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빛이 없는 밀실 안에선 퀴퀴한 썩은 내가 코를 찔렀다.
걷기 위해 벽을 짚은 손가락 끝에는 척척한 습기가 만져졌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고요한 공간이었다.
조용히 이 밀실의 통로로 숨어든 천령이 호흡조차 낮게 가라앉혔다.
이 고요 속에 누군가 숨어 있기라도 할까 봐 조심하고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가 주의를 늦추지 않으며 어둠을 가르고 나아갔다.
한참 만에 저 멀리서 전해져 오는 가느다란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호흡이 하나인 것을 확인한 그가 빠르게 달려가 품 안에서 초를 꺼내 불을 밝혔다.
어둠 속에 있던 이가 혹 눈이 부시기라도 할까 봐 검은 망사를 씌워 조도를 낮췄다.
“너, 왔구나…….”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누워 있던 누군가가 바싹 마른 입술을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밀실을 메운 고약한 냄새가 누군가의 상처에서 풍기고 있었다.
“약을 가져왔습니다.”
천령이 누군가의 상체를 조금 들어 올리고는 품 안에서 꺼낸 약을 마른 입술 사이로 흘려 넣어 주었다.
그 이후엔 또 한 병을 꺼내 진물이 흐르는 상처와 썩어 가는 피부 위에 뿌렸다.
하나 주가 신영의 저택에서 사용하는 뛰어난 효능의 약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통만은 잠시 멈춰 준 듯 누군가의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을 뿐이었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오늘 밤 모시고 나갈 것이니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 그래? 나, 나가는 것이냐. 드, 드디어, 여기서, 나가는 것이야?”
“예. 어떤 약으로도 치료가 되지 않으니 모시고 장가로 갈 것입니다. 장가 가주가 가진 치유력이면 상처가 조금이라도 호전되실지 모릅니다.”
“그, 그래.”
누군가가 목이 막히는 것처럼 속삭였다.
“가자. 가.”
바싹 마르고 주름진 손을 들어 천령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가자.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 다오.”
“오늘 밤이면 됩니다.”
제가 잘 아는, 이 저택에 복속된 무사라면 모를 수 없는 익숙한 얼굴.
노쇠한 신영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절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주경현 님.”
“그래. 널, 믿지. 암. 널 믿고말고.”
노인의 주름진 눈가가 힘없이 젖어 들었다.
어째서 제가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지.
온몸을 장악한 이 끔찍한 고통은 대체 언제 사그라드는 것인지.
어째서 제가 이런 몰골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인지.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제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주경현이라 불린 이가 몇 번이고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백기하는 눈만 열의 없이 깜빡이는 중이었다.
제가 지금 들은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도 그때 그 말들 다 들었잖아요. 그저 ‘교룡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부인’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여자가 교룡의 명줄이라는 건 너무 비약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랬다면 다른 이들이 그 여자를 저택에 감금해 두거나 했겠지.”
백기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덧붙였다.
“감금이 아니라 해도, 어쨌거나 교룡의 힘이 통제할 수 있는 곳에 두지 않았겠어?”
“딱히 통제하지 못하는 곳도 아니었잖아요? 그때 내게 반죽음되고 있던 오부인과 신영 역시도 교룡이 빼내어 갔으니까요.”
“하지만 그랬다면 그 일부인도 함께 데려갔겠지.”
“어쨌거나 우리끼리 이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한번 가서 직접 물어보자고요.”
“직접……. 그 일부인에게? 그 여자가 제대로 대답해 줄까?”
“또 알아요? 그리 죽고 싶어 하는 듯 보였으니 완벽한 죽음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아무 말이라도 해 줄지도요.”
인질에는 당연히 인질로 답을 해 줘야 하지 않겠냐며.
오라비들의 소식을 부모님께 알린 날 세화가 그리 이를 갈 수 있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사연주의 몸을 한 일부인이 그녀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더 정확히는 어머니를 오부인의 손에서 구출하던 그 날.
신수가 된 채 오부인의 뒤를 쫓는 세화를 따라가려던 백기하가 의식을 잃은 무사들 속에서 일 부인을 잡아 왔기 때문이었다.
일부인이 차지한 몸이 세화의 사촌 동생의 것이었기에 처분 역시도 세화에게 맡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판단에 그리하게 되었건만.
‘그런 여자가 교룡과 다른 신영 부인들의 목숨줄이라고?’
백기하에게 잡힌 이후, 일부인은 쭉 그의 결계 속에 갇혀 있다가 이 저택까지 함께 끌려와 백석저에 감금된 상태였다.
일단 일부인을 만나 보자는 의견에 동의한 백기하가 세화와 함께 방을 나섰다.
방 밖에서 대기하던 세 자매 역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일부인이 있는 곳은 제법 풍광이 좋은 백석저의 상층 방이었다.
겹겹이 둘러쳐진 결계로 그곳엔 사용인들조차 드나들지 못했다.
세화와 백기하가 결계를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일부인은 창을 활짝 연 창가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음식들이 탁자 위에 그득했으나 어느 하나 손을 댄 기색이 없었고 빈 술병만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방 한편에 서 있던 최장명이 세화를 발견하고는 잠시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고 반색했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간은 백가의 무사들이 인질을 감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장명이 백가로 함께 넘어온 이후로는 죽 그가 맡고 있었다.
권속인 그가 영력을 사용하면 세화가 바로 알아챌 수 있다는 이유로 그에게 일부인의 감시를 맡기기로 한 것이다.
일부인은 방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힐끗 바라보았다.
얼마나 술에 취했던지, 계속해서 내려앉으려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며 물었다.
“웬일이시지. 드디어 내 쓰임을 찾으시기라도 한 건가?”
일부인의 손에 들린 목이 가는 술병에서 향이 독한 액체가 잔으로 쏟아져 내렸다.
“술을 원 없이 제공해 준 것은 참 고맙더라구. 이제 내 사지를 잘라 죽인다 해도 원한이 없겠어.”
세화가 그런 일부인에게 다가가 곁의 의자 하나를 빼고 앉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일부인에게 냉랭한 어투로 물었다.
“그거 알고 있어? 당신 그 몸, 내 사촌 동생이라는 거.”
“이 몸이?”
“그래.”
“아. 그래서 길에서 마주쳤을 때 그리 이상했던 거군. 아, 이제야 알겠어.”
“사촌 동생의 몸이라는데 뭔가 할 말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차피 난 밀실 감옥에 갇힌 몸을 가져다 사용한걸. 내가 먹은 이 여자가 죄인이란 뜻이지.”
일부인이 그게 뭐 대수냐는 어조로 가볍게 대답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죄인이 밀실 감옥으로 끌려갔을 땐 다시 만날 희망 따위 이미 없었을 것 아냐. 한데 죽어 다시 못 볼 동생을 내 덕에 이리 껍데기나마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 내게 감사해야 할 일 아니야?”
“그렇다는 건 당신에게 먹힌 내 사촌 동생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건가?”
“글쎄. 하지만 지금껏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으니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
“왜. 도로 갖고 싶어? 이 몸 다시 내줘?”
세화가 입을 다물자 일 부인이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갖고 싶으면 줄게. 나한텐 그리 쓸모 있는 몸뚱이도 아닌지라. 나한테 옮겨 탈 몸만 하나 내어줘. 그럼 얼마든지 도로 줄게. 아, 다만.”
일부인이 무얼 떠올리는지 허공을 응시하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입맛을 다시듯 술로 젖은 제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새 몸은 그 여자가 좋겠어. 내가 먹었던 영단의 주인. 분명 원로 부인이라 했던 것 같은데. 그게 혹시.”
일부인의 휘어진 눈동자가 세화에게 와 닿았다.
“당신 어머니던가?”
문밖을 지키는 영선과 영무를 제외하고, 방 안으로 세화를 따라 들어왔던 영채의 얼굴이 단번에 험악해졌다.
“이…….”
달려들 듯 몸을 움직이는 영채를 손만 들어 말린 세화가 일부인을 응시했다.
상대의 도발에 조금도 기분이 상하지 않은 눈치였다.
“당신 말마따나 나도 내 사촌 동생의 몸을 되찾고 싶지. 왜 아니겠어. 내가 그 아이를 얼마나 아꼈는데.”
평온한 표정과는 달리 제법 한탄처럼 가라앉은 목소리가 세화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애석할 따름이야. 당신을 지금 그 상태로 보존해야 할 이유가 있거든.”
“이유?”
“그래.”
일부인의 아래위를 훑어본 세화가 피식 웃었다.
“당신을 주가에 상처 하나 없이 넘겨주려면 그래야 하지 않겠어?”
“……!”
언제 여유로웠냐는 듯 일부인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그 얼굴을 보며 세화가 안타깝다는 듯 덧붙였다.
“주가에겐 당신이 너무나 소중한 존재 같더라고. 우리가 어찌 감히 주가와 다툴 수 있겠어.”
마치 네가 뭘 가장 두려워하는지를 안다는 것처럼.
그럼에도 내가 그 일을 행하게 되어 지극히 유감이라는 것처럼.
“하여 당신의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소중히 돌려주려고. 결코 어떤 경우에도 목숨을 잃을 수 없도록 결계까지 제공하면서.”
“……너, 너-.”
“절대 죽지도 다치지도 않는 몸으로 주가에 고이 돌아가는 거야. 어때. 기쁘지?”
일부인의 얼어붙은 얼굴을 보면서 세화가 눈을 빛냈다.
* * *
소가주의 등극식을 준비하는 주가 신영의 저택은 며칠째 제법 번잡했다.
곳곳에서 음악이 흘렀고, 사용인들도 간만에 열리는 커다란 행사를 준비하며 들뜬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 소란스러움 사이, 몇 겹의 결계를 풀어야 들어갈 수 있는 벽 안.
밀실의 입구를 지나 아래로 내려간 곳에서는 매캐한 불꽃의 냄새와 짙은 피비린내가 고여 있었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타들어 갈 듯 뜨거운 열기가 이어졌다.
이미 잔뜩 겁먹어 떨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어딘가를 향해 고했다.
“하여 여가에서 서신이 도착했사온데. 자신들이 신영의 부인 중 하나를 인질로 잡고 있으며 주가에서 자신들 여가를 동맹으로 받아주는 경우에만 인질의 생사를 결정하겠다고…….”
차르르르-
교룡이 평소와 같지 않게 몸을 뒤틀었다.
비늘이 돌벽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마치 거친 사포를 마찰하는 것처럼 갈라진 웃음소리가 음산하게 밀실 안을 흘러 다녔다.
-살려, 둘 수가 없군. 용서할 수가 없어.
그 순간, 마치 오장육부를 끊어 내기라도 하듯 교룡의 갈라진 입 사이로 폭포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다.
“!!”
두려움에 희게 질린 시종이 벽으로 바싹 붙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충격파가 밀실을 부수며 터져 나왔다.
쾅-!!!!
그리고 주가와 경계선이 맞닿아 있는 여가의 서동 지방.
초소에서 보초를 서던 여가의 무사 하나는 갑작스레 급격히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을 의아해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건만.
어느새 몰려든 먹구름이 빠르게 하늘을 뒤엎고 있었다.
“소나기가 오려는 건가?”
무사가 그리 중얼거리던 순간이었다.
우레도 치지 않았는데, 하늘이 갈라지듯 구름 사이가 세차게 번뜩였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구름을 뚫고 뿜어져 나왔다.
기이한 현상에 하늘을 보며 굳어진 무사의 위로,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사이에서 시작된 만 개의 벼락이 땅을 향해 꽂혀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