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9화 (149/254)

갑자기 나타난 세화를 눈을 껌뻑거리며 보고 있던 이들이 그 말에 짐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화살의 깃에서부터 시작된 오색의 영력이 짐승의 형태를 희미하게 감싸고 있었다.

영력이 봉인구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그림자가 흩어지지 않아 삿된 그림자가 가진 힘을 정확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

영공 원로의 턱이 단단히 긴장되었다.

그가 가지고 온 봉인구로는 절대 이 정도 영력의 짐승들을 잡아넣을 수 없었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염려와 더불어 이런 상황을 저 여자에게 보였다는 생각에 영공 원로가 미간을 일그러뜨릴 때였다.

“영, 영공 어른!”

절박한 발소리가 풀들을 짓밟으며 들려왔다.

자잘한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제문주가 숲 그림자 속에서 황급히 나타나 영공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영공 어른!”

“아니 이게 무슨 꼴이냐!”

“큰일 났습니다. 지금, 삿된 그림자들이 악귀들을 잡아 가둔 곳으로 몰려가 땅을 무너트리고 있습니다.”

“……뭐, 뭐야?”

“이대로 간다면 봉인된 것들을 모아 놓은 사당이 무너져 버릴 겁니다!”

제문주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보는 이의 위기감을 자극할 만큼 더없이 절박하고 비통한 모습이었다.

심각성을 느낀 영공 원로가 제일 먼저 말에 올랐다.

“지금 확인해야겠으니 네가 온 길을 그대로 안내하거라!”

영공 원로가 뻗은 손을 잡고 제문주가 그의 앞자리에 올라탔다.

“원로 어른! 위험합니다. 저희가 배행하겠습니다!”

“안상아! 너는 저택으로 가서 남아 있는 무사들에게 지원 요청을 하거라!”

“예! 단장!”

“나머지는 모두 나를 따라오거라!”

긴장으로 얼굴을 굳힌 백가 무사들이 우르르 영공 원로의 뒤를 따랐다.

말 위에 앉아 그 일련의 과정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던 세화가 턱짓했다.

“영선아, 영채야.”

“네, 아가씨.”

“시녀들에게 한시도 지체 말고 따라오라 했건만 너무 늦는구나. 너흰 가서 그 아이들을 지금 모두가 달려간 방향으로 데려오렴.”

“네, 아가씨.”

“영무야. 우린 그 사당이란 곳으로 따라가 보자꾸나.”

“예!”

그녀의 말을 따라 세화와 세 자매의 말이 두 갈래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 * *

쿵, 쿠웅, 쿵.

사당에 도착하자 땅을 울리는 진동 소리에 영공 원로가 눈을 의심하며 멈춰 섰다.

“……이, 이게.”

사당이 곧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제문주의 말은 사실이었다.

문제가 되었던 삿된 그림자들이 백가의 사당 주위에 빼곡히 몰려들어 땅을 흔들고 있었다.

“이게 대체…….”

온갖 불결한 것들을 봉인해 놓은 사당은 가장 정순하게 주변을 유지해야 했다.

하여 막강한 결계로 보호받고 있었건만, 어찌 된 일인지 저 삿된 그림자들은 결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우우우웅-

공기가 진동하는 소리에 영공 원로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아, 안 돼.”

그림자들의 어둠에 사당이 타격을 입고 있는 소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당 안에 봉인된 악귀들이 일제히 뛰쳐나오게 되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빠져나온 것들이 가주도 없는 백가 영지 곳곳을 휩쓸고 다니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등줄기가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일이 정말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그는 죽어서도 가문에 저지른 잘못을 갚을 길이 없다.

“히히히힝!”

어두운 기운에 영향을 받은 말이 요동치자 영공 원로가 제문주와 함께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윽!”

왜인지 땅을 디디자마자 마치 가시에 찔린 듯 다리에 통증이 일었다.

“영공 어른!”

“아니다. 괜찮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저를 보는 제문주에게 영공 원로가 손짓했다.

지금 중요한 건 제 몸 따위가 아니었다.

곧이어 그의 뒤를 따라붙은 무사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그들 역시도 사당에 근접할수록 격하게 요동치는 말들을 진정시키지 못해 서둘러 땅으로 내려서야 했다.

“미리 몇이라도 처리하려 하였으나 이건 저희만으로는 안 되겠습니다.”

영공 원로의 곁으로 다가온 단장이 말했다.

“괜히 저것들을 자극하다가 더 위험해지면 안 되니 일단 기다려 보시지요. 지원군을 요청하였으니 그들이 도착해 협공으로 처리하면 될 것입니다.”

“…….”

참담한 얼굴을 한 영공 원로가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하고 물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제가 보낸 이가 사안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니 금방 데려올 것입니다.”

그 모습을 뒤이어 도착한 세화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영선과 영채가 거의 시간 차를 두지 않고 어두운 얼굴을 한 시녀들과 함께 나타났다.

지원 병력인 줄 알고 돌아보았다가 실망한 영공 원로가 세화를 보며 소리쳤다.

“데려오려면 네 시녀들이나 데려올 것이지, 이런 위급한 곳에 저런 아이들까지 왜 끌고 온단 말이냐!”

예비 가모라는 위치에도 맞지 않고, 백가의 손님이라는 위치에도 맞지 않는 하대였다.

세화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데려와야지요. 이 사태를 만들어 낸 아이들인 것을요.”

“뭐, 뭐야?!”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과연 누가, 어떤 의도로 이런 일을 만들었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화의 시선이 영선과 영채가 데려온 시녀들을 거쳐 무사들과 제문주의 얼굴을 확인하고 영공 원로에게로 돌아왔다.

어떤 확신을 담은 눈빛이 예리하게 빛을 발했다.

“하니 공범자들은 모조리 발본색원하셔야지요.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

“아니 그렇습니까, 영공 원로 어른.”

……알고 있었구나.

영공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저 주씨 여자는 이번 일의 범인이 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긴, 어제 그 차 소동에 정확히 그를 골라 전언을 보냈던 것만 보아도 예상한 일이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주씨에게 이렇게 당하다니.

자존심이 짓밟혀지는 듯했으나 영공 원로는 이를 사리물며 그 굴욕감을 삼켰다.

저 여자의 말에 틀린 점이 없긴 했으니까.

반드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그 스스로를 처벌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였다.

“영공 원로 어른!”

“원로 어른!”

“오오! 왔구나! 빨리 왔어!”

단장이 보냈던 전령과 함께 지원 무사들이 숲을 가르며 우르르 도착했다.

영공 원로가 황급히 숲으로 달려가는 모습에 혹시 몰라 숲의 초입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전령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원로 어른. 이게, 이게 다 무엇입니까?”

그들 역시도 먼저 도착한 다른 이들과 같이 통제되지 않는 말에서 내려 다가섰다.

“너희가 다냐? 다른 이들은? 지원을 더 부르진 않았어?”

“아닙니다. 불렀습니다. 한데 어찌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까?”

“그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영공 원로가 말을 삼켰다.

저 주씨 여자가 그런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거대한 사고를 목격하고 너무 긴장을 해서일까.

아까도 따끔거렸던 한쪽 다리가 쥐가 나듯 뻐근하게 아프고 저려 왔다.

손 역시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을 영공이 등 뒤로 감출 때였다.

우우우웅―!

그림자들에게 둘러싸인 사당이 마치 지진이 인 듯 격렬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

누가 봐도 상황이 명확했다.

저 사당은 곧 무너져 내릴 것이다.

백가의 봉인이 허술하진 않으니 모든 것들이 다 흘러나오게 되진 않겠지.

하지만 신수가 존재하던 시절 갇힌 것들이 혹시라도 빠져나오게 된다면 지금의 백가 무사들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영공 원로가 주변을 향해 외쳤다.

“모두 물러서라!”

“영공 원로 어른!”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절대로 시도하지 않았을 것을.

하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쏟아진 물이었다.

영공 원로가 제 몸 안의 영력을 폭발시켰다.

그 상태로 사당을 둘러싼 것들을 향해 달려갔다.

동귀어진하는 한이 있어도 저 그림자들이 더 이상 사당에 손상을 입히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원로 어른!”

그가 뭘 하려는지 눈치챈 무사들 역시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피해가 자신 하나로 국한되도록 영공 원로는 이미 원신까지 발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안 됩니다, 원로 어른!”

몇몇 무사들이 그런 영공 원로를 잡기 위해 뛰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그 긴박한 광경을 보고 있을 때였다.

쿠르르르릉―!

그 순간 거대한 땅 울림이 울더니 사당이 있는 땅 주위를 제외하고 그 주변의 지반이 그대로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으아악!”

“꺄악!”

다행히 무너지는 땅은 일정 거리 이상 뻗어 가지 않고 멈춰 섰다.

하지만 이미 삿된 그림자들을 비롯하여 영공 원로와 백가 무사 몇몇,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시녀 몇까지 모두 삼킨 뒤였다.

단장이 떨리는 시선을 깜빡거리며 아래로 꺼진 땅과의 경계로 다가갔다.

어떻게 땅 아래에 이런 거대한 공동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끝을 모르는 절벽이 생겨나 있었다.

“이게 대체…….”

그때였다.

그 장소에서 달아나려는 제문주의 목덜미를 낚아챈 영선이 그녀를 공동 안으로 밀어 버렸다.

“꺄아아악!”

“!!”

무사들이 달려가 구하려 했으나 제문주의 몸은 찰나 간에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다가온 단장이 세화의 어깨를 잡아채려 했다.

그전에 평온하게 그를 돌아본 세화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도 들어가죠.”

“무, 뭐?”

“아니면 안에 빠진 이들을 이대로 두겠다는 건가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단장의 시선이 공동으로 향했다.

“……들어가겠, 다고? 저기를?”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허공이었다.

한번 떨어지면 천 년이 지나도 기어 올라올 수 없을 듯 보이는데.

‘그런데도 들어간다고? 떨어진 이들을 구해? 대체 어떻게?’

“아가씨.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시녀 아이들을 마저 처넣을까요?”

“그러렴.”

“……!”

그 말과 동시에 세 자매가 남아 있던 시녀들을 끌어내 공동 안으로 던져넣었다.

한데 이번엔 단장이 그 광경에 대해 뭐라 말을 보태기도 전에 세 자매가 그 허공 아래로 뛰어내렸다.

“…….”

‘들, 들어가자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 건가?’

“아직도 결정하지 못하겠나요?”

답을 미적거리는 단장의 모습을 본 세화가 혀를 찼다.

“새로 지원 온 무사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단장 휘하의 무사들 역시 모두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없고요. 다만.”

세화의 적자줏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그중 몇몇을 향했다.

“지금 내가 눈으로 가리킨 이들과 단장은 결코 달아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선택하시죠.”

“……뭐, 뭘…… 말입니까?”

이 여자가 지금 선택한 이들은 모두 영공 원로의 명을 받고 이번 일을 시행한 이들이었다.

그녀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단장이 말투조차 바꾸며 조심히 물었다.

“그야 당연히.”

세화가 단장의 아래위를 눈으로 훑으며 대답했다.

“제 발로 뛰어내릴 것인지, 아니면 조금 전 보았던 것처럼 내게 목덜미를 잡힌 채 저 구덩이 안으로 던져질지 하는 것에 대해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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