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4화 (154/254)

* * *

붉디붉은 빛 속에서 검은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가라앉길 반복했다.

마치 불꽃을 처음 만들어 낸 창조주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인은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붉은 빛을 제 검 위에서 가지고 놀았다.

세화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그녀를 둘러싼 영력이 춤을 추듯 요동쳤다.

“맙소사.”

누군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그 경탄은 한 사람의 것이기도 했고 모두의 것이기도 했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제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의복을 장식한 금빛 자수가 불꽃 속에서 마치 암석을 타고 흐르는 용암처럼 빛났다.

검이 든 팔이 물에 뜬 듯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놀랍도록 가는 허리선이 드러났다.

디링- 디리링-

거대한 영력이 결계를 진동시킬 때면 물이 가득 찬 유리잔을 두드릴 때처럼 아슬아슬한 소리가 음악처럼 이어졌다.

세화의 몸을 둘러싼 불꽃은 홀로 살아 있는 것처럼 당장이라도 하늘로 비상하고 싶은 듯했다.

새하얀 검신이 치솟는 영력을 담으며 봉화처럼 타올랐다.

그럴수록 검에 담긴 힘과 그들을 잡아 가둔 결계가 서로에게 더욱 강하게 반발하며, 공동을 가득 메운 신비스러운 소리가 점점 더 빠르게 음률을 바꿔 갔다.

그 너울거리는 황혼을 등에 업고, 소매가 넓은 붉은 의상이 한 번씩 새처럼 날아오를 때마다.

모두가 작은 움직임마저 놓치기라도 할까 봐 숨조차 쉬지 못하며 그 광경을 응시했다.

거대한 존재감으로 공동을 채운 한 여인의 검무에 완벽히 매료되었다.

두려울 정도로 압도적인 영력이었다.

그러면서도 넋이 나갈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세화의 이마 위에도 땀이 맺혀 흘렀다.

잡탕처럼 뒤섞인 힘의 호수 안에서 한 가지 종류의 영력만을 계속해서 빼내는 것은 생각보다 더 쉽지 않았다.

허나 그래도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영력을 분리하는 동안 빛의 폭포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한순간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신호였다.

과실주처럼 농밀한 영력이 주씨 혈족 본래의 기운을 회복했다.

주가를 천 년 동안 지배해 왔던 불꽃의 영력이 이 순간 재현되었다.

화르륵!

새빨간 홍염이 공동을 가득 메웠다.

지독히도 강렬한 화마의 폭풍. 눈을 뜰 수 없도록 만드는 불꽃의 비말들.

그 모든 것이 거대한 공동 안에서 뒤엉키던 그 순간 너른 공동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허공이 일자로 갈라지고 난 곳에 나타난 샛노란 눈과 세화가 눈을 맞췄다.

용암처럼 이글대는 영력을 몸에 두른 채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한 번.

쩌엉―!

커다란 파열음이 귀를 울렸다.

“――!”

세화를 제외한 모두가 제 귀를 누르며 충격을 견뎌 냈다.

두 번.

쩌엉!

세 번.

쩌엉―!!

소리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거대한 불꽃 폭풍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쓸어 내며 위로 솟았다.

―――――――!!

굉음이 터지며 온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강력한 영력풍이 휘몰아쳐 영공 원로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제 얼굴을 가리며 눈을 감았다.

이윽고 고요해진 주변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땐 주변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뭐, 뭐지?”

느른한 오후의 햇빛이 가림막 없이 그들을 향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발밑에선 계절을 맞아 붉게 변한 낙엽들이 바스락댔다.

“……이, 이게 대체.”

“사당, 멀쩡하죠?”

맑은 목소리를 따라 돌아본 곳에는 새하얀 사당이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서 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땅밑으로 떨어지지도 않았고, 그 모든 소동과 재난이 전부 결계의 일환이었던 것이었다.

그들의 얼떨떨한 반응을 보면서도 전혀 동요치 않은 세화가 변함없이 무심한 태도로 “가시죠.”라고 한마디 했다.

영무가 서둘러 제 아가씨의 뒤로 붙으며 사람들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것 보세요. 아가씨의 말씀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다니까요.”

* * *

진한 사기에 놀랐던 말들 역시 나무들 주변에 그대로 모여 있었다.

모두가 조용히 말에 오른 후, 앞서가는 세화를 천천히 뒤따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무도 말이 없었다.

말발굽 소리만 사박사박 울리는 사이로 시선들만 요란하게 세화의 등 뒤를 향해 날았다.

그 시선들 중에 영공 원로의 것도 있었다.

단단한 백기하의 목소리가 영공 원로의 기억을 건드렸다.

“원로께서도 내 말을 명심하셨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내가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

영공 원로는 백기하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켜봐 왔었다.

그만큼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원신을 두텁게 보호한 영력은 어린 나이에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농밀하였고, 활용 역시도 노련한 원로들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자신의 어깨에도 미치지 않는 어린아이가 어느 날 봉인이 깨져 달아난 삿된 것의 목을 영력만으로 부러뜨리는 것을 보며 얼마나 놀랐던가.

그 과정에서 목격한, 완벽하게 새하얀 백가 영력의 폭풍은 그를 단번에 매료시켰다.

주가의 오랜 폭정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그는 제 가주를 통해, 그가 보여 주는 한계 없는 능력을 통해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환계에서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헌데.

‘여기 지금 그날의 가주가 또 한 분 계시는구나.’

영공 원로가 그간 보아 왔던 주가의 영력과는 조금 달랐다. 더 맑고 투명했으며 색이 옅었다.

하나 몰라볼 수 없는 주가 피의 정수가 그대로 녹아 있는 듯했다.

아까의 검무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 아가씨는 그의 가주와 동류였다.

무거운 짐을 여린 어깨에 짊어지고, 소중한 이를 위해서라면 제 살을 깎아 내도 웃을 수 있는.

‘그래서 이 아가씨에게 끌리시었나.’

아무리 그들이 가주를 전심으로 보필한대도 그들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많은 고충이 백기하의 어깨 위에 얹혀 있을 것이다.

물론 영공 원로를 포함하여 백가의 식솔들은 언제나 그런 짐들을 나눠 들 의지가 있었다.

하나.

‘땅 위에서 볼 수 있는 수평선과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수평선이 결코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짐작하거나 마주 들어 드릴 수 없는 일들이 있겠지.’

그 짐을 이 아가씨는 이해했을 것이다.

저 위 높은 곳에서 같은 시야를 공유하며,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많은 일을 서로에게 나누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영공 원로는 이 순간 비로소 이해했다.

아마도 가주께선 이 아가씨의 존재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으셨을 거라고.

서로를 지극히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아가씨 역시 가주의 옆에 서기로 결정하셨을 거라고.

‘가주께 내 편협에 대해 사죄를 드려야겠구나.’

한숨을 내쉰 그와 일행들이 그렇게 백석저를 향해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길 끝에서 먼지가 일 정도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몇 마리의 전마가 그들을 향해 세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주세화!”

“가모님!”

‘백, 기하?’

그 자리에 멈춰선 세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왜 저 남자가 여기 있지?’

“다친 데는. 다친 데는 없어? 무사해?”

“당신 영공 지방에 간 거 아니었어요? 왜 여기 있어요?”

“지금 그게 문-.”

“영공 원로! 원로! 무사하십니까.”

“제유 원로!”

그때 새로 도착한 일행의 뒤에서 중년의 남자 하나가 황급히 튀어나왔다.

“이게 다 무슨 소동이란 말입니까. 무사들이 남겨 놓은 전언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모두가 무사한 겁니까? 영공 원로께서도 무사하신 거지요?”

그가 헐떡이는 숨을 가다듬지도 못한 채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입니다. 모두가 아무 일도 없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

“왜 그러십니까, 영공 원로?”

대답하지 않은 노인의 시선이 백기하와 해후를 나누는 세화에게 향했다.

세화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하여 그 찰나에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기억하세요. 범인은 사당에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고, 삿된 것들의 봉인을 만질 수 있는 권한도 있으며 결계의 생성이 자유로운 자라는 것을요.”

그게 이자가 맞느냐고. 그렇게 묻기도 전이었다.

세화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졌다.

영공 원로는 두 번 실수하지 않았다.

단번에 영력을 끌어 올린 그가 제게로 뻗어 오는 제유 원로의 손을 잡아 꺾었다.

“악!!”

그 상태에서 제유 원로가 타고 있던 말을 가슴을 강하게 걷어찼다.

“히히히힝!”

놀란 말이 앞으로 튀어 나가며 중년의 사내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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