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254)

그녀는 온몸에서 발산되는 마지막 영력을 필사적으로 제 배 속의 아이 주변에 꽁꽁 둘렀다.

이렇게 한다면 자신이 죽더라도 아이는 얼마간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그들을 측은히 여긴 누군가에 의해 아이만이라도 구해질지 모른다.

그것만이 희망이었다.

“어머. 아가씨!”

제유 원로와 대화를 마친 제문주가 돌아오고 있었다.

원신이 파괴되어 쓰러지는 그녀를 보고 놀란 제문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제문주의 뒤로 무언가 챙강 소리를 내며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백가의 영력으로 제련된 단검이었다.

한 번에 원신을 파괴할 수 있도록 제유 원로에게서 받아 온 듯했다.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손을 쓰길 잘했다고. 그런 생각을 한 딸이 눈을 감았다.

그녀의 의식은 거기까지였다.

“…….”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딸과 함께 지켜본 영공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 그를 어둠 속에서 세화가 지나쳐갔다.

어느새 제문주도 제유 원로도 사라지고, 주변이 다시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백효성에게로 다가간 세화가 그녀의 배 위에 제 손을 얹었다.

푸른 영력이 딸에게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영공 원로도 서둘러 다가갔다.

할 말이 많았으나 그 어떤 것도 지금 꺼낼 말들이 아니었다.

세화를 따라 딸의 팔 위에 손을 댄 그가 지금껏 딸의 생명을 유지해 온 제 영력들을 거두어들였다.

그 과정에서 전해지는 거대한 슬픔과 두려움들이 영공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제발 돌아오거라.

제발 돌아와다오.

내세에도 얼마든지 다시 네 부모가 될 것이다.

몇 번을 날 슬프게 한다 해도 얼마든지. 몇 번이든, 몇천 번이든 얼마든지 네 부모가 될 것이다.

그러니 제발 돌아와다오. 제발 날 혼자 두지 말고 돌아와 눈을 떠다오.

영공 원로가 그리 필사적으로 기도할 때였다.

어떤 온기가 그런 그의 마른 손가락을 잡았다.

“!!!”

“……아.”

힘없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아버지.”

“…….”

십 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그 순간 영공 원로는 나이도 체면도 벗어던진 채 소리 내어 목놓아 울었다.

* * *

그 장면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던 이들이 하나둘씩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갔다.

오랜만에 깨어난 백효성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부랴부랴 준비하러 달려가는 이도 있었다.

아이처럼 우는 영공 원로를 바라보는 세화의 눈도 조금 휘어졌다.

“우리도 가자.”

그렇게 말하며 세 자매를 부르던 세화의 발걸음이 잠시 휘청였다.

백기하가 그런 그녀를 황급히 잡았다.

“그대 괜찮은 거야? 괜찮은 게 맞는 거야?”

“오늘 이래저래 영력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가 봐요.”

그것도 익숙한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해야 했으니 몸이 지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턱을 단단히 긴장시킨 백기하가 그녀를 단번에 안아 들었다.

“앗, 내려 줘요. 다른 이들이-.”

“그냥.”

“…….”

“그냥 있어.”

세화를 안아 들고 걷는 백기하의 주위로 사용인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옆으로 비켜섰다.

그만큼,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세화는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난 듯한 얼굴 속, 조금 서글퍼 보이는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교룡의 때처럼 이 남자는 또다시 자신이 돕지 못했다고 자책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그럴 필요가 없는데. 당신은 그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내게 힘이 되는데.

세화의 침실까지 걸음 한 백기하는 침상 위에 그녀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많이 피곤할 것 같으니 어서 쉬어.”

“여기 있어요.”

“뭐?”

“여기 있어 줘요. 옆에.”

“괜찮아. 난 신경 쓸 것 없어. 내가 있으면 편히 쉴 수 없을 테니 난…….”

그리 말하며 한발 물러서는 백기하의 소매 끝을 하얀 손가락이 잡았다.

그녀가 더 움직이지 않는 그를 보며 말했다.

“여기 있어 줘요. 내 옆에.”

“…….”

그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의자 하나를 침상 옆으로 끌어오는 손길은 조금 전보다 확연히 나아진 기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세 자매 역시 방 안의 상황을 읽고는 빠르게 물러나, 방을 비춘 불빛 아래에는 둘의 그림자만이 일렁였다.

“……그런가. 주가의 손을 잡은 원로가 그뿐만은 아닐지 모르겠군.”

백효성의 기억 속에서 본 것들을 이야기하자 백기하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전쟁이 십 년이나 지속되었던 것도 그런 자들 때문일지 모르겠어. 다른 가문에서 찾을 필요도 없이 당장 백가 지휘 계통에 분명 제유 원로 같은 이들이 더 있을 테니까.”

“…….”

주가와 이차전을 치르기 전 그들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일이 더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하여 축출할 방법을 생각해야 하는 남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세화의 낯빛도 덩달아 조금 어두워졌다.

백가의 원로들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를 잃은 백기하가 가주로 등극했던 때부터 보필한 이들이지 않은가.

오늘 제유 원로의 비참한 죽음이 이 남자에게도 큰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 참담함을 세화라고 모르지 않았다.

믿었던 이가 저를 배신했음을 알았을 때 그녀도 그만큼 마음이 찢어졌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같은 고통을 곱씹으며 허탈해할 때가 아니었다.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린 그녀가 백기하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딱딱해진 그의 볼을 꼬집었다.

“!”

“왜 그런 얼굴을 해요. 당신이 내게 해 줬던 말 잊어버렸어요?”

“……말?”

“그래요. 분명 내게 그랬잖아요. 선악이 중요하냐고요. 혈족들의 선악이 왜 중요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요.”

“모든 이들은 다 제 욕망을 채워 주면 착해지거든.”

“필요한 것은 늘 내 수족이 될 수 있는 자이지, 선한 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했던 것 다 잊어버렸어요?”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놀란 표정이 퍽 우스웠다.

웃음을 흘린 그녀가 그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렇다고 모든 이들의 욕망을 다 채워 줄 순 없겠죠. 그러니 보여 주는 거예요.”

“뭘?”

“다시 한번 주가와 다툼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승자는 항상 당신일 거라고.”

“……!”

“그러니 백가의 편에서 헌신하는 것이 곧 너희들의 이득이 될 것이라고요.”

단단한 얼굴 속 남자의 동공이 작게 흔들렸다.

그러다 곧 침착해졌다.

굳어졌던 어깨에서 긴장이 빠져나가고, 편안해진 그의 얼굴 속 곡선이 아름다운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헌데 그대가 하나 틀렸어.”

“네?”

“승자가 나라는 부분.”

상체를 굽힌 그가 누워 있는 세화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애정 어린 눈빛이 그녀에게로 별이 쏟아지듯 떨어져 내렸다.

“그건 항상 그대의 것이야. 그게 뭐가 되었든. 어떤 종류의 승리든.”

다시 한번 입술을 내린 그가 동그맣고 하얀 이마 위에 뜨거운 온기를 눌렀다.

“나는 그대를 이길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까.”

덧붙여지는 말에 낮은 웃음을 흘린 세화가 그의 목을 잡아 끌어내렸다.

“그럼 우리라고 해요.”

열감 어린 그의 호흡을 집어삼키며 속삭였다.

“나도 당신을 이길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까.”

“세화.”

“그런데 당신은 계속 거기 앉아 있을 거예요?”

“응?”

“아버지, 어머니는 별관에 묵으시니 호통 들을 일도 없고. 사용인들도 오늘 일로 정신이 없어 이쪽으로는 오지 않을 듯하고.”

아무리 그녀라 해도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조금은 쑥스럽긴 했다.

‘그래도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어?’

“방에 우리 둘밖에 없잖아요.”

“!”

눈을 내리깔고 볼을 붉힌 그녀가 여즉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백기하를 향해 한마디 더 덧붙였다.

“결계…… 안 치고 뭐 해요.”

그 즉시 새하얀 영력의 파동이 방 안을 에워쌌다.

결계가 완성되기 전 세화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조금 흘러나가긴 했으나, 그 이후엔 모든 소리가 차단됐다.

서로의 몸을 뜨겁게 끌어안는 두 남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열린 창 사이를 흐르는 달빛뿐이었다.

* * *

이른 오전부터 세화는 백효성의 방을 찾았다.

방문 앞을 지키는 시녀에게 그녀가 기상해 있음을 확인하고 조용히 기별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영공 원로의 여식, 백효성의 모습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영공 원로가 몸을 일으키며 얼른 자리를 내주었다.

“앉으시지요, 아가씨.”

노원로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눈물의 여파인지 눈가가 온통 부어 있었던 데다가 하루 내내 딸에게 영력을 나누어 주었는지 안색이 제법 초췌했다.

하나 표정만은 이보다 더 밝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영공 원로가 내준 의자에 앉은 세화는 일어서서 은인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사과하는 백효성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손목을 잡고 상태를 다시금 확인한 세화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괜찮네요. 이대로 보름 정도면 막혔던 다리의 기혈도 자연스러워져 움직이시는 데 무리가 없겠어요. 배 속의 아이 역시도 다행히 잘 회복되고 있고요.”

“……!”

“머지않아 할아버지가 되시겠군요, 원로 어른. 미리 축하드립니다.”

“아가씨.”

지워 내지 못한 감격을 그대로 내보인 그가 세화의 앞에서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

“무엇으로 이 은혜에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가씨.”

“이러실 필요 없으니 어서 일어나세요. 따님이 보고 계시잖아요.”

“딸 아이 역시 일어설 수만 있었다면 제 옆에서 함께 아가씨께 고두하였을 것입니다.”

“원로 어른.”

“제 유일한 가족을 돌려주신 아가씨께 바치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노원로의 목소리가 또다시 눈물을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떨리며 흘러나왔다.

“여기서 맹세드립니다. 저 백심중은 남은 생을 아가씨의 수족으로 살 것입니다.”

“저 역시도요.”

백효성이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목숨을 구해 주신 은인을 위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아가씨를 모시며 살아갈 것입니다.”

세화가 이러지 말라며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못한 백효성을 먼저 일으켰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저 이들이 백가를 위해 마음을 다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을.

하나 그녀의 거절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순간 영공 원로가 세화의 말 사이를 조심히 끼어들었다.

“헌데 아가씨. 어제저녁 제 여식과 이야기를 하는 중에 이상한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괜찮다고. 수족의 맹세는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몸을 회복하는 데만 전념해 달라고.

그렇게 말하려던 세화가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이상한 얘기요?”

고개를 끄덕인 백효성이 세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제 아버지와 말을 나누던 중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가씨께서도 아시겠지만, 쫓기며 백가로 돌아올 때까지만 하여도 저는 제가 몸 바꾸기에 대해 알게 되어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는 건가요?”

“그 사실을 알고 나서도 한참이나 저를 살려 두었으니까요. 하여 뭔가가 이상했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니 몸 바꾸기에 대해 알게 된 것 때문이 아니라 그 이후 들은 어떤 다른 말 때문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백효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일 언니가 잘못되면 그분의 목숨도 위태로워지고, 그럼 우리 모두 끝장난다는 걸 왜 그리 못 알아듣는 거야? 일곱째 넌 그저 다른 말 말고 일 언니의 명줄을 더 붙잡고 있을 생각이나 해.”

“일, 언니?”

“예, 신영의 일부인을 뜻하는 듯했습니다. 오부인께서 칠부인에게 저 말을 하는 것을 우연히 들은 그날, 제 목숨이 위태로워졌습니다.”

“…….”

뜻밖의 말에 세화의 표정이 멍해졌다.

순간적으로 저 말에서 지칭하는 ‘그분’이 누구인지를 이해한 탓이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일 언니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교룡의 목숨도 위태로워진다고? 우리 모두가 끝장나?

갑자기 이런 말을 들으니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감히 내 오라비들을 다치게 한다면 이쪽의 인질은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찢어 죽일 거라는 걸 친절히 알려 줘야지요.”

‘사연주의 몸을 빼앗은 그 일부인. 그 여자, 지금 내 손에 있는데??’

세화가 멍한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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