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254)

숙주를 잃어버린 영력은 공기 중으로 안개처럼 흩어졌다.

투욱.

한 줌 핏물이 되어 버린 제유 원로의 흔적만이 허공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것을 목격한 제문주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새파랗게 질린 채 몸을 떨었다.

“마, 맙소사.”

……이런 거라고는.

이 작은 문양이 이런 일을 할 줄 알았다면 결코 제 살에 저 문양을 새겨 넣지 않았을 것이다.

입술을 덜덜 떨던 제문주가 백기하를 향해 고두했다.

“가, 가주. 살, 살려 주십시오. 전. 전-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허나 아무도 그 말에 대꾸해 주는 이가 없었다.

“원로. 영공 원로 어른. 제가 얼마나 어른을 잘 모셨습니까. 살,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얼굴이 빨개지도록 입술을 깨문 그녀가 영공 원로를 향해 무릎으로 기어가며 흐느꼈다.

“저는, 저는 아닙니다. 저는 정말 시키는 대로 했을 뿌, 뿐이에요. 제유 원로가, 따, 따님을 그렇게 만, 만들었을 때도, 저, 저는-.”

“……뭐라?”

제유 원로의 처참한 죽음에 잠시 굳어져 있던 영공 원로가 제가 들은 이상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며 되물었다.

“제유 원로가 뭘, 했다고? 내 딸?”

“말, 말하겠습니다. 뭐든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살려 주십시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제 몸에 남은 저 문양을 없앨 방도를 제발 알려 주십시오!”

“문양이, 있어? 너도?”

다른 이들의 앞에서는 결코 몸수색을 받을 수 없다 소리치던 제문주가 이번만큼은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제 소매를 찢어 내렸다.

다갈색의 건강한 피부가 모두의 앞에 그대로 노출됐다.

“여기, ……여기 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어깨에서 등으로 넘어가는 곳에 찍힌 작은 문양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 * *

하얀 달이 높이 솟아오른 깊은 밤이었다.

가을밤의 풀벌레 소리가 열린 창 안으로 요란하게 흘러들었다.

하지만 영공 원로는 그 모든 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내실의 의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런 원로에게 다가와 조용히 고했다.

“원, 원로 어른.”

“응? 아. 그래. 짐을 다 꾸린 것이냐.”

“……네.”

“그래. 늦은 밤까지 수고 많았다. 그만 물러가거라.”

“저, 정말 낙향하시려는 겁니까?”

“…….”

“정말 떠나시려고요?”

시녀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원로가 지친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그런 그의 얼굴 위로 짙은 피로가 엿보였다.

그건 또 하나의 문양을 가진 제문주를 무사들이 백석저의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간 이후의 일이었다.

제문주에게서 그간의 모든 정황을 듣고 난 영공 원로는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어 비틀거렸다.

‘내 딸을 그리 만든 범인과 지금껏 호형호제하며 지내 왔었던 거라니.’

부인도 잘못되고 하나밖에 없는 딸은 십 년이 넘도록 눈 한 번 뜨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너무나 황당했다.

딸이 혹 위독해지면 자신이 수석원로 자리를 고사할 거라 생각해서?

내 딸을 그렇게 만든 것이 그리 이를 갈 듯 원망해 왔던 주가가 아니라 백경윤이였다고?

그 자리가 뭐라고. 대체 뭐라고.

양보해 달라고 해도 그리하였을 텐데.

자기가 열심히 해 보겠다고, 한번 믿어 봐 주면 안 되냐고 물었다면 기꺼이 그러라고 했을 텐데.

떨리도록 이를 악문 영공 원로가 피가 나올 정도로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던 것이다.

허나.

‘……나는 그놈을 원망할 자격도 없다. 나도 똑같은 놈이니까.’

그가 받은 충격은 충격이고 그에겐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이미 백가의 중심에서 배신자를 발견한 가주의 충격이 얼마나 클지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지금. 다른 때가 아닌 바로 지금.

단단한 표정으로 뭔가를 결심해낸 영공 원로가 어수선한 이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제문주와 제유 원로가 꿇어앉았던 그 자리에 털썩, 똑같이 무릎을 꿇었다.

이를 악물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의 세 번째 죄인이 가주께 죄를 청하나이다!”

“!”

“영, 영공 원로 어른?!”

“원로 어른. 왜 이러십니까!”

“너희들은 모두 비키거라!”

손짓으로 제게 다가오는 이들을 물린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가주께 고합니다. 오늘 아침 비열한 환족 하나가 감히 가주를 속이고, 말 같지 않은 이유를 들어 억지 시찰을 요청드렸습니다. 육문의 단합과 회의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 시기에 감히 천금 같은 수장을 시간을 빼앗고 분열을 야기하며 일을 망치려 한 것과 다르지 않으니, 이것이 저의 첫 번째 죄입니다.”

“……원로 어른.”

“두 번째 죄는 감히 백가의 수석원로 자리에 앉은 자가 삿된 것의 봉인을 풀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주가 아가씨를 절대로 가모 자리에 오르시게 두지 않겠다는 악의적인 의도만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이는 결코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중죄입니다.”

“…….”

“셋째는 그런 일에 제 명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이들을 강제로 동원했다는 점입니다. 하여 저들이 원치 않는 일을 수행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저들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하여. 무슨 벌을 받겠다는 겁니까.”

“허락해 주신다면 가진 영력과 재산을 모두 내어놓고 딸을 데리고 낙향하겠습니다.”

“!”

그 대답에 공터가 온통 술렁였다.

“지금은 원로께서 언급하신 대로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런 때에 수석원로라는 분이 낙향을 청해도 되는 겁니까?”

백기하가 그리 묻던 순간이었다.

고개를 들어 세화를 한 번 바라본 영공 원로가 세화를 향해 깊게 머리를 숙였다.

그도 모자라 땅에 이마를 대며 고두했다.

“!!”

“원, 원로 어른!”

“이 많은 이들을 모두 저승길에 밀어 넣으며, 백번을 고쳐 죽어도 다 갚지 못할 죄를 지을 뻔한 저를 아가씨께서 구해 주시었습니다.”

“…….”

“편협한 아집에 사로잡혀 있던 제 목숨마저도 살려 주시고, 좁은 시야를 깨워 주시고, 도와주시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었는지를 아가씨를 보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

“아가씨 같은 분께서 가주의 옆에 머물러 주시는 것이 우리 백가에 얼마나 큰 행운인지 이제는 모를 수가 없습니다. 늦었지만 이제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는 반드시 목숨으로 갚을 것입니다!”

그 말에 영공 원로를 바라보고 있던 단장이 턱을 단단히 굳혔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영공 원로와 똑같이 세화를 향해 고두했다.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는 반드시 목숨으로 갚으며 충심으로 모실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무사들과 사용인들 역시도 무릎을 꿇었다.

세화를 향해 고두하며 한목소리로 외쳤다.

“목숨을 구해 주신 은혜는 반드시 목숨으로 갚으며 충심으로 모실 것입니다!”

모두가 세화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이 내는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읽어내며 영공이 가슴 안쪽에서 덧붙였다.

‘그러니 부디 가주를, 우리 가주를 잘 부탁드립니다.’

백가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래도록 전시상황을 겪고 있었다.

하여 언제 목숨이 위태로워질지 몰라 후임의 준비를 단단히 해둔 편이었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리하여 이 밤, 영공 원로가 백석저를 떠나려 할 때는 조금의 주저도 필요가 없었다.

“으읏!”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영공 원로의 몸이 일순간 휘청였다.

그는 제가 한 말을 지키고자 오후까지 조금의 여지도 남겨 두지 않고 영단으로 만들어 영력을 빼낸 것이다.

‘차라리 잘되었을지도 모른다.’

억지로 딸아이를 잡아 두고 있는 것도 이제 그만해야 할까 고민하지 않았던가.

영력이 없으니 더 이상 딸 아이의 숨을 부여잡고 있을 수도 없을 테니.

한적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딸아이와 함께 먼저 간 부인을 만나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원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방문 밖에서 들려왔다.

주가 아가씨의 목소리였다.

“원로. 아니 계신 겁니까?”

“아, 아닙니다. 아가씨. 지금 문을 열겠습니다.”

식사도 거른 채 시간이 가는 것도 몰랐던 그였으나 저 목소리만은 못 들을 수가 없었다.

황급히 문으로 다가간 그가 창호 문을 열자 세화와 세 자매가 어두운 복도에 작은 등불을 든 채 서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방금 원로께서 짐을 모두 꾸리셨다는 전언을 전해 들어서요.”

“……모든 것을 놓고 가겠다고 하고선 부끄럽습니다. 의식 잃은 여식을 옮길 때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챙기라 하였습니다.”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정말 떠나시려는 겁니까?”

“아가씨껜 참 면목이 없습니다. 허나 저는 제 딸의 원수이기도 한 혈족의 배신자를 동생으로 맞아 그의 의견에 휘둘려 사람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이가 아닙니까.”

영공 원로가 부끄러움을 아는 시선을 내리깔며 덧붙였다.

“그것도 수석원로라는 자가 제 아집에 사로잡혀 그런 일을 벌였으니-. 저 같은 이는 아가씨의 곁에 없는 편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겸양하여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

영공 원로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백가를,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

세화가 더없이 정중한 태도로 제게 인사를 거듭하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뭐. 그럼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저도 그리 야박한 사람이 아니라서. 원로께 이별 선물을 하나 드리고 싶군요.”

“예? 아닙니다. 딸아이에 대한 물품들을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그리 거절하실 게 아니니 일단 따님께로 절 데려다주시지요. 하시고 싶은 말씀은 그 이후에 하셔도 상관없으니 말입니다.”

“네? 딸, 제 여식을 보시겠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아까 듣기로 너무 오래 주무시고 계시다던데, 이젠 그만 깨어나셔야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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