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들은 이르게 정신을 차렸기에 이미 비슷한 질문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의문을 채운 뒤였다.
누군가 두려운 상황에 대해 울상이 된 제문주에게 다가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설명해 주려 할 때였다.
피식 웃은 세화가 제문주를 향해 말했다.
“다행이구나. 눈을 너무 오래 뜨지 않아 뺨이라도 치려던 참인데.”
“네, 네?”
“정신을 차렸으면 그만 이야기해 보렴. 왜 이런 짓을 한 건지.”
“……네?”
제문주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이런, 짓이라뇨? 제가요?”
주변에 선 이들의 어리둥절한 시선 역시 세화에게 쏠렸다.
“아가씨. 전 이제 막 깨어나 지금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도 제대로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순순히 말할 것 같지가 않구나. 영선아. 영무야.”
“네, 아가씨.”
한발 앞으로 나선 영선과 영무가 제문주를 향해 걸어갔다.
제문주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뭐, 뭐에요! 대체 뭘 말하라는 거예요! 뭔데요!”
‘뭐지? 뭘 눈치채기라도 한 건가?’
공포에 질린듯한 제문주의 시선이 주변을 빠르게 훑어내렸다.
지금 상황은 어제 저 여자의 방에 차를 가지고 들어갔을 때와 달랐다.
그때는 그 방 안에 저 여자와 시녀들만 있었지만, 지금은 제 편이 더 많지 않던가.
게다가.
“영, 영공 원로 어른! 영공 원로 어른!”
이곳엔 자신이 딸을 구해 주었던 영공 원로도 있었다.
“원로 어른! 제가 가장 늦게 깨어나 지금 뭔가를 오해받고 있는 상황인 겁니까?”
제문주가 영공 원로를 향해 소리쳤다.
“그런 상황이어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저는 무슨 일에건 떳떳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면 영공 원로 어른께서 직접 심문해 주십시오. 뭔가를 숨길 생각은 조금도 없이 무엇이 되었든 원로 어른께 사실대로 전부 고할 것입니다.”
제문주의 목소리를 들은 영공 원로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일은 모두 제가 잘못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아랫사람들에게 그 짐을 넘기고 싶진 않았다.
“혹여 저 아이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면 내가 할 것…… 겠네.”
이 많은 이들 앞에서 말투를 바꾸는 것도 고역이었다.
하지만 본의든 본의가 아니었든 다 죽어 가던 저를 치료해 준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숲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구 하대하기는 좀 어려웠다.
“제가 뭘 심문할 줄 아시고요.”
“지금 저 아이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 의심하고 있지 않……않나.”
세화가 대답 없이 영공을 응시했다.
“한데 그것은 너무 무리한 추측이 아닌가. 저 아이는 그저 시녀일 뿐인데.”
“그런 세세한 사정까지 제 알 바입니까? 제가 확실히 아는 건.”
세화의 무감한 시선이 제문주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우리가 이런 곳에 갇히게 만든 범인이 바로 이 제문주라는 사실입니다.”
“!!”
“……!!”
“문, 문주가?! 정말?”
“……아, 아니 문주가 왜.”
반박을 용서치 않을 정도로 완벽히 확신 어린 목소리에 주변의 이들도 마른침을 삼키며 제문주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 그건 정말 오해이십니다. 제가 대체 그런 일을 왜 하겠습니까. 이곳엔 다 저를 아껴 준 이들밖에 없는 것을요.”
당황에 찬 제문주가 서둘러 그 말을 부정했다.
“전 정말 아닙니다. 혹 애꿎은 이를 범인으로 몰아 상황을 통제하는 척하며 저희 위에 서시려는 거라면 이곳엔 영공 원로께서 계시니 굳이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어찌 저를 모함하십니까.”
제문주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곳엔 많은 백가 일원들 외에도 자신과 같은 시녀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들이 자신을 위해 나서 주리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모함? 상황을 통제하는 척해?”
화가 난 영선이 단번에 눈썹을 치켜들었다.
세화가 무심히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
“아가씨. 하지만-.”
“원로께서 직접 심문하시겠다 하시잖니. 일단 원로께 맡겨 보자꾸나. 어디 한번 두어 보렴.”
말투는 부드러웠으나 세화의 시선엔 감출 수 없는 조소가 묻어났다.
“그래 봐야 모든 일의 범인은 이 제문주란 아이로 밝혀질 테니까.”
‘……어찌, 저리 노련해 보일 수 있지.’
조금의 노여움도 섞이지 않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영공 원로가 조용히 탄식을 뱉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이제 막 탈피를 마친 어린것이건만.
저 어린 환족 하나가 대체 어찌 이리 자연스레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인가.
그 감탄은 비단 자신만 느끼는 것은 아닌 듯했다.
이미 저 어린 환족에게 잔뜩 감화된 듯한 단장이 당장이라도 그를 말리고 싶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이들도 비슷했다.
어쨌거나 그들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결계 안에 갇혀 있었고, 이곳에서 나가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저 주가 여자가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고.
그 모든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지켜보던 영공 원로가 제문주의 앞에 섰다.
하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사실 이 사태에서 가장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던가.
그런 와중에 이 아이가 범인이라는 말을 듣는 상황이었으니 대체 뭘 심문해야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제문주의 말대로 저 여자가 그저 넘겨짚고 있다고 여기기에는…….
‘그러기엔 범인이라 말하는 말투나 행동이 너무나 확신에 차 있긴 한데…….’
“혹시 너.”
망설이는 말투로 영공 원로가 운을 떼자 제문주가 납작 머리를 조아렸다.
“원로 어른. 저는 원로 어른의 따님을 주가 영지에서 구해 함께 백가로 넘어온 이후 매일매일을 부끄럼 없이 살았습니다. 원로 어른께서도 제가 얼마나 성실하게 남을 위하며 살았는지 아실 것입니다.”
“…….”
“제가 원로 어른께서 땅밑으로 추락하시고 난 후 몸을 돌려 뛰어가는 모습이 혹 달아나는 것으로 비쳐 오해를 샀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영공 어른께 큰일이 생겼으니 저택으로 달려가 이 위급한 상황을 알리려 했을 뿐입니다. 한데 그런 저를.”
제문주가 영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시녀가 잡아서는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버렸습니다.”
제문주는 마치 동의를 구하기라도 하듯 주변에 시립한 이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호소했다.
“그 무시무시한 장면을 본 이가 이 자리에 한가득입니다.”
하지만 모호한 표정을 짓던 백가 무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 말이 사실이기는 합니다. 허나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뭐라?”
“맞습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저 아가씨께서 이유 없이 그런 일을 하시진 않으셨을 듯하니 한번 말씀을 들어 보시지요.”
누군가가 덧붙인 말에 기가 막힌 영공 원로가 헛웃음을 뱉었다.
오랜 기간 매일 얼굴을 마주쳤던 이가 만난 지 이틀도 되지 않은 이에게 떠밀려 땅밑으로 추락했다는데, 이유가 있을 거라고?
하나 더 이상한 건 자신의 속마음이었다.
그 또한 저 어린 주가의 환족이 아무 이유 없이 제문주를 지목하진 않았을 거란 이상하고 어처구니없는 확신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때였다.
“……!!”
계속해서 저릿저릿하게 근육을 조여 오던 다리에서 힘이 훅 풀렸다.
몸을 크게 휘청이던 영공이 이내 자리에 주저앉았다.
“원로 어른!”
“영공 원로 어른!”
갑작스레 바닥으로 쓰러진 영공 원로에게 단장을 비롯해 주변에 있던 이들이 몰려들었다.
노인의 몸이 잘게 떨렸다.
아까부터 따끔거렸던 다리께가 이젠 숫제 쥐가 난 것처럼 조여들며 움직여지지 않았다.
영공 원로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간신히 통증이 이는 다리 부분의 옷을 찢어 내렸다.
사방에서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영공 원로의 다리가 마치 산 채로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허벅지에 틀어박힌 어떤 작은 것이 그의 다리부터 시작해 거미줄처럼 제 몸을 불리고 있었다.
식물의 뿌리처럼 검은 실금이 뻗어 나간 부분은 마치 긴 가뭄에 갈라진 땅처럼 피부 위에서 썩어 들어가 틈이 생기고 있었다.
“?! 이게 대체…….”
영공이 이를 사리물었다.
시선이 반사적으로 세화에게로 날아갔다.
아까 분명 저 여자가 자신을 치료해 주었다지 않았던가.
영력을 사용했다면 제 이런 상태를 모를 리 없으니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이유가 대체 뭐겠는가.
자신을 죽일 이유가 있는 사람은 이곳에 저 주씨 여자 하나뿐이었다.
가모가 되는 일에 반대하고 나서는 그를 설득하느니 처리해 버리는 게 더 빠를 테니까.
“너! 네가 이런 식으로 나를-.”
“독에 당하신 겁니다.”
“뭐, 뭐라?”
세화가 검게 물든 영공의 다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 영공 원로 어른을 치료할 당시 몸 안에 독이 스며 있음을 파악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숲에서 저와 처음 만났을 때는 이상이 없으셨지요.”
“…….”
“그림자들의 이상한 변형. 본능만 있을 뿐 지성이 없는 그것들이 감히 사당을 무너뜨리려 한 것도 그렇고, 우리를 가둔 결계도 그렇고. 영공 원로께 뻗어진 독수까지. 설마 이게 다 우연이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그렇지만 마침 제가 당시 그 장소에 있던 이들을 죄 다 이 공동으로 끌고 들어왔지 뭡니까.”
고개를 슬쩍 기울인 세화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러니 범인은 필연적으로 여기 있는 누군가라는 말이군요. 영공 원로 어른께서 저를 의심하시고 싶으시다면 저까지 그 후보에 포함하셔도 좋습니다. 물론 전 아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친절히 가르쳐 드리고 있지만요.”
“……!”
힘주어 움켜쥔 주먹을 떨며 노인이 이를 갈 듯 말했다.
“혹여, 네가 저지른 짓을 내 휘하에 있는 이들에게 덮어씌우려는 거라면…….”
세화가 피식 웃었다.
영공의 피부 위로 점점 더 빠르게 번져 가는 검은 그림자를 본 그녀가 지체하지 않고 덧붙였다.
“쓸데없는 오해는 나중에 하시고 시간을 좀 아끼세요. 그래야 제때 해독약을 드실 것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