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155/254)

쿵!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모두가 깜짝 놀랐으나 당황한 건 새로 합류한 일행들뿐이었다.

결계에 함께 빠졌다 돌아온 이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가장 먼저 말에서 뛰어내린 단장이 낙마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제유 원로의 팔을 뒤로 꺾고는 가지고 있던 줄로 단단히 묶어 버렸다.

“……이, 이게 대체. 다, 단장! 원로!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백기하도 재상도 이번 일만큼은 따로 언질 받은 바가 없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빠르게 판단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러던 중 세화가 말에서 내렸다.

세 자매에게 화살 하나를 받아든 그녀가 단장이 누르고 있는 제유 원로에게 다가갔다.

예리한 시선으로 제유 원로를 훑어 내리던 그녀는, 이내 영력을 담은 화살의 깃대를 잡은 후 촉 부분을 원로의 의복에 대고 옆으로 한 뼘 정도 그어 내렸다.

스윽!

피부를 손상시키지 않은 채 깔끔하게 잘라 낸 의복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순간이었다.

“!!”

“저건!”

백기하와 재상의 눈이 잔뜩 크게 뜨였다.

단번에 뛰어나온 백만용이 한 뼘가량 벌려진 의복을 찢었다.

찌이익-!

옷 안엔 몇 겹이나 되는 붕대가 단단히 묶여 있었으나 의복과 함께 갈라진 그 사이엔 상처가 아닌 다른 것이 있었다.

빛 속에서 더욱 확실히 드러난 선명한 원형 문장.

신영의 인장이었다.

“너…….”

제유 원로의 멱살을 잡아챈 백만용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미친 새끼. 감히 백가의 원로라는 자가 주가 신영의 문장을 달고 나타나?!”

“!”

백만용의 흉흉해진 기세에 놀란 표정을 짓던 단장이 신영의 인장이라는 말에 경악했다.

“이, 이게 신영의 인장이란 말입니까?”

제문주의 행동을 이제껏 이상하게 여기고 있던 이들도 비로소 상황을 이해했다.

“……주가의 짓이었었군요.”

그 사이에서 영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다가 제 자매들에게 입이 틀어막혔다.

“하하. 역시 우리 아가씨의 통찰력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읍읍!”

* * *

단번에 취조장이 꾸려졌다.

백가의 무사들이 둘러싼 가운데 제유 원로와 제문주가 꿇어 앉혀졌다.

“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신, 신영의 인장이라뇨. 그런 게 제 몸에 찍혀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

“어찌 다들 아무런 말씀들이 없으십니까. 가주! 재상! 이것이 오해가 아니라면 분명 누군가의 음해로 일어난 일일 겁니다.”

중년의 남자가 저를 보는 흉흉한 시선들을 마주하며 호소했다.

“제가 그간 백가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 왔는지 모르지 않으시면서, 어찌 이런 상황에 따로 조사도 해 보시지 않고 저를 죄인으로 단정 지으려 하시는 겁니까.”

제유 원로의 떨리는 목소리는 정말로 죄가 없는데 꿇어 앉혀진 것만 같은 억울함이 깊게 배어 있었다.

소동에 정신이 든 제문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들 제 과거를 아시지 않습니까. 잔혹한 주가의 횡포 아래에서 간신히 비참하게 명줄만 잡고 있다가 살고자 백가로 넘어온 제가. 혹 이 천국 같은 곳에서 쫓겨나게 되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마음 졸이며 살았는데.”

제문주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어찌 이리 오해를 풀 시간도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대체 정신을 잃은 제게 무슨 짓을 하셨길래 제가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것입니까.”

“나는 너와 했던 약조를 모두 지켰건만 아직도 그런 말을 하다니.”

세화가 느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제문주를 향해 말했다.

“네가 동의한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여 너의 몸에서 결국 해독제를 찾아냈지. 그 과정에서 아직도 오해가 있다 주장하고 싶은 것이냐?”

“그렇다!”

제문주의 대답을 가로챈 것은 제유 원로였다.

“내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대강 짐작이 가는구나! 어제 있었던 차 소동의 원한을 네가 이런 식으로 갚는 것 아니냐!”

당장 세화의 곁에 있던 세 자매가 나서려는 것을 세화가 손을 움직여 막았다.

입매를 일그러뜨린 제유 원로가 세화를 향해 소리쳤다.

“과연 은(恩)은 바람에 새기고 원(怨)은 뼈에 새긴다는 주씨 혈통답구나. 눈에 거슬리는 것은 즉각 치워 버려야 성이 찬다지?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 죄 없는 이들을 핍박하고 가문의 충신들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것이냐! 어찌!”

“제유 원로! 신영의 문장을 달고 나타난 주제에 가모님에게 모함을 받았다 뒤집어씌우려 하면 그게 될 줄 아는 겁니까!”

백가 재상 백만용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뭔가 오해가 있을 거라 신중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도 신영의 인장이 발견되기 전까지라는 걸 모르는 겁니까? 백가의 원로라는 자가 그 인장을 몸에 새긴 이상 어떤 말과 변명도 가치 없어진다는 걸 모르는 겁니까?”

“저…….”

노성들이 이어지는 것을 들으며 제유 원로를 따르는 무사 하나가 조용히 물었다.

“재상, 한데 그 신영의 인장이란 것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무엇이기에 이리 저희 원로를 곧바로 범인 취급하시는 것인지.”

“모든 것을 주가 신영에게 바친 노예라는 뜻이지요.”

“……네?!”

분노한 백만용을 턱을 미세하게 까딱이는 것으로 뒤로 물린 세화가 평온히 입을 열었다.

“제유 원로라 하셨습니까.”

“그렇다! 너 이 계집! 내가 이대로 순순히 네 꾀에 당할 줄-.”

“원로의 의지와 결심엔 내 그닥 관심이 없고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세화가 느른하게 덧붙였다.

“뭐 어쨌든 내가 여기 있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긴 합니다. 그러니 원로도 같이 들으세요.”

“뭐야?! 가주! 가주, 어찌 이 어린 년이 남의 영역을 제집처럼 갈아엎고 있는데도 두고 보기만 하시는 겁니까. 백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런 년이-.”

“전쟁이 막 끝난 직후이니 한 달은 조금 넘었고 두 달은 조금 못 되었던 어느 날이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주가의 소가주를 육문의 인질로 잡아 두기 위해 공표문을 주가로 보내던 때였지요.”

세화의 목소리는 높지도 크지도 않았지만 정확한 순간 제유 원로의 말 빈 곳을 찾아들어 갔기에 그녀의 음성을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공표문을 들고 주가 영역에 들어서긴 했지만 주씨들이 전쟁의 승패에 불복해 보복을 하진 않을까 두려우셨을 겁니다. 한데 막상 주가에 도착해 보니 대접도 그리 극진한 대접이 없었죠.”

“……그, 그건.”

“주가가 오래도록 누려 온 향락의 방식 역시도 원로를 개안하게 했을 겁니다. 한데 더 놀라운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다음날 신영이 친히 원로를 뵙고자 했을 테니까요.”

“…….”

“그 이후 고독을 심고 문양을 새겨 넣었을 것이 분명하긴 한데. 대체 무슨 대화가 오고 갔을까. 신영이 무엇을 약속하더이까. 혹 영공 원로 어른을 제거하여 수석 원로를 만들어 주겠다 했습니까?”

“…….”

“아니면 또 뭐가 있을까. 원로의 가족관계는 어찌 됩니까.”

백만용이 냉큼 대답했다.

“혼기가 찬 여식이 한 명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딸을 가모로 만들어 주겠다 약속이라도 했습니까?”

“…….”

제유 원로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뻐끔거렸다.

그걸 대체 어떻게 다 알았냐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읽어 낸 것이 그녀만은 아니었다.

세화의 말을 듣고 있던 단장을 비롯해 휘하 백가 무사들 역시도 그 표정에서 제유 원로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들었다.

백가 재상과 시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취조장 안의 공기가 단번에 서늘해졌다.

“아, 아니. 다들 저 말을 믿는……. 지금 저 말을 믿는다는 겁니까?”

한발 늦게 그 시선들을 알아챈 제유 원로가 그리 변명했으나 더 이상 그의 말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유 원로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제가 주가의 저택에 가긴 했었으나 어디까지나 공무였고 신영은 만난 적도 없습니다. 이런 문양 따위 분명 누군가가 임의로-.”

“그럼 직접 인장을 지우시면 되겠군요.”

백만용이 더없이 낮은 어조로 그리 말했다.

단장 역시도 그 말에 동조했다.

“맞습니다. 그 문양을 스스로 지우시기만 한다면야 어찌 믿지 못하겠습니까.”

“아, 아니. 너희…….”

제문주 역시도 이쯤 되자 항변하던 것을 멈추고 숨죽이고 있었다.

제유 원로의 흔들리는 시선이 주위를 살폈으나 그의 편을 드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주가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사용인들의 시선도. 무사들의 시선도. 백가 재상의 시선도.

백기하의 시선마저도 흔들림 없이 저를 향하는 것을 확인한 제유 원로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이까짓 작은 흔적이 대체 뭐라고. 대체 이깟 게 뭐라고 너희까지 나를-.”

“못 하시겠지요. 왜냐하면 이미 시도해 봤었을 테니까.”

“……!!”

입꼬리를 끌어 올린 세화가 원로의 모습을 보며 덧붙였다.

“붕대로 그리 꽁꽁 가리고 다녔을 정도라면 인장을 지우려는 시도쯤이야 이미 몇 번, 아니, 몇십 번이라도 해 봤겠지요. 하지만 안 됐겠지요. 그건 원래가 그런 것이니까.”

“너, 너 이년, 너 내가 너를 가만둘 줄-.”

“백경윤!!”

쾅!

노성을 내지른 백기하가 팔걸이를 내리쳤다.

“나를 더 이상 시험하지 마라. 내가 진짜 신영의 인장과 누군가 만들어 낸 가짜 인장도 구별하지 못할 이로 보이는가?!”

“!”

“이미 기회는 충분하였다.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간 내게서 조금의 자비도 기대하지 말아야 할 거다!!”

“가, 가주.”

“그러니 어서 입을 열어! 주가 신영에게 뭘 약속받았나. 어디까지 혈족을 팔아넘겼어!”

“아, 아닙니다, 가주. 그것은 정말 아닙니다.”

제유 원로가 땅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변명했다.

“제가 어찌 혈족을 주가에 넘기겠습니까. 주가와 얼마나 힘들게 다퉈 지금의 위치를 얻어 냈는지 알면서 제가 어찌 감히요. 그러니까 이 문양은……. 이 문양은 그러니까 제가 주가 저택에 들렀던 그 밤 신영이 저를 불러…….”

제유 원로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그리고는 가슴 아랫부분을 더듬거리며 부여잡았다.

“……시, 신영이 그날 밤 알현실로. 알, 현실.”

“제유 원로.”

무언가를 깨달은 듯 겁에 질려 눈을 굴리던 그는 순식간에 낯빛이 희게 질려선 백기하에게 무릎걸음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가주. 사, 으윽, 살려……. 사, 살려…….”

“……?!”

제유 원로의 목소리가 끊어지자 백만용이 소리쳤다.

“제유 원로! 이렇게 생각할 시간을 버나 본데 그런다고-.”

“아, 안 돼, 으, 이, 이건…….”

비지땀을 줄줄 흘리던 제유 원로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가 다시 검게 변해 갔다.

그리곤 순식간에 동공이 빛을 잃었다.

“크윽…….”

“?”

“흑. 으윽. 큭.”

마치 갑자기 장이 끊어지기라도 하듯 제 배를 감싸 안은 제유 원로가 그대로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 순간이었다.

“!!”

“!”

원로의 피부 위에 드러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문양이었다.

하나 그 작은 문양에서 믿기 힘들 만큼 거대한 영력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고목의 뿌리처럼 촘촘하게 갈라진 영력들이 한순간에 제유 원로를 집어삼켰다.

“아아악!”

마치 불꽃처럼 이는 영력에, 제유 원로가 산 채로 불태워지는 사람처럼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원로!”

“제유 원로!”

백기하가 제유 원로에게 손을 뻗었을 땐, 이미 단말마만을 남긴 제유 원로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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