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1화 (161/254)

* * *

누구도 당신을 다칠 수 없게 하겠다고.

절대 죽을 수 없도록 단단히 결계를 두른 채 당신을 주가에 넘겨주겠다고.

그리 말하며 웃는 세화를 시붉은 시선으로 한참 응시하던 일부인이 이내 제 감정을 침착하게 갈무리했다.

“날 주가로 보낸다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가 보구나.”

여유로움을 가장한 그 응대에 세화가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내가 뭘 모르는데? 당신이 교룡의 목숨줄이라는 것? 당신이 잘못되면 교룡을 비롯해 신영의 다른 부인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거?”

“!!”

“그 사실에도 아랑곳없이 당신은 죽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스스로는 목숨을 끊을 수 없다는 거?”

“너!”

입술을 파르르 떤 일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가 단번에 세화에게 덤벼들었다.

“!”

하나 채 백기하가 손을 쓰기도 전에 세화의 영력 방어막에 튕겨 나갔다.

“이 망할 년!! 그걸 알면서! 그걸 알면서 날 주가로 보내겠다고?!”

서둘러 달려온 최장명과 사영채에게 어깨를 잡힌 채 바닥에 짓눌린 일부인이 세화를 향해 악을 썼다.

“그러기만 해 봐! 나 역시 결코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저택의 흰 대리석이 새까맣게 변하고 이곳에 모여 있는 환족들이 다 죽어 나갈 때까지 내 피를 사용해 저주하지 못할 것도 없지. 그러길 바라느냐?!”

일부인의 발광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은 세화가 바닥에 짓눌린 일부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당신 눈도 참 별로군. 내가 그런 걸 두려워할 이로 보여?”

무릎을 끌어안은 그녀가 일부인을 향해 말했다.

“그러지 말고 나와 협상이나 하자 해 봐.”

“협상은 무슨 협상. 그딴 소리를 할 거면.”

“그럼 내가 당신 꼭 죽여 줄게.”

“!”

“정말이야. 어떤 짓을 해서건. 어떤 방법을 써서건.”

세화가 조금 더 몸을 굽히곤 일부인과 시선을 맞췄다.

“내가 당신 꼭 죽여 줄게. 응?”

“…….”

한참 만에 일부인이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뭘, 내게 뭘 원하는 것인데?”

“들어 볼 마음이 생긴 거야?”

세화가 그렇게 물었을 때였다.

방을 뒤덮은 결계가 풀리더니 문밖에서 누군가가 기별을 했다.

“가주. 백만용입니다.”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고 경직된 얼굴의 백가 재상이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가주, 급히 살펴보셔야 할 일이 생긴 듯합니다.”

“뭔데 그러하냐.”

“그게.”

백만용이 바닥에 짓눌려 있는 일부인을 잠시 바라보나 싶더니 백기하가 허락하는 듯하자 곧장 입을 열었다.

“여가의 서동 지방이 초토화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인명이 스러졌고 땅들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주가의 소행인 듯합니다.”

“……뭐?”

* * *

사영채와 최장명을 일부인의 감시 역으로 남겨 둔 채 황급히 회의가 소집되었다.

즉시 육문의 수뇌부와 주명윤 부처가 회의실에 모였다.

전령의 보고를 확인하러 간 여가주의 자리만이 공석인 상태였다.

상황을 더 정확히 듣기 위해 사태를 알리러 달려왔던 전령을 회의실로 불렀다.

“서동 지방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주가 군사들이 습격하기라도 한 거야?”

“그, 그것이 아니오라-.”

여가의 전령이 간신히 목숨을 구했던 그때의 상황을 묘사했다.

전령은 가주의 명령으로 주가에 서신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반드시 신영께 직접 전해야 한다 명 받은 서신이었다.

하여 그것을 지키기 위해 주가 저택에서 제법 억지를 써야 했고 그로 인해 제 목숨이 위태로워질까 봐 제법 겁먹고 있었다.

결국 신영의 삼보관에게 서신을 직접 전한 후, 곧장 뒤를 돌아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주가의 영지를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그렇게 간신히 주가 영역을 넘어 제 땅을 눈앞에 두던 시점이었다.

“하늘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끔찍한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전령이 목소리를 떨며 제가 본 것을 세세하게 묘사했다.

몰라볼 수 없는 주가의 붉은 영력이 마치 땅을 태우듯 불꽃처럼 이글거렸다고.

한시라도 빨리 가주께 이 상황을 말씀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도 쉬지 못하고 달려왔다고.

백가를 제외한 나머지 가주들 사이에 침음이 흘렀다.

“주가가 다시 전쟁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면 어찌해야 합니까.”

“일단 여가의 가주가 달려갔으니 어떤 상황인지 잠시 기다려 봅시다.”

그때 육문의 회의 중엔 섣부르게 입을 열지 않던 주명윤이 전령을 응시하다 가만히 물었다.

“무슨 서신이었느냐.”

“……예?”

“주가에 무슨 서신을 전한 것이냐 물었다.”

그제야 제가 경황이 없어 서신의 이야기까지 한 것을 안 전령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저, 저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이것을 주가로 전하라 하여……. 그저 늘 있는 영지선 분쟁의 일에 대한 통보를-.”

“지금 주가는 온 영지 전체가 새로운 신영의 등극식을 준비하는 중이다!”

주명윤이 노성을 질렀다.

“온갖 제례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 혈족의 방문조차 제한을 두는 때이거늘. 그따위 중요하지도 않은 보고를 위해 너에게 저택을 개방하였다고?”

전령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들은, ……그들은 제가 막무가내로 신영께 서신을 전해야 한다고 하니 그래서 열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제가 억지를 쓰니 아마도 중요한 정보일 거라 착각을 하고-.”

“내가 주씨인 것을 모르고 네가 거짓을 마구 내뱉는구나!”

쾅!

주명윤이 그대로 탁자를 내리쳤다.

“주가의 초소병들과 저택의 무사들은 반드시 대략적인 내용을 확인한 후 너를 들여보냈을 것이다. 반드시 신영이 확인하셔야 할 긴급한 제안이라 판단하여 문을 열었겠지. 하니 네가 그 내용을 모를 리 없다. 그것이 무엇이냐!”

“……!”

전령을 둘러싼 다른 이들의 시선도 날카로워졌다.

“아니, 전-, 전. 정말-.”

더없이 차갑게 얼굴을 굳힌 백만용이 한 손에 영력을 쥔 채 다가가 전령의 멱살을 잡았다.

“너도 무사라면 육문 연합에서 그간 배신자들을 어찌 처리해 왔는지 알 것이다. 다음 차례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사실만을 내뱉어야 할 것이다.”

“배, 배신이라뇨! 배, 배신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나!”

“!”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가주들의 매서운 눈빛을 받아내던 전령이 결국 그들 앞에 고두했다.

“저희…… 가주께서는. 그저 저희 가주께서는 육문에서 소유한 인질을 가지고 주가와의 힘겨루기에서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하셨을 뿐입니다.”

전령이 입술을 떨며 대답했다.

“그 외엔 저도 알지 못합니다. 정말로 제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때 일행의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여가가 가진 인질이란 게 대체 누구죠?”

회의실의 가장자리에 앉아 말을 아끼던 세화가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물었다.

“전쟁은 이미 몇 달 전 끝이 났고, 그사이 획득한 인질과 전리품들은 육문 연합이 모두 명단을 공유하였는데. 여가에서는 다른 가주들 모르게 대체 누굴 데리고 있는 건가요?”

“……그, 그것은 제가 알 도리가.”

“당연히 네가 알겠지.”

세화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새롭게 추가된 인질이라 하면 내가 며칠 전 회의에서 언급한 한 명밖에는 없는데. 그것을 이리 빠르게 주가로 전했다 함은 반드시 전서구를 사용하지 않았겠느냐? 짧은 내용을 서신의 형태로 옮겨 적어야 했을 테니 네가 그 내용을 낱낱이 알겠지.”

“아, 아닙니다. 서신으로 만든 것은 다른 무사이옵고 저는 그저 전하기만-.”

쾅!

세화가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반드시 신영에게 직접 전해야 하는 중요한 정보를 너희들끼리 공유하였다고?! 네가 지금 나와 이곳에 있는 육문의 가주들을 바보로 여기는 것이냐!”

“!”

“말해라.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배신의 죄를 물어 이곳에서 너를 즉결 처분할 것이다!”

머리를 땅에 대고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전령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면, 제가 사실대로 고하여도 여가는 여전히 육문 연합인 것입니까?”

전령이 말했다.

“주가의 공격이 여가를 향한 이때 ……저희가 연합에서 축출되면 여가 혈족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염려 말아라.”

침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탁자에 기대듯 앉아 있던 백기하가 냉철한 표정으로 그리 단언했다.

“여가의 가주가 무슨 일을 하였든, 주가의 공격에 여가 땅이 짓밟히게 된다면 육문이 아니더라도 내가 반드시 나서 여씨들을 도울 것이다.”

백기하의 단언에 그가 있는 곳으로 머리를 숙인 전령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서신엔 이리 적혀 있었습니다. 주가의 중요한 인질을 여가에서 소유하고 있으니.”

“…….”

“주, 주가에서 여가를 용서해 주신다면 인질을 데리고 주가에-.”

“주가에?”

“주가에. 주가에 복속……할 의향이…….”

육문 수뇌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무섭게 턱을 굳힌 강가주가 물었다.

“의향이. 그 다음엔?”

“그, 그게 답니다.”

“그게 다일 리가 있겠느냐! 아직도 그딴 소리를 해?!”

“!”

“제 밑으로 복속하겠다는 가문의 영토를 그리 만들었다고?! 그게 말이 되느냐!”

“아, 아닙니다. 정말 그게 답니다. 다, 다만……. 다만 그리 복속될 경우.”

전령의 눈이 질끈 감겼다.

“그 경우 이전의 분쟁은 모두 잊고 제후 가문으로 분류하여 그에 맞는 대우를-, 대우를 해 주십사.”

“…….”

“…….”

날카롭게 치솟은 시선들이 자연스럽게 여가의 가주와 뜻을 모으던 진가의 가주에게로 향했다.

진가주가 손사래 쳤다.

“아, 아닙니다. 전 그저 주가에 신수가 남아 있으니 사태를 조금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육문을 배신하고 주가에 붙을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천가주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대로 회의를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군.”

장가주가 말을 보탰다.

“일단 저 전령을 가두고 여가주가 상황을 확인한 후 어찌 나오는지 기다려 보시지요. 진가주. 진가주 역시 그사이 잠시 저택에 구금되는 것을 양해하셔야겠네.”

“의심을 피할 수 있다면 며칠 방 안에 있는 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여가주가 저리 나오는 것은 저도 예상치 못한 바이니, 네 분 가주들께서는 부디 저에 대한 다른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전령과 진가주가 백가의 무사들에게 이끌려 회의실을 나간 후에도 분위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기만 했다.

장가주가 한탄스럽게 말했다.

“교룡이 문제군요.”

“주가에 신수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아주 큰 문제였다는 걸 이리 간과하였으니.”

“신수는 무슨 신수! 그래 봐야 교룡 아닙니까. 문제가 있어서 제대로 탈피하지 못했거나 신수 였다가 신수의 격을 잃은! 우리 쪽엔 진짜 신수가 있는데, 그깟 교룡이 무슨 문제라고!”

“허나 그 오래된 시간을 살아온 교룡이지 않나. 예전엔 온 대지에 지금보다 영력이 풍부했었으니, 그때 탈피하였다면 지금 탈피한 이들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얻었을 거야.”

“맞네. 게다가 그는 힘을 얻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

“그건, 그렇습니다만.”

쉽게 해결되지 않을 듯한 문제에 가주들이 침음을 삼킬 때였다.

세화의 목소리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었다.

“저……. 주가에 용이 남아 있는 것이 문제라면, 이곳에도 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이면 어떨까요? 그럼 해결될 것 같은데요. 그렇게 되면 이곳엔 용과 백호 두 신수가 머무는 것이니까요.”

천가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눈빛이 어린아이의 재롱을 보는 듯 아래로 휘어졌다.

“네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겠다만 육문의 무사들은 이미 십 년에 걸친 전쟁에서 백가주가 보이는 신수의 위용을 목격한 뒤란다. 어떤 가짜 신수를 만들어 낸다 한들 어설픈 눈속임임이 드러나지 않겠느냐?”

강가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막대한 영단을 사용하여 신수를 가장하려 한들 그조차 알아채는 이가 분명 나올 터인데.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런 영단들을 대체 어디서 구하겠느냐?”

“…….”

눈을 깜빡이며 침묵하던 세화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눈속임할 필요가 있을까요? 제가 용의 모습으로 변용하면 될 듯한데…….”

그 말에 장가주와 강가주 역시도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네가 용의 모습으로 변용하면 된다니. 용의 모습을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울 것이었으면 어찌하여 환계에 신수가 사라-.”

그때였다.

감격한 얼굴의 백만용이 눈을 빛냈다.

“맙소사. 백호 신수의 모습뿐 아니라 용의 모습으로도 현신하실 수 있으셨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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