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화 (158/254)

“부인.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오.”

딸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여보. 정말이에요. 오부인께서 마치 먹이를 고르듯 여자들의 몸을 고르는 것까지 내가 몰래 다 봤-.”

“쉬. 쉬.”

주변을 둘러본 사위가 딸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신영의 부인들에 대해 그리 모함하는 것을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여보. 모함이 아니에요. 제발 제 말을 믿어 주세요.”

“몸을 바꾸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리가 없잖소.”

“정말이라니까요. 오부인께서 지금껏 내게 주셨던 약이 뭔지 아세요? 몰랐는데 회임을 막는 약이었어요. 출산 같은 것을 하면 몸이 망가진다면서 내게 그런 약을 몰래-. 분명 나를 다음 몸으로 점찍어서.”

“부인! 다신 그런 말 같지 않은 말을 꺼내지 마시오. 벌써 누군가에게 전한 건 아니겠지?”

“그, ……그러진 않았어요.”

“좋소. 당신이 피곤한 모양이군.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드시오. 아무도 당신을 방해하지 말라 이를 테니. 내일도 또 신영의 저택에 가려면 당신도 피곤할 것 아니오.”

“여, 여보. 날 거기 보내지 말아 줘요. 거기 가고 싶지 않아요.”

“오부인의 말 상대를 하라는 건 신영의 명이잖소. 지금 명을 어기겠다는 말이오?”

“그게, 여보. 난 정말 무서워요. 그곳에 가는 게 너무 무서워요.”

“…….”

“제발 날 거기 보내지 말아 줘요. 정말 너무 무서워요.”

“그렇게 가기 싫은 거요?”

가만히 그런 딸을 응시하던 사위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알겠소. 그럼 내 지금 신영께 말씀드리리다.”

“!”

“당신이 그리 싫다니 하는 수가 없군.”

“여보,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딸이 사위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눈물짓는 그녀의 등을 사위가 다정한 손길로 도닥였다.

“이러면 갈 수가 없는데. 나를 놔줘야 신영께 다녀올 것이 아니오. 이건 가지 말라는 건가?”

그 말에 화들짝 떨어지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며 사위도 결국 웃었다.

딸아이도 웃었고 언제 분위기가 위태로웠냐는 듯 둘 사이는 평온해 보이기만 했다.

그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다시 주위에 어둠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영공 원로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먼 곳에서 또다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가! 당장 떠나라고!”

사위의 목소리였으나 조금 전 딸을 달랠 때 들어본 것과는 전혀 다른 조급함이 배어 있었다.

“여, 여보!”

“당장 떠나라는 말 안 들려?! 지금 바로 달아나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

잠시 어둠이 흐려지고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사위의 얼굴이 그 사이로 떠올랐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그가 노성을 터뜨렸다.

“가라고!!”

그리고 어둠이 걷히며 드러난 광경은 조금 전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하아하아.”

딸이 바삭거리는 풀을 밟으며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어둑했고 어둠 속에서 숲을 형성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흩뿌리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딸의 거친 호흡에 불안함과 공포가 가득 배어 있었다.

“어디로 가지.”

그러다 그녀는 어느 나무 그늘 아래 바짝 몸을 움츠리며 숨어들었다.

거칠어진 호흡이 존재감을 내보이기라도 할까 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딸은 숨조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어둠을 가르며 나타난 횃불들이 이곳저곳에 붉은 빛을 뿌렸다.

“멀리 가지 못했을 거다. 찾아!”

오부인의 목소리였다.

그 뒤에서 다급한 사위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오부인, 그 여자는 달아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추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내가 판단해.”

“돌아오면 제가 반드시 부인께 알리겠습니다. 하니 이러지 마시고 돌아가시지요.”

“꺼져!”

“…….”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오부인이 다시금 “샅샅이 뒤져라!” 하고 명령했다. 사위가 이를 물었다.

말에서 내린 그가 오부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고두했다.

“오부인. 그 여자를 그냥 보내주시면 안 됩니까.”

“뭐라.”

“담이 작아 어디다 말할 성격이 못됩니다. 분명 누구에게도 주가의 비밀을 절대 발설치 않을 것입니다.”

사위가 절실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게다가 몸을 바꾼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흘린다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미치광이 소리나 듣게 될 터인데요.”

“…….”

“오부인.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여인을 그냥 보내주십시오. 아이까지 품은 여인입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할 것입니다.”

“…….”

“오부인. 부탁드립니다. 뭐든 바치겠습니다. 시키시는 일은 뭐든 하겠으니 그 여자만 이대로 보내주십시오.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흙바닥에 이마를 찧는 사위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여자가 피식 웃었다.

“사건양!”

“예, 부인!”

곧 여자가 누군가를 불렀다.

검까지 빼든 채 숲을 뒤지던 신영의 무사 하나가 빠르게 오부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머리꼭지도 보이지 않도록 바짝 몸을 낮춘 딸이 우거진 덤불 사이로 시선만 조용히 움직였다.

오부인의 붉은 입술이 다시금 요요히 꼬리를 올렸다.

“여기, 이자가 너의 새로운 몸이다.”

“오부인!”

사위가 비명처럼 외쳤으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오부인의 말에 환희에 찬 눈을 크게 뜬 무사가 단번에 사위의 목덜미를 내리치고 그를 제압했다.

“저택으로 가면 몸을 바꿔 줄 터이니 상처가 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여 데려가거라.”

“감사합니다. 부인! 감사합니다!”

웅크린 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다시 주위가 어두워졌다.

또다시 공간이 변화했다.

“문주야. 너를- 너를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아가씨.”

딸은 제문주와 함께 백가 영역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한눈에 보일 정도로 비쩍 마른 몸은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일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저를 구해 주고 함께 주가를 벗어난 제문주밖에는 없었다.

딸은 언제 추격자들이 뒤를 따라올지 몰라 불안해 잠도 자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체력은 이미 한계에 이르러, 백가의 영지가 가까워질수록 밤이 되면 기절하듯 조금씩 눈을 붙였다.

추격자를 피해 길을 돌아오느라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되었으나 제유 지방의 성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제유 원로는 아버지의 의동생인 데다가 암호를 사용해 몰래 서신을 보내 두기까지 했으니, 내일이면 백가의 영지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안도 때문일까.

오늘은 더욱 깊이 잠이 들었다.

한데 어째서일까. 마치 누가 깨우기라도 한 것처럼. 일어나라는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하게도 깊은 밤 갑자기 눈이 떠졌다.

“문주야?”

누군가에게 위치를 들킬까, 불도 피우지 않은 주위가 깜깜했다.

두려움에 마른침을 삼킨 딸이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불침번을 선다던 제문주는 어딜 간 걸까.

혼자 남은 상황이 두려웠던 딸이 제문주를 찾아 나섰다.

그때 어디선가 나직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딸이 발소리를 죽였다.

제가 있는 곳을 서신을 통해 알린 것은 제유 원로뿐이었으나 혹 추격대가 그녀를 먼저 따라왔을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할 수 ……겠느냐.”

허나 조용히 다가갈수록 확연해지는 목소리는 명확히 그녀가 아는 이의 것이었다. 제유 원로였다.

“그, 그렇게만 하면…….”

제문주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면 정말로 주가에서도 더 이상 절 찾지 않겠답니까? 어디서 추적대와 마주쳐도 주가로 끌고 가지 않아 주시는 것입니까?”

“그렇다.”

“원로 어른께서도 절 위해 백석저의 사용인 자리를 마련해주실 것이고요?”

“한 번 더 묻는다면 이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할 것이다. 너야말로 할 수 있겠느냐.”

“그럼요. 이 세상은 주가의 것이 아닙니까. 주가에서 영역을 탈출한 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놓아주신다는데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허나 죽여서는 안 된다. 주가에서도 굳이 죽이는 조건은 걸지 않았으니 원신을 파괴하고 의식을 사라지게 만드는 데서 그쳐야 한다. 알겠느냐.”

“허나 원신이 파괴되면 어차피 돌아가실 텐데요.”

“하지만 당분간은 살아 있겠지. 하여 영공 원로도 산송장이 된 딸을 신경 쓰느라 원로직을 사퇴할 수밖에 없을 테고.”

“!!!!”

딸의 발걸음이 멎어 들었다.

핏기가 빠져나가 새하얗게 변한 안색을 하고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제유 원로의 목소리가 다시금 이어졌다.

“그러니 반드시 백효성의 숨은 붙여 놔야 한다. 알겠느냐. 원신만 파괴하여야 한다.”

“예. 맡겨 주십시오! 저 아가씨가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계시니 손을 쓰는 건 일도 아닐 것입니다.”

백효성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담아 내는 제 귀를 뜯어 내고 싶을 만큼 도무지 이 상황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나 현실이었다.

그녀가 도움을 청한 제유 원로는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저를 죽이려 하고 있었고, 주가의 청탁이 언급되는 것을 보니 추격자들도 바로 지척이었다.

신뢰해 온 제문주까지 조금의 망설임 없이 제 원신을 파괴하겠다 말하고 있었으니.

“…….”

그녀는 자신이 도망칠 수 없음을 알았다.

체력은 한계에 달해 있었고 지금 대화를 나누는 두 목소리 모두 그녀가 대단히 신뢰하였던 이들이었다.

또 어떤 배신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어디로 달아나겠는가.

원신이 파괴되면 자신도 살아남지 못하겠지만 배 속의 아이는 무슨 죄인가.

“오부인. 부탁드립니다. 뭐든 바치겠습니다. 시키시는 일은 뭐든 하겠으니 그 여자만 이대로 보내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여기, 이자가 너의 새로운 몸이다.”

남편이 죽던 그 순간에도 눈물을 보이지 못한 눈가가 몹시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일렁이는 것들이 곧 쏟아질 것만 같아 그녀가 피가 날 정도로 세차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만이라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로 돌아왔다.

저를 보며 얼른 떠나라 외치던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이내 저를 보며 자상하게 웃던 부모님의 얼굴이 겹쳐 흐려졌다.

“아버지. 어머니.”

결국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덮으며 쏟아져 내렸다.

주가로 가는 걸 얼마나 반대하셨던가. 그런데 곧 제 죽음까지 보여 드리게 생겼으니.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녀가 마지막으로 영공 지방을 향해 깊이 몸을 굽혔다.

눈물 젖은 얼굴을 손등 위에 가져다 대며 오래도록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절을 했다.

바랄 수 있다면.

“다음에는 절대 이런 슬픔을 안겨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내세에 한 번만 더 제 부모님이 되어 주십시오.”

더없이 염치없는 말이라 해도. 그래도 또 보고 싶으니까. 한 번만 더 그분들의 얼굴을 뵙고 싶으니까.

다음에 다시 뵙게 되면 그땐 이런 슬픔 따위 결코 안겨 드리지 않을 테니까.

아이처럼 울음이 터져 나왔다.

“부디 몸 건강히. 잘…… 지내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딸은 제 원신을 스스로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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