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150/254)

……하여 결국 경계에 서긴 했으나 칠흑 같은 어둠으로 이어진 절벽을 내려다본 단장은 덧붙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뛰어내렸다가 자칫 모두 사망하게 된다면.”

세화가 고개를 꺾으며 대답했다.

“이상한 말을 하네요. 영력을 사용하면 되잖아요?”

“아니. 제 말뜻은-.”

“설마 대백가의 무사단장이라는 분의 영력 운용이 주저 없이 뛰어내린 제 시녀들보다 못하진 않겠죠.”

“…….”

단장이 바짝 마른 입술을 연신 문질렀다.

뒤에 선 무사들 역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운용에 자신 없으면 먼저 뛰어들어요. 내가 데려갈 테니.”

“데려가신다고요? 아가씨께서, 저희를요?”

단장의 되물음에 세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계속 그리 되물을 시간이 있나요? 정말 너무 미적이네. 나였다면 일을 이따위로 벌려 놓은 상태에서.”

세화의 날카로운 시선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무사들의 면면을 훑었다.

“못한다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못할 것 같은데.”

계속 그리 망설일 테면 마음대로 하라고.

십수 개의 검은 그림자들과 함께 아래로 떨어진 이들은 어찌 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그 마음을 잘 알겠다고.

세화가 덧붙인 그 말에 단장의 두렵던 마음에도 결심이 섰다.

이 여자의 말이 억울하고 분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말처럼 안에 갇힌 이들을 어떻게든 꺼내 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리하여 있는 힘껏 주먹을 움켜쥔 단장은 세화에게 지목된 무사들과 함께 공동 아래를 향해 몸을 던졌다.

영력이 그리 대단치 않아 보였던 저 여자의 시녀들까지 그리 주저 없이 뛰어내렸으니.

‘그래. 분명 안전하리라는 걸 알고 그리 시킨 것이겠지.’

하나 떨어지는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빛이 벌어진 시야는 금세 어둠으로 뒤덮였다.

당장이라도 바닥과 부딪쳐 피 웅덩이로 변해 버릴 것 같은 공포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 두려움 속에서 정신을 잃기 전이었다.

화아악!

마치 따뜻하게 데워진 강물이 흘러 들어오듯 무언가가 그들의 몸을 받쳤다.

이어 낙하하는 속도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뭐지?’

가늘게 뜨여진 그들의 눈앞으로 마치 날개와도 같은 오색의 거대한 힘을 몸에 두른 누군가가 활강하듯 날아오고 있었다.

‘…….’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비한 광경에 그들이 지금의 상황도 잊고 아름답게 빛을 내는 여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더니 발이 땅에 닿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웠으나 놀라운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아악!”

“꺄악!”

그렇게 도착한 공동 밑바닥은 함께 추락한 그림자들과 무사들이 뒤엉켜 난장이 되어 있었다.

이미 공방이 시작된 지 꽤 된 듯 그림자의 수는 많이 줄어 있었으나 그만큼 무사들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맙소사!”

침음을 뱉은 단장이 단번에 검을 빼 들었다.

하나 그보다.

탕!

그들의 뒤에서 날아간 무언가가 더 빨랐다.

탕! 탕!

돌벽 안에 우레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자 파동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고 몸을 숙였다.

“여기요, 아가씨.”

어느새 주가 여인의 곁으로 붙은 시녀들이 그녀에게 화살을 건네주고 있었다.

그리고 단장의 눈앞에서 주가 여인은 시위에 화살을 세 개씩 걸며 영력을 운용했다.

그렇게 쏘아진 살은 백발백중으로 그림자의 머리를 터뜨려 버렸다.

어두운 땅 밑바닥에서 환한 빛에 둘러싸인 여인의 옷자락이 발밑에서 시작된 영력에 의해 세차게 펄럭였다.

그렇게 드러난 흰 소용돌이와 피부에 닿을 정도로 선명한 낯익은 기운.

“!”

누가 보아도 백가의 영력이었다.

그것도 그들의 자랑인 신수, 백호의 영력과 비견될 법한 크기의 영력이 그 여인의 몸에서 제 형체를 넓히고 있었다.

* * *

“으으으으.”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영공 원로가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니 잡으려 했다.

하나 팔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뭐지. 몸이 대체 왜 이런 거지.’

두통이 너무나 극심해 눈이 떠지지 않았다.

“가만히 계세요. 금방 끝날테니.”

멀지 않은 곳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동굴 속 종유석 끝에 맺히는 이슬처럼 투명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화아-

그와 동시에 어떤 시원한 기운이 쏟아지듯 밀려 들어왔다.

‘뭐지……. 이 힘은.’

청량함을 담은 바람 같은 힘이 그에게 불어오고 있었다.

머릿속을 찢어발길 듯 그를 괴롭히던 두통과 귓속을 울리는 이명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팔 하나 제대로 움직이기 어렵던 몸에도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가벼워졌다.

“이 정도면 됐을 테니 그만 눈을 뜨시죠.”

조금 전에도 들렸던 여인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다.

머릿속이 가벼워지고 나서야 영공 원로는 그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저를 향한 어떤 냉랭함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제가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어 봤는지에 대해서도.

“…….”

천천히 눈을 뜬 영공 원로의 시선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세화의 것과 맞닿았다.

방금 자신을 구해 준 힘이 그녀의 것인 것을 알아챈 그가 입만 벙긋거렸다.

그의 시야가 명확해지고 머리에 났던 상처가 완전히 치료된 것을 본 세화가 무심히 일어섰다.

“다음.”

세화의 입술 사이로 감정 없는 목소리가 이어지자 머쓱한 얼굴을 한 백가 무사단장이 누군가를 안고 다가왔다.

“이번엔 이 친구입니다. ……송구합니다, 아가씨.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단장의 지극히 공손하고 깍듯한 태도에 영공 원로가 조금 전의 상황도 잊고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 단장이 안고 온 무사 하나를 세화의 앞에 눕히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사의 부상 상태가 너무나 참혹했기 때문이었다.

대답 없이 세화가 손을 들자, 가을 하늘처럼 짙푸르고 맑은 영력이 의식을 잃은 무사를 향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

영공이 입이 더 이상 벌어질 곳 없이 벌어졌다.

그는 나이가 나이인 만큼 저 푸른 영력이 어느 가문의 것인지 몰라볼 수가 없었다.

장가, 푸른 거북이의 영력이었다. 하지만.

‘이, 이게 대체. 저, 저 여자는 분명 주씨의 핏줄인데 뜬금없이 저 영력은 대체 무슨…….’

게다가 세화에게서 보이는 정순하고 폭발적인 영력은 그녀가 주가가 아니라 장가의 소가주라 해도, 아니 가주라 해도 전혀 의심하지 못할 만큼 막대한 힘이었다.

‘맙소사. 지금 장가의 가주라도 저런 힘을 발휘하진 못할 것이다. 절대로!’

허나 더 경악할 만한 일은 따로 있었다.

“!”

영공의 눈앞에서, 환한 빛에 휩싸인 환자의 찢어졌던 상처가 붙고 붉은 자국이 사라졌다.

함몰됐던 얼굴도 부풀어 오르듯 살이 차오르며 원래대로 재생됐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미약한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시신인 줄 알았던 이가 곧 나직한 신음 소리를 내며 눈꺼풀을 떨었다.

놀란 것은 영공 원로뿐만이 아니었다.

미리 치료를 받은 이와 부상의 정도가 약해 차례를 기다리던 이들 모두가 신음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계속해서 보고 있는 광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세화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단장을 재촉했다.

“다음.”

“송구합니다, 아가씨. 쉬셔야 할 텐데. 이놈의 상황이 워낙 지독하여…….”

세화는 대답 대신 턱짓했고 또 다른 의식 없는 이가 세화의 앞에 놓였다.

생명이 경각에 달한 순서대로 치료를 받은 것이기에 이후 남은 이들은 치료받지 않아도 된다고 손사래치고 있었다.

하지만 세화는 그런 이들마저 모조리 치료했다.

하여 세화가 치료를 거부한 단 한 명을 제외하고, 그곳에 있는 모든 이가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나 의식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 뒤의 일이었다.

마지막 푸른 빛이 달빛처럼 공간을 가득 메우다 가라앉았다.

그 빛을 받은 무사 하나가 떨리는 눈을 하고서 세화에게 허리를 숙였다.

“감, 사합니다. 아가씨. 정말로 감사합니다.”

감격에 겨운 목소리가 잔뜩 흔들리며 흘러나왔다.

이 사내는 가장 먼저 지반이 무너질 때 떨어져 함께 추락한 삿된 그림자들과 싸우다 팔뚝이 반이나 물어 뜯겼던 것이다.

악한 기운이 침투하여 상처는 검게 변색되어 가고 있었다.

통째로 잘라 내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건만, 이 여인은 그 팔을 자국조차 남지 않게 재생시켜 버린 것이다.

세화는 그 많은 이들을 치료하고도 안색이 변하긴커녕 땀조차 흘리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을 기울여 공동 안의 상황을 살폈다.

다른 이들도 그제야 조금 여유를 가지고 제 상황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분명 위에서 떨어졌건만 막힌 듯 단단하게 가려진 허공은 빛 한 점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런 어둠에도 불구하고 공동 안쪽은 시야를 제법 정확히 확보할 수 있을 정도로 꽤 밝은 편이었다.

세화가 대수롭지 않게 결론 내렸다.

“결계 안에 들어와 있는 거군요, 지금.”

단장이 영공 원로에게 물었다.

“원로 어른.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

이런 위험천만한 장소에 대해 내도록 백가의 원로로 살아온 그가 뭘 알겠는가.

하지만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니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지금은 폐쇄되어 아주 오래전 문서에만 남아 있는 백가의 어떤 봉인장에 대한 기록이 생각난 것이다.

‘……만약 정말로 그곳에 떨어진 것이라면 큰일이다.’

그 장소라 하면 이미 기록에만 남아 있을 정도로 아주 오래전에 위를 덮어 폐쇄하였기 때문이었다.

‘아, 아니야. 그래도 땅 전체가 무너진 것이었으니까 상황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지금이야 결계 속에 들어와 있어 이리 밀폐된 곳처럼 보이지만 밖에서 보면 분명 입구가 보일 터였다.

그러면 분명 누군가가 우릴 구해 주러 올 것이다.

그리 생각한 영공 원로의 사고가 저도 모르게 어딘가에 가 닿았다.

가주께서 계시다면 좋으련만.

하나 이내 참담하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가주를 이 백가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은 것이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그래놓고 가주의 도움을 바란다니.

“으으…….”

그때, 세화가 치료하지 않은 단 한 명인 제문주가 그제야 눈꺼풀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으, 뭐지.”

정체불명의 낯선 장소에 떨어져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그들의 관심이 지금 막 깨어난 제문주에게 몰려들었다.

하여 그녀는 상황을 인식하는 데 지장은 없으나 어두운 주변과 그 사이에서 제게 몰린 시선들에 당황하며 눈을 껌뻑였다.

“여, 여긴 어디죠? 우리, 우리 어떻게 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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