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먹고 가.”
애원처럼 들리기도 하는 그 말에 세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의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조금 쓰다듬고 조금 시무룩해진 눈썹 옆에 입술을 내렸다.
쪽!
“!”
“왜 그래요? 계속.”
“-계속?”
“아까부터 시무룩해 있었잖아요.”
“……아닌데?”
“맞는데요.”
“아닌데.”
“맞는데요.”
남자가 고집스럽게 반박하는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 세화가 선이 완벽한 그의 날카로운 콧등을 꼬집었다.
“나한테 거짓말하고 그럴 거예요?”
“…….”
“뭐예요. 왜 그래요.”
“…….”
“나한테 말하기 싫어요?”
“그런 건, 아냐.”
“…….”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뭔데요?”
세화의 몸을 고쳐 안은 그가 그녀의 가는 허리를 조금 더 힘주어 끌어안고는 작은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댔다.
“너무 멀리 가지 마.”
“네?”
“너무. 멀리 가지 마. 아니. 가지 말라는 건 아닌데. 당연히 가도 되는데. 그래도…….”
“…….”
“그래도 내 걸음으로 따라갈 수 있는 속도로 가 줘.”
“…….”
“그건, 그 정도는 괜찮잖아. 응?”
백기하의 눈앞으로 보석 같은 적자줏빛 비늘을 드러낸 위용 있는 적룡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꽃들이 그렇게 만발해 있었건만.
풍경이 그토록 눈이 부셨건만.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만들 정도로.
‘…….’
그 장면을 다시 떠올리니 그의 가슴 저 어딘가, 혹은 배 속 어딘가가 끓어 넘치는 것만 같았다.
갈수록 중심을 잃고 휘청이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그를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었다.
문득 볼에 따뜻한 것이 닿아 왔다.
눈을 들어보니 따뜻하게 빛나는 적자줏빛 눈동자가 긴 속눈썹의 음영을 드리운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데도 안 가요.”
깜빡이지조차 않는 눈을 한 그녀가 더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나도 욕심이 생겼거든.”
그가 호흡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멍하니 물었다.
“……무슨, 욕심?”
“아무도.”
그녀가 놀랍도록 수려한 그의 얼굴선을 조심히 매만졌다.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감고 달아날 수 없게 움켜쥐었다.
“아무도 내게서 당신을 빼앗아 갈 수 없게 하겠다는 욕심.”
그의 불안의 근원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말과 약속도 이 불안을 덜어줄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녀도 그랬으니까.
하여 그녀는 많은 말로 그를 달래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더 빨리 더 높이 날아가야 해요. 절대 누구도 당신을 넘볼 수 없도록.”
움켜쥔 그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 그가 제게 그랬던 것처럼 들어 올려 천천히 입을 맞췄다.
“당신을 원하는 그 누구든. 나를 보고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나 말고는 아무도 당신을 가질 수 없도록.”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각인하듯 명확하게 속삭였다.
“그러니 혹시라도 역대 가주들이 그러했듯 첩을 들일 생각이라든가, 다른 부인들을 들일 생각이라면 미리 포기해요. 나는 그런 걸 가만히 두고 볼 성격이 아니니까.”
“…….”
“왜 대답이 없어요?”
“아니. 그게…….”
자신의 재촉에 눈을 깜빡이는 남자를 보며 세화가 조금 웃었다.
“싫거나 달아나고 싶어도 이미 기회는 없어요, 당신. 그러니 아무 말 말고 그냥 내 거 해요.”
단단하고 매끄러운 그의 이마에 제 입술을 눌렀다.
“대신 잘해 줄게요. 한평생 행복하게 해 줄게요. 네?”
“…….”
표정 없이 그녀를 응시하던 남자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초조함이 드러나던 시선이 지워지고 수려한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그녀의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그녀가 혹 듣지 못하기라도 했을까 봐 몇 번이고 반복하며 대답했다.
“응.”
* * *
“주가와 전쟁을 하겠다고? 너희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일부러 결과를 알려 주자 일부인은 아까 마신 술이 모두 깨버렸다는 듯 이마를 짚은 채 헛웃음을 뱉었다.
“여가의 습격에 대해 들었으면서도 그런 결정을 내려? 머리가 돈 것이 아니라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일 테지.”
“참 이상하네.”
세화가 일부인의 앞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 교룡이 신수라 불려도 될 만큼 막강하다는 것은 잘 알겠어. 하지만 당신도 알 것 아니야. 이곳 백가에도 신수가 있다는 것을. 한데 왜 이렇게 그에겐 절대로 대적할 수 없다는 것처럼 말하는 거지?”
“하하. 그야 환계의 이치가 그러하니까. 백호는 절대로 용에게 이길 수가 없게 되어 있어. 그러지 않고서야 그 오랜 시간 동안 주가가 환계를 지배할 수 있었겠느냐?”
일부인이 혀를 차며 덧붙였다. 괜한 기대를 했다는 듯 눈 아래로 체념의 빛이 서렸다.
“멋모르고 무모한 결정을 내리는 머리 덕분에 나머지 손발과 비늘들이 피범벅이 되겠구나. ……나 역시도.”
“…….”
“……이번에도 결국 죽지 못하겠어.”
“백호인 게 문제라면 용은 어때?”
“뭐?”
“이곳에 백호 말고도 용이 더 있다면?”
멀뚱히 눈을 뜨고 세화를 바라보던 일부인이 피식 웃었다.
“신수가 그렇게 만들어 내고 싶다고 만들어지는 그런…….”
그러나 한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녀가 다시 한번 세화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네가?”
세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래. 그렇다면 어때? 당신과 협상의 여지가 있어?”
“미, 믿을 수 없어. 그럴 리 없어. 그러면 보여 줘 봐. 신수가 될 때 생겨난 역린이 있을 것 아냐. 그걸 내게 보여 줘.”
“그건 보여 줄 수 없어. 대신 다른 건 보여 줄 수 있지.”
“다른 것? 어떤…….”
세화가 일부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새하얀 피부 위로 적자줏빛 영력이 불꽃처럼 끓어오르더니 이내 빛을 내기 시작했다.
파앗!
마주 보지 못할 만큼 광화가 뿜어져 나와 일부인이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리고 잠시 후, 찬란했던 광화의 영향인지 조금 전보다 어둡게 느껴지는 방 안에서 일부인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발견했다.
제게 뻗어진 하얀 손 위로 오색의 구체 하나가 조금 떠오른 채 회전하고 있었다.
“……보주.”
용의 보주였다.
적룡의 보주는 대대로 타오르듯 농밀한 적색을 품고 있었기에 이것은 분명 주가의 보주는 아니었다.
하나 용의 보주임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거대한 영력이 단 하나의 구체로 축약되는 이러한 보주는 오직 용만이 만들어내 소유할 수 있었으니.
“너, ……너.”
일부인의 시선 속 온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녀는 마치 오랜 기간 언제 뒤집어질지 모르는 작은 배에 의지해 바다를 떠돌다 뭍을 만난 이처럼 온몸을 떨며 세화를 응시했다.
그 반응을 확인한 세화가 담담한 표정을 하고 보주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다시 손을 펼쳤을 때 그곳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잠깐의 증명은 일부인의 입을 열기엔 충분했다.
표정을 애써 갈무리한 일부인이 세화를 향해 물었다.
“그러면…….”
하나 요동치는 감정의 파동을 모두 지워 내지는 못했다.
“그러면 정말…… 넌 정말 날 죽여 줄 건가?”
“응.”
세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뭐가 어렵겠어. 난 당신에게 어떤 연민도 없고, 관계도 없고. 내가 주가에서 당한 것을 생각한다면 당장에라도 주가가 그리 싸고도는 당신의 목을 쳐 그들의 앞에 피를 흩뿌리고 싶은 심정인데 말이야.”
잔인한 말이었으나 일부인에겐 이것이 오히려 희망이 된 듯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해 줘. 그렇게만 해 준다면 네가 뭘 물어도 대답해줄 테니.”
“좋아. 그럼 일단 제일 궁금한 것을 묻지. 어째서 당신이 죽으면 교룡이 위험하다는 거야? 다른 부인들 역시 왜 위험하다는 거고?”
세화가 제일 이해가 가지 않아 진위를 반드시 확인하고 싶던 것을 가장 먼저 물었다.
“…….”
“다른 부인들은 그렇지 않은데 당신만 그런 연결고리가 생긴 이유는 뭐야?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을 것 아냐.”
“처음부터야.”
일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처음부터지. 그 교룡이 신수가 되지 못하고 저런 반쪽짜리 탈피를 하던 그 순간. 그때부터 이런 연결이 생겨 버렸으니.”
“-그렇게 오래전부터라고? 그럼 당신은 교룡이 신수가 되기 전 맞아들인 아내였던 건가?”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일부인은 다음 말을 꺼내놓기 전 조금 머뭇거렸다.
어떤 고통과 후회, 회한 등 수많은 감정이 그녀의 얼굴에 스쳤다.
그녀가 웃는 듯, 우는 듯한 얼굴로 세화에게 말했다.
“그런 연결고리가 있는 이유는…… 그 교룡이 내-.”
“…….”
“내… 아들이기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