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3화 (153/254)

세화의 목소리에 따라 둔탁한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때마다 보는 이들은 움찔움찔 몸을 떨거나 마른침을 삼키곤 했다.

약을 찾으려 한다는 의도가 거짓은 아니었던 듯 그들은 때린 곳을 또 때리지는 않았다.

온몸을 돌아가며 빈틈이 나오지 않게 쳤을 뿐이었다.

사실 그것이 더 괴롭다면 괴롭겠지만.

어쨌거나 빠진 곳 없이 온몸을 샅샅이 매타작당한 제문주가 의식을 잃을 무렵이었다.

결국,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백가 무사 하나가 제문주에게로 뛰어갔다.

“그만들 하십시오. 이러다 큰일 나겠습니다! 약이 있다 해도 보통 기름종이에 포장하니 이런다고 쉬이 찢어지진 않을 겁니다.”

무사가 혼절한 제문주의 앞을 막아섰다.

“괜한 염려를 하시는군요. 내가 그런 것도 모를 것 같습니까. 저 화살에 영력을 담은 이유가 무엇인데요. 몸에 내리쳐지는 순간 힘의 파동으로 종이를 찢어발기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무사의 결연한 모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세화가 자신의 시녀에게 턱짓했다.

“흔들어.”

“정신을 잃었습니다. 이만하면 그만……!”

“비키세요!”

영무가 백가 무사를 밀어낸 후 정신을 잃은 제문주의 몸을 일으켰다.

의복 아래로 약이 떨어질 수 있도록 영선과 함께 의식을 잃은 제문주의 몸을 한쪽씩 잡았다.

“아니 대체 범인으로 확정 나지도 않은 이에게 이게 무슨…….”

그런 영무와 영선을 막으며 무사가 제문주의 늘어진 소매를 잡아채던 순간이었다.

찌지직!

좌우로 팽팽하게 당겨진 소매에서 솔기가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혹여 여인의 살을 볼까 무사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발치로 하얀 가루가 파스스 떨어져 내렸다.

“……?!”

“!”

찢긴 옷깃 사이로 흰 가루가 허공에 번져 가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안개처럼 흩어지는 가루를 확인한 세화가 손을 내저어 영력으로 가루들을 한데 모았다.

어느 정도 양이 모이자 그것을 영공 원로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단장에게 내밀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일단 이거라도 먼저 드시게 하세요.”

그 이후로도 세화는 허공에 흩어지는 가루들을 한데 모아 영공 원로에게 전달했다.

흰 가루들을 닥치는 대로 입안으로 욱여넣고 얼마가 지났을까.

노인의 손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던 실선이 천천히 흐려져 갔다.

마비가 풀린 듯 손가락 역시도 나직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으, 윽.”

어느새 의식을 잃고 있던 원로의 입술 사이로 잠시 후 가느다란 신음이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그가 힘겹게 눈을 뜨자, 매타작을 단행했던 영무가 여전히 빛나는 화살을 어깨에 걸친 채 의기양양하게 턱짓했다.

“이것 보라니까요. 우리 아가씨께서 그러셨죠? 저 아이가 반드시 해독약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아가씨의 말씀은 틀린 적이 없다니까요.”

* * *

공동 안이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세화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빛이 노인의 몸을 감싸 안자 원로의 안색이 더더욱 편안해졌다.

자연스레 일어설 수도 있었고 팔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저 아이가 범인인지는 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가끔 그런 이들이 있지요. 눈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모르고.”

세화가 혼절해 축 늘어진 제문주를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진흙탕 같은 그 속내를 모르고 알고 지낸 시간이 관계의 전부인 양 방심하는 자들이.”

원로가 그녀를 바라보자 세화의 목소리가 무심하게 덧붙였다.

“제 얘깁니다.”

‘아, 이 얼굴을 정말 보고 싶었어.’

실제로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며 웃던 사연주의 모습을 제문주에게 겹쳐 보고 있었다.

그림자들이 사당을 부수려던 그 순간에 보게 된 것이다.

영공 원로가 원신을 파괴하며 그곳으로 달려가던 긴박한 순간.

그런 그를 보며 참지 못하고 입을 가린 손 위로 눈이 휘어지던 제문주의 모습을.

아무것도 모르고 주변인을 믿었던 제 이전의 상황과 그 장면이 겹쳐지자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미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감히 백기하 그 남자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망치려 한 이 여자와 배후를 세화는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을 반영하듯 세화의 곁으로 오색의 영력이 안개처럼 번져 나갔다.

적자줏빛 눈동자가 그 빛을 담고 시리게 빛났다.

직선으로 선 몸 역시도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위엄이 진하게 배어 보는 이의 무릎을 꿇게 만드는 위압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

영공 원로가 그런 세화의 모습을 보며 신음을 삼켰다.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이 모습도 모습이거니와.

어쨌거나 상황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빠르게 사태를 해결하는 결단력과 실행력에서 이 어린 환족 아가씨에게 탄복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단장의 말에 따르면 이 여자는 처음부터 의식을 잃은 제문주의 곁으로는 가지도 않았다고 했다.

모두를 치료해 줄 때도 딱 저 아이만 빼놓아 이상하다 여겼다고.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괜히 접촉하여 의심이 생기는 상황을 피하려 한 것 같다고.

‘가주께서 괜히 이 아가씨를 가모로 세우시려 했던 것이 아니구나.’

어느새 깍듯해진 태도로 세화의 앞에 선 영공 원로가 머리를 숙였다.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닙니다. 인사는 확실히-.”

“그게 아니라 인사는 최종 배후를 잡고 하시라는 말이에요.”

그 말에 영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문주 혼자 이런 일을 벌였을 리는 없었다. 분명 배후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배후가 아무것도 모를 때 되도록 빨리 처리하는 것이 좋을 테니 나가자마자 바로 손을 쓰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밖에서 누군가 이 결계를 풀어줄 테니 그때,”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세화가 하늘 위로 끝이 없어 보이는 캄캄한 결계를 응시하며 말했다.

“내가 이 결계를 깰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네?”

눈을 껌뻑이던 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결계를 깨시겠다고요? 허나 이 결계는 사당과 연결된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깨고 나면 여기에 봉인되어 있던 삿된 것들이 함께 깨어나게 될 텐데, 밖에서 올바른 해법으로 우리를 꺼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뇨.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이 결계는 이번 일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더군요. 부정한 것을 봉인하는 힘도 없는 데다가 크기도 작아요.”

“허면.”

“사당과 연결된 듯 느껴지겠지만 아마 눈속임일 겁니다. 그러니 기억하세요. 범인은 사당에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고, 삿된 것들의 봉인을 만질 수 있는 권한도 있으며 결계의 생성이 자유로운 자라는 것을요.”

“…….”

“어쨌거나 말씀드린 대로 그게 제일 급한 일이니 제게 인사하시는 건 그 이후여도 충분합니다.”

잠시 침묵하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영공 원로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그렇게 사안이 중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째서 바로 결계를 깨지 않는 거지? 깰 수 있다 했으면서?

하나 다행히 그걸 세화에게 묻기 전 빠르게 자각한 것이 하나 있었다.

단장에게 이미 듣지 않았던가.

처음 그들과 함께 떨어진 삿된 그림자들을 이 주가 아가씨가 어찌 소멸시켰는지.

그 이후 이 많은 인원을 어찌 치료했는지.

그 스스로가 계속 했던 말이 아닌가. 이제 막 탈피를 마친 어린 계집애라고.

한데 그런 어린 환족이 그들을 위해 벌써 이만큼의 힘을 발휘한 것이다.

‘나였다면 지금쯤 이미 온 얼굴이 식은땀으로 뒤덮인 채 격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겠지.’

하여 혹 더 이상의 질문마저도 이 아가씨가 재촉으로 느끼기라도 할까 봐.

그는 그들이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뭐든 말씀만 하시라는 짤막한 인사만 내놓고는 세화가 조금이라도 더 편히 쉴 수 있도록 물러갔다.

그런 세화가 몸을 일으킨 것은 그리 멀지 않은 때였다.

그녀는 지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강한 힘을 꺼내 놓다가 알게 된 어떤 증상을 몸 안에 영력을 돌리며 확인하는 중이었다.

“너는 그 힘을 사용할수록 너 자신을 잊게 될 것이다! 기억이 지워지고 몸이 사라지고! 종래에는 먼지로 변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너를 기억하는 이 또한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줄곧 두려웠다.

‘내가 사라지면 백기하 그 남자는 영원의 시간을 홀로 버텨 내야 할 텐데.’

그럼에도 교룡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영력을 사용해, 언젠가는 그 빛나는 폭포에 들어가야만 했다.

모든 게 뒤섞여 오색의 힘으로 번져 버린 그 빛 사이로 자신도 모든 걸 버리고 뛰어들어야 할 때가 분명히 올 거라는 사실이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한데.

‘……이상해. 만약 그렇게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만이 내 숙명이라면 어떤 능력을 사용하더라도 오색의 빛이 뿜어져 나와야 해.’

그녀는 계속 장가의 영력을 꺼내 쓰며 치유력을 발휘할 때마다 달빛 아래의 정원처럼 요요한 푸른 빛이 주변을 가득 메우는 현상을 경험했다.

삿된 그림자들을 없애기 위해 화살을 쏠 때 역시도 오색의 광채 대신 새하얀 백가의 소용돌이가 발밑에서 휘몰아쳤었다.

‘이게 어떤 열쇠인지도 몰라.’

몸을 일으킨 세화가 세 자매가 챙겼던 백가의 무사 중 한 명에게 검을 빌렸다.

묵직한 무게의 검을 이 아가씨께서 과연 드실 수 있을까. 무사가 걱정하며 제 검을 바쳤다.

하나 염려도 잠시, 세화가 가볍게 그것을 휘둘러 길이와 무게를 가늠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화의 손에 들린 철검은 마치 깃털을 든 듯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쥔 세화가 아무렇지 않게 결계의 가운데로 나아갔다.

세화의 힘으로 치료되어 무사들에게 포박당한 제문주도 함께였다.

넓은 공간에 홀로선 세화가 눈을 감았다.

‘장가의 힘도 분리해 꺼내 쓸 수 있었잖아? 백가의 힘도 꺼내 쓸 수 있었고.’

그렇다면.

“반드시 주가의 힘도 분리해 사용할 수 있겠지.”

그 가정을 시험해 보고자 하나의 영력을 골라 끌어 올렸다.

‘……흐으.’

원하는 일을 실행하는 데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허나 머지않아 신호가 잡혔다.

‘왔다!’

심장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익숙한 느낌의 영력이 밀려들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힘.

그녀를 가장 오랫동안 지켜 주었던 검붉은 영력은 다른 영력들의 영향을 뿌리치지 못하고 색이 흐려져 있었다.

‘그래도 괜찮아. 어서 와.’

허나 의지만은 맹렬하였다.

거대한 불꽃과 같은 붉은 영력이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그녀의 몸을 감쌌다.

화르륵!

세화의 몸이 세차게 타올랐다.

“……!”

“……헉.”

지켜보던 이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그때였다.

딩.

딩.

태양처럼 선명한 빛이 결계를 지탱하는 강한 힘과 맞부딪치며 마치 음악과 같은 진동 소리를 이끌어 냈다.

그것은 동트기 전 잎새에 고여 땅으로 흐르는 맑은 이슬이 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바람이 뒤흔들고 가는 나뭇잎 소리나 처마를 두들기는 소나기가 만들어 내는 음률 같기도 했다.

“……뭐, 뭐지?”

“무슨 소리지?”

눈을 의심하게 하는 세찬 영력의 발화를 경악에 가까운 눈빛으로 보고 있던 이들이 그 신비스러운 소리가 무엇인지 몰라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으로 마른침을 삼킬 때였다.

그 맑고 부드러운 소리들을 귀에 담으며 세화가 검을 일자로 들어 올렸다.

소매가 미끄러지며 투명할 정도로 하얗고 가는 손목이 드러났다.

작은 발끝이 땅에서 떨어지고 얇은 팔이 곡선을 그리며 위로 날았다.

“……아.”

누군가 그렇게 탄식했다.

모두가 그대로 숨을 멈추는 듯했다.

붉은 황혼이 흩뿌려진 공간 안에서 세화가 검을 든 채 부드럽게 움직였다.

검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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