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적으로 말의 내용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공 원로가 흔들리는 눈을 한 채 물었다.
“제, 딸 아이를, ……깨워 주신다고요?”
귀가 의심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딸 아이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 십수 년이 지났다.
꺼져가는 생명을 억지로 부여잡고 있는 것마저 가책이 느껴지게 되는 시간이었건만.
그게 가능하다고?
“그게, 그게 가능합니까?”
아무리 강한 영력이 있다 한들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원신이 파괴된 딸은 사실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었고, 오랜 시간에 걸쳐 깎여 나간 생명력 역시도 이젠 딸의 가느다란 숨만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럼에도…….
안 될 거라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속에서 미약한 희망이 피어올랐다.
동굴 안에서 이 주가 아가씨는 벌써 대단한 치유력을 보여 주지 않았던가.
또 그녀가 검무를 추며 보여 준 두려울 정도로 거대했던 힘의 실체가 떠올랐다.
절망을 가르는 한 줄기 희망이 영공 원로의 입술을 떨리게 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일단 제가 따님을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그, 그럼요. 그럼요!”
그가 허겁지겁 딸이 머무는 백석저의 내실을 향해 앞장섰다.
어둡게 이어진 그 복도를 걷는 동안 어찌나 많은 생각이 들던지.
영공 원로는 제가 지금 걸음을 제대로 걷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여기입니다.”
한 방 앞에 도착해 그가 앞서 문을 열었다.
막 떠날 준비를 마친 터라 너른 방 안이 제법 어수선했다.
초의 그림자가 너울지는 방안을 보던 세화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바싹 말라 늘어진 여인의 손목을 세화가 조심히 잡아 들어 올렸다.
파앗!
너른 방 안을 비추는 초의 불빛이 가려질 정도로.
심해처럼 새파랗고 술처럼 농밀한 장가의 영력이 세화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짙푸른 영력이 맞닿은 부위를 통해 스며 들어갔다.
호수 표면처럼 너울대던 영력은 영공 원로의 여식에게로 폭포와도 같이 쏟아져 내렸다.
“…….”
영공 원로가 그 장면을 숨도 쉬지 못한 채 바라보았다.
방 안을 지배한 푸른 빛은 점점 타오르듯 세차게 제 몸을 밝혔다.
그 이상 현상에 사용인들까지 하나둘씩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몰려드는 인파 사이에는 백기하와 백만용도 있었다.
그 인파를 모두 불러모을 때까지도 푸르른 영력이 여인의 몸을 감싸며 타올랐다.
그러나 한참이 지난 후 푸른 영력의 빛이 사그라들 때까지도.
죽은 듯 누워 있는 여인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
만 마디 말들이 영공의 입속을 맴돌았다.
혹 세화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기라도 할까 봐 그는 간신히 그것들을 혀끝에서 잡아 삼키는 중이었다.
“음-.”
세화의 입술 사이로 어느 순간 낮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안 되는 거구나.
이를 악문 영공의 고개가 아래로 꺾였다.
손톱이 손등을 파고들도록 있는 힘껏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는 것도 이제야 발견하였다.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이미 오래전 장가의 가주에게 원신이 파괴된 이를 치료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듣지 않았던가.
제 초조함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 손을 소매 사이로 감췄다.
그리고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이미 저 아이는 하늘에 더 가까워져 누가 와도 살리지 못했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려 할 때였다.
“음……. 영공 원로께서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세화가 고개를 나직이 옆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손자분의 기력이 너무 많이 약해져 둘을 모두 안전히 회복시키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할 듯하니까요.”
“……?”
그 방 안에 있던 이들 모두가 이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저게 무슨 말이지? 손자라니.
원신이 파괴된 이의 배 속에 어떻게 아이가 남아 있을 수 있어?
방 안이 조용해지자 영공 원로 역시 다시 한번 제 귀를 의심하며 눈을 깜빡였다.
“손자? 지금 딸아이의 배 속에 제 손자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네. 하니 살리려면 둘 모두를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영공 원로를 포함해 이야기 듣던 이들이 모두 숨을 삼켰다.
* * *
세화가 영공을 제 곁으로 부르자,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백기하가 황급히 다가왔다.
“내가 할까?”
“괜찮아요. 내가 해야 해요.”
“나도 도울게.”
“괜찮아요. 이번 일은 원로 어른과 할게요.”
“…….”
“당신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에요. 이번 일에서만큼은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알죠?”
“아-. 그래. 알지.”
“조금만 기다려 줘요, 네?”
“…….”
풀 죽은 백기하의 눈꼬리가 아래로 조금 쳐졌다.
‘……지금 내 눈앞에 계시는 분이 정말 우리 가주가 맞으신가.’
‘분명 가주가 맞으신 것 같긴 한데. 우, 우리가 이런 것을 보아도 되나.’
미소조차 지은 적이 거의 없으셨던 가주가 아닌가.
그런 가주의 믿기지 않는 모습을 목격한 이들의 시선이 방황하며 흔들렸다.
“몸조심하고 빨리 돌아와야 해.”
“그럴게요.”
걱정이 잔뜩 스며든 그 목소리에 세화가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곧장 영공 원로의 손을 잡았다.
그간 딸의 생명을 유지해 왔던 것이 영공 원로의 영력이었기에 이 노원로의 영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눈을 감으세요. 혹 무엇을 보게 되더라도 놀라지 말고 영력을 운용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말에 영공 원로가 마른침을 삼켰다.
무얼 보게 될 거라니. 대체 뭘 본다는 거지?
하지만 되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 일을 위해 영공 원로는 제가 뱉어 냈던 영단들을 다시 모두 삼켜야 했다.
그리고 그 힘들이 몸에 자리를 잡자마자 조금의 여유도 남기지 않고 세차게 영력을 끌어 올렸다.
새하얗게 빛나는 영공 원로의 영력이 잡은 손을 통해 세화에게 전해졌다.
물처럼 부드러운 푸른 빛이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처럼 세화의 몸에서도 퍼져 나오던 순간이었다.
영공 원로의 의식이 고꾸라지며 저 어둠 속 어딘가로 떨어져 내렸다.
“……!!”
눈을 떠 보니 그는 이상한 곳에 있었다.
어느 대로의 한가운데인 듯, 길을 걷는 행인들과 마차가 즐비했다.
이게 뭐지? 그는 백가의 저택에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런 곳에 오게 된 거지?
“따님의 과거 속에 와 있는 겁니다.”
“!”
불현듯 나타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원로가 뒤를 돌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세화가 어느 곳을 향해 턱짓했다.
그곳엔 행복한 얼굴을 한 채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는 딸의 모습이 있었다.
“그간 아가씨의 생명을 유지해 온 것이 영공 원로의 영력이었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 영력들을 모두 빼내야만 아가씨의 생명력을 다시 채워 놓을 수 있습니다. 약해진 아가씨의 체력으로는 제 몸에 들어온 타인의 영력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시킬 수 없으니까요.”
“하, 하면 지금 이런 환영이 보이는 것이 딸의 몸에 머물러 있던 제 영력이 돌아오며 생기는 현상입니까?”
“그렇습니다. 영력을 모두 돌려받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니 잠시 지켜보시지요.”
“네. ……네.”
영공 원로는 그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광경이 지금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딸의 과거를 투영한 환영이라는 것을 알고 표정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러다 다시 눈매가 단단해졌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딸의 과거를 보아야 한다면 혼인하여 주가로 넘어갔던 그 아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딸과 함께 걷고 있는 사내는 자신의 사위였던 자였다.
지금의 그들은 제법 행복해 보였다.
무거운 짐은 서로 들어주려 하고 있었고 주고받는 시선 역시도 몹시 따뜻하기만 했다.
“그때는 그리 사랑했지요. 하지만 결국 마음은 변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딸의 어깨를 감싸 안는 사위의 모습은 영공 원로에게 그리 매몰찬 답변을 되돌렸던 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영공 원로가 제 눈앞을 지나는 딸아이의 환영을 홀린 듯이 뒤따랐다.
한데 그런 그의 발걸음을 세화의 목소리가 잡았다.
“저길 보세요.”
그곳엔 고급스러운 마차가 멈춰 서 있었다.
창을 가린 천이 조금 들어 올려져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그 사이를 통과해 딸아이의 등 뒤에 닿고 있었다.
하나 오래지 않았다.
가는 손은 천을 다시 내렸고 창이 가려진 마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출발했다.
그런 그의 눈앞에서 갑자기 딸의 모습이 사라졌다.
주변의 광경도 마치 덧창을 닫은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어둠 속에서 갑자기 사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