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3화 (163/254)

용이었다.

찬란할 정도로 아름다운 적자줏빛 용이 호숫물이 만들어 낸 햇무리를 두르고 그들의 앞에 정말로 실존해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비늘 주변으로 영력의 빛이 물결치고 있었고.

별들이 섞여 든 듯 갖가지 다양한 작은 빛의 입자들이 씨앗처럼 적자줏빛 기운 사이에서 반짝였다.

황혼과 밤을 잇는 시각의 하늘처럼, 경탄이 터져 나올 만큼 완벽하게 조화로운 색상들이 용의 몸체를 감싸고 있었다.

“맙소사-.”

더없이 신령하고 위엄 있는 완벽한 모습의 용이었다.

용이 뿌리는 힘의 느낌은 그들이 익히 알고 있던 주가의 영력과 궤가 달랐다.

주가의 그것처럼 공격적이지 않았으며 더 부드럽고 색이 옅었다.

허나 거대하고도 맹렬한 힘의 형태는 도저히 몰라볼 수 없을 정도로 명확했다.

마른침을 삼킨 누군가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이런. 정말 용이…….”

그 순간이었다.

화살처럼 튀어 나간 백만용이 거대한 적자줏빛 용의 앞에 고두했다.

“이럴 수가. 가모님. 우리 가모님.”

감동으로 일렁이는 눈빛을 쏘아대며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며 목소리를 내었다.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옥을 수천 명의 장인이 공들여 깎아 놓은들 이렇듯 눈이 멀고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완벽하게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어떤 감탄으로도 제 마음을 절대 남김없이 표현할 수가 없으니. 이 숨겨지지 않는 고귀함. 만 리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우아함. 앞으로 봐도 백가의 가모님이시고 뒤로 보아도 백가의 가모님이시고 옆구르기를 하면서 보아도 백가의 위상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

백만용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넋을 놓은 듯 풀어져 있던 가주들과 주명윤의 시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단번에 날카롭게 일어섰다.

“백가 재상. 내 그 입을 조심하라 했지. ”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주명윤의 입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그게 무슨 말인가! 혼인도 하지 않은 내 딸에게 지금 계속 무슨-.”

주명윤의 말을 자르며 천가주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 혼인도 하지 않은 여아에게 가모라니! 자네가 제정신인가?! 게다가 백가의 위상? 이 아이가 백가인가? 그 무슨 허황된 말인가!”

날카롭게 백만용을 질책하며 끼어드는 목소리에 아군을 맞이한 듯 주명윤의 시선에 더욱 힘이 실렸다.

“맞습니다. 혼인하지 않은 내 딸은 오롯이 주씨일 뿐인데 재상은 계속 그 무슨-.”

“앞에서 봐도 뒤에서 봐도 백가?! 눈이 어떻게 되었군! 옆구르기를 하며 보아도 이것은 천가의 기운이지! 암! 천가의 황동빛 영력이 아니라면 어찌 저리 아름답고 우아한 영력의 색을 비출 수 있을까! 과연 천가의 자식이다!”

“……예?”

어이가 없었던 주명윤이 되묻던 순간, 장가주가 도끼눈을 하고 끼어들었다.

“그 무슨 말씀입니까! 저 아이의 영력의 기운을 자세히 보십시오! 감출 수 없는 장가의 푸른 물결이 섞여 있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주가의 붉은 영력과 천가의 황동 영력만 가지고 어찌 저리 위용 있는 신비한 적자줏빛 색채를 내뿜을 수 있겠습니까!”

장가주는 너희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눈을 달고 다닐 필요도 없다는 듯 확신에 가득 차 소리쳤다.

“저 아이의 먼 조상 중 존재하였던 장가의 피가 이곳에서 현신한 것입니다. 우리 장가의 푸른 영력이 섞이지 않고서야 혼을 빼앗을 듯 아름다운 이 적자줏빛 영력은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신수의 능력이 탐이 나신대도 그리 억지스러운 말씀을 하셔도 되는 것입니까!”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곳에서 가주들이 서로 자신의 말이 맞다며 노성을 냈다.

그 난장을 백만용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오만한 모습으로 지켜보며 웃었다.

“아무리 그렇게 말씀들을 해 보십시오. 우리 가모님이십니다. 하하.”

* * *

회의실로 돌아오는 내내 말다툼을 벌인 가주들은 입실하고 나서도 제 흥분을 전혀 감추지 못했다.

얼굴엔 들뜬 기색이 역력했고 어조도 조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됐다.

주가의 공격을 염려하던 때와 다르게 여가의 가주가 어떤 모습으로 백석저에 돌아올지를 추측하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작은 소리와 함께 젖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영력으로 말린 세화가 조용히 들어섰다.

이전에도 그랬듯 그저 기척만 내었을 뿐 다시 회의실 가장자리에서 수장들의 의견을 경청하려 함이었으나.

“그 무슨! 왜 그곳에 서는 것이냐, 이오.”

“……네?”

냐이오?

“큼큼.”

제 말투가 정상적이지 않았던 것을 스스로도 눈치챘는지 무안함을 감추려 헛기침을 한 천가주가 제 언사를 정정했다.

“내 그간 아가씨께 하대하여 미안하오. 그저 아가씨가 수아의 외모를 참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빼닮아 친근하여 그런 것이니 마음에 두지 않길 바라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말씀을 낮추십시오.”

세화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말씀처럼 천가주께서는 저희 어머니를 어렸을 때부터 지켜봐 오신, 제 외숙이나 다름없으시지 않습니까. 이리 말을 높이시니 제가 송구할 뿐입니다.”

“맞지. 그렇지. 그럼 그럼! 내가 네 외숙이지!”

세화의 말을 들은 천가주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입꼬리가 하늘까지 치솟을 듯 휘어지기 시작했다.

“역시 수아의 딸이라 뭔가 달라도 달라! 아무렴 내가 수아의 혼인을 아주 잘 시켰지. 천가의 피에 흐르는 비상한 재능과 감출 수 없는 현명함이 네게도 극명히 드러났구나.”

“……네?”

“주세화라니. 이리 현명하고 능력 출중하고 완벽한 천씨의 후손에게 어찌 주씨를 붙일 수가 있겠어. 앞으로는 천세화라 하는 것이 어떠하냐.”

“천가주.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아이의 아비는 접니다! 환족은 대대로 아버지의 성을 따라왔는데 가주께서 어찌 마음대로 제 딸의 성을 바꾸려 하십니까?!”

“자네도 보면 알 것 아닌가. 이 아이가 주씨의 영력을 가지고 있던가? 천씨의 영력을 더 강하게 타고난 것을 내게 따지면 어쩌자는 것인가!”

“천가주!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 여식은-.”

“아 참, 팍팍하긴. 알겠네. 그럼 앞으로 주천세화라고 부르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너무 그러지 말게. 또 누가 알겠나. 나는 아직 소가주를 정하지 않았는데 내가 죽은 후 이 아이가 천가의 가주가 될지.”

“예?”

어이가 없던 주가의 노무장이 그렇게 되물을 때 백만용의 입이 열렸다.

“아이고. 천가주께서는 그 무슨 말씀입니까. 그분은 백가의 가모님이신데. 그렇게 치면 응당 백씨가 제일 앞에 붙어야지요. 그럼 백주천세화 님. 소가주가 되시면 백주천 소가주님. 만약 천가의 가주가 되시면 백주천 가주님이라고 부르시면 되겠군요.”

“아니, 뭐야?!”

“재상 말 한번 잘했구나. 하나 어찌 우리 장가는 빼놓는 것이냐?! 이 아가씨의 영력 기저에 깔린 푸른 장가의 파동을 아무도 못 본 것이야? 백주천으로는 안된다. 무조건 백주천장이어야 해!”

“장가는 기미도 안 보이던 것을 무슨! 백가도 그렇지. 혼인도 하지 않아 놓고 어찌 백씨를 제일 앞에 붙여! 필요 없고 주천이지. 주천!”

눈을 부릅뜬 가주들이 옥신각신할 동안 그 장면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던 세화가 방 한편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백주천장 소가주라 불리는 자신을 생각하니 어쩐지 목이 타는 듯해 차를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찻주전자와 잔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주전자를 들어 안에 든 것을 따르자 뜨거운 차가 뿌연 김을 내며 작은 잔 안으로 쏟아져 들었다.

“아니! 그건 안 된다!”

“예?”

한데 그걸 마시기도 전에 빠르게 다가온 천가주가 그녀의 손을 만류했다.

“이리 뜨거운 것을 그냥 마시려 하면 어쩌는 것이냐. 혀를 델지도 모르고 흔들려 넘친 찻물에 화상을 입을지도 모르는데.”

“……아까도 이리 마셨는데요?”

“그때는 내가 미처 경황이 없어 너를 세심히 신경 쓰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천가주. 말씀은 바로 하셔야지요. 아까까진 이 아가씨가 안중에 없었던 것이고, 이제는 상황이 달라진 거라고요.”

“아니, 뭐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한숨을 삼킨 세화가 잠시 나가 있겠다고 할까 망설일 때였다.

“그만들 하시지요.”

낮고 부드러운 백기하의 저음이 그들의 소란 사이를 갈라 냈다.

백기하는 한마디의 질책도 더 꺼내 놓지 않았다.

하지만 미동 없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 천가주와 장가주의 흥분도 빠르게 가라앉았다.

“……흠.”

“……큼.”

그들이 더 이상 언성을 높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백기하가 말을 이었다.

“지금 논의해야 할 것은 하나뿐입니다. 늘 있던 국지전 정도가 아닌, 여가가 대대적으로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우리가 주가를 어찌 대해야 할지 말입니다.”

“여가는 이미 우릴 배신하지 않았습니까. 어설프게 협상을 내걸다가 주가의 분노를 산 것도, 그리하여 영지가 쑥대밭이 된 것도 자업자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데 우리가 그걸 신경 쓸 필요가 있습니까?”

“상황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여가의 배신을 공표한 후 주가의 공격이 들어온 것이면 모르지만 지금 상황은 주가의 공격이 육문을 향한 것으로만 보일 테니. 여기서 여가의 배신을 공표한다 한들 그저 꼬리 자르기로만 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만약 우리가 지금 여가를 육문 동맹에서 내보낼 경우 여가의 가주가 순순히 자신의 배신을 인정할 것 같지도 않고요.”

“그리고 신영의 등극식에 참가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등극식에 참가하라 가주들 모두에게 초청장을 돌린 상태에서 여가를 저리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까. 이리되면 어찌 영지를 비운 채로 마음 놓고 주가로 갈 수 있겠습니까.”

“하면, 수장께서는 이번 일을 어찌 처리하시길 원하시는 겁니까.”

목소리를 낮춘 천가주가 백가주를 향해 물었다.

장가주도 눈을 빛냈다.

“이번 일은 수장을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나는.”

백기하가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몸 주변으로 날카로운 예기가 생성됐다.

한숨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차게 굳어지며 유려한 턱선 안쪽으로 붉디붉은 입술이 제 의견을 확고히 꺼내 놓았다.

“나는 교룡을 죽여야겠습니다.”

음영 진 눈썹 뼈 안쪽으로 색이 진한 동공이 어둡게 번뜩였다.

“천기를 거스르고 다른 이의 목숨을 잡아먹으며 명을 늘이는 신영을 죽여야겠습니다.”

낮고 부드러웠던 평소와는 다르게 확고한 결심을 중심에 세운 목소리가 제 살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도리를 저버린 다른 주가 일족들 역시 하나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탁자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운 백기하가 천천히 세화를 향해 걸어왔다.

흔들림 없는 눈이 그녀를 가만히 주시했다.

“그리하여 내 주인의 발밑에서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게 할 것입니다.”

“예? ……주, 인이요?”

잘 나가다가 갑자기 혼란스러운 단어를 듣게 된 가주들이 귀를 의심할 때였다.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힌 그가 무릎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

이렇듯 가까이에서 이런 애정 행각을 목격한 적 없는 노가주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두 눈을 감고 깊게 그녀의 체향을 들이마신 백기하가 그런 가주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니 다들 혼란스러운 논의는 그만두시지요. 이 아가씨의 발밑엔 이미 백가가 놓여 있으니 차라리 부르실 거면 백세화라 부르시든가요.”

“……!”

“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