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안광을 번뜩인 제문주가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미리부터 숲 안에 들어와 있던 그녀가 손에 든 병 안의 것을 분주하게 쏟아 놓았다.
나무 그림자 아래를 빠르게 오가던 검은 것들이 냄새를 맡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눈을 찢은 검은 형체들이 바닥에 쏟아진 것들을 아귀처럼 집어삼켰다.
끈적거리는 것을 뚝뚝 흘려 대며 머리를 박고 허겁지겁 먹던 것들이 이내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안개 같던 몸체는 더욱 뚜렷해졌고 연기처럼 흘리는 힘의 기운도 더욱 스산해졌다.
그아, 그아아-.
그림자들이 입을 벌리자 끔찍할 정도의 독한 사기가 흘러넘쳤다.
그것들이 배를 든든히 채울 동안, 제문주는 들고 있던 활에 무언가를 꺼내어 발랐다.
치이익―!
활촉과 대에 다 스미지 못한 액체가 풀에 닿는 순간이었다.
마치 독에 삭듯, 말라비틀어진 풀이 그을음만 남기곤 흔적도 없이 녹아내려 검은 원형으로 변했다.
처음엔 손바닥만 하던 검은 곳이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간다.
그것을 보는 제문주의 눈빛에 조금 망설임이 어렸다.
하나 이내 결심한 듯 입을 꾹 다문 그녀가 준비를 마치기 위해 서둘러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 * *
“왼쪽으로 몰아라!”
“젠장, 이게 무슨-!”
말을 탄 백가 무사들이 빠르게 숲을 누볐다.
검고 끈적한 무언가를 바짝 추격하는 그들의 뒤를 그을음과 닮은 검은 것들이 갑자기 나타나 덮쳐 왔다.
“단장! 뒤에!”
쾅―!!
황급히 영력으로 그것을 막아 낸 백가 무사단장이 이를 악물고 활을 당겼다.
펑! 펑―!
영력이 담긴 활촉에 맞은 것들이 그대로 터지듯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몇몇은 그 영력의 화살을 맞고도 형태가 사라지지 않은 채 나무 그림자로 숨어 버렸다.
무사단장이 검은 것들의 습격을 막아 낼 동안 또 다른 검은 것들을 쫓던 백가 무사들이 황급한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놓쳤습니다.”
“영공 어르신께 온 전갈은?”
“아직 없습니다.”
“…….”
단장이 이를 물었다.
영공 원로에게 처음 듣게 되었을 때부터 당혹스러웠던 계획이었다.
주가 여자를 쫓아내기 위해 묶어 두었던 삿된 그림자들을 풀어놓자니.
그믐밤이 멀어 힘이 약해졌다고는 하나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나 단장의 생각이야 어쨌건 간에, 무사들 사이에서도 영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가능성보다 주가의 피가 가모가 되는 것을 막는 게 더 중하다는 의견이 더욱 많았다.
하여 마지못해 수긍했던 터였다. 그들의 힘이라면 달이 차지 않은 때의 그림자쯤은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어째서, 아직 그믐밤까지는 날이 남았는데!’
그 결정은 삿된 것들을 풀어놓고 오래지 않아 곧장 후회하게 되었다.
봉인되어 있던 동안 더욱 힘을 키우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불결한 그림자들은 쉽게 소멸되긴커녕 오히려 그들을 위협적으로 공격하며 태양이 사라지자마자 숲을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외형조차 그들이 알고 있던 것과 달랐다.
사지도 없이 기어 다니던 미물의 모습이 아니라 찢어질 듯 입을 벌리고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거칠고 흉포했다.
부하 중 누군가가 침을 꿀꺽 삼키며 조용히 의견을 내놓았다.
“……단장, 이거 너무 이상해요. 주가 여자고 뭐고, 영공 어르신의 전갈을 기다릴 새 없이 한시라도 빨리 잡아 다시 봉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이대로 가다가 저것들이 밖으로 뛰쳐나가기라도 하면 일이 더 커질 겁니다.”
침음을 삼킨 단장이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지금부터는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즉시 사살하는 방향으로 간다. 저것들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어서 어설픈 영력으로는 소멸하지 않고 달아나니 처음부터 최대 영력으로 터뜨리는 것을 목표로 해라.”
“네!”
일제히 말에 오른 백가 무사들이 숲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난감한 얼굴을 한 단장도 활을 들고 나무 기둥 사이로 사라졌다.
* * *
“하아, 하아.”
백가 무사단원은 제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는 것을 적나라하게 느끼고 있었다.
몇 번 가다듬으면 잔잔해지던 호흡이 이제는 진정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제길, 영력을 너무 사용했나.’
말이 그림자들에게 당하는 바람에 그는 단원들과 합류하지도 못하고, 맨몸으로 숲을 누비고 있었다.
다른 때라면 신호탄이라도 쏘아 올렸겠으나, 검은 것들을 유인하게 될지도 몰라 지금은 그조차 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 주가 여자가 호위들을 불러와 준다거나 하면 더없이 좋으련만…….’
하지만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가정이었다.
비겁한 주가 혈족들은 도움을 주기는커녕, 위험을 감지하자마자 천 리 밖으로 멀어져 다시는 접근하지 않을 테니까.
휘오오오―
스산한 바람이 나뭇잎들을 흔들며 지나쳤다.
사기가 가까워졌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일어서야 했다.
이러다 힘이 떨어지고 나면 대체 어찌 되는 걸까.
그 미래를 상상하니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곤두서는 것 같았다.
말이 갈기갈기 찢어져 먹혔던 것처럼 저도 산 채로 잡아먹힐지도 몰랐다.
‘일, 일단 숲을 빠져나가야…….’
그렇게 여긴 백가 무사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얼어붙은 듯 몸이 굳었다. 맥박이 빨라지고, 숨이 거칠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으. 그으으―.
“!!”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는 검은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림자의 형태는 아까보다 더욱 선명해져 있었다.
짐승 같은 네 발이 생겨나 있었고, 새까매진 어둠 안쪽으로 노란 눈을 빛내며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저것이 그대로 그를 덮쳐 올 것 같아, 백가 무사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그림자가 움직였다.
먼저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그 사이 어디선가 나타난 또 하나의 그림자가 노란 눈을 가진 그림자의 가까이 합류했다.
발소리도 내지 않은 다른 그림자 역시 그들의 곁으로 붙었다.
일곱 마리의 그림자가 눈을 깜빡이지도 않으며 그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왔다.
백가 무사의 창백해진 입술이 나직이 떨렸다.
역겨울 정도로 거대한 사기가 확연했다.
하나라면 자신에게도 승기가 있다고 생각했건만.
‘……이제 틀렸구나. 끝났어.’
잘못된 선택이었다. 저것들을 풀어 놔서는 아니 되었다. 아무리 그 주가 여자가 싫었어도.
저뿐만 아니라 분명 또 다른 희생자를 낳을 것이다.
뼈아픈 후회가 뒤늦게 몸서리쳐지게 몰려왔다.
시큰해지는 눈가에 힘을 준 그가 활을 버리고 검을 뽑아 앞으로 세웠다.
스릉-
죽을 때 죽더라도 저것들을 하나라도 더 죽이고 가야 했다. 그가 영력을 폭발시켰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양 일곱 개의 그림자가 그를 향해 몰아닥쳤다.
크와아아아-!!!
허공으로 도약한 일곱 개의 그림자가 잔인하게 번뜩이는 이빨을 드러냈다. 그를 향해 조금의 틈도 없이 날아들었다.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고 저도 모르게 신을 찾게 되던 그 순간이었다.
쐐애애액―!!
비도 오지 않건만 우레가 울리는 듯하더니 귀를 찢는 파공음이 대기를 가르며 짓쳐들었다.
검은 그림자 사이를 통과한 네 개의 화살이 단번에 그림자의 눈 사이에 정확히 박혀 들었다.
콰앙!
“!!”
놀람도 잠시, 또 다른 빛줄기가 빠르게 날아왔다.
콰앙! 쾅! 콰앙!
나머지 세 그림자들이 그의 몸에 접근하기도 전에 그대로 소멸했다.
화르르륵!
그림자의 몸을 꿰뚫은 화살은 마치 타는 듯 끓어올라 티끌만 한 어둠의 잔재마저 모두 태워 버렸다.
마치 작은 태양이 떨어져 내린 듯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어마어마한 영력이었다.
그가 기다리던 영공 원로조차 이런 영력은 지니지 못했다. 이건…….
‘맙소사! 가주다! 가주가 오신 것이야!!! 가주께서 오신 거야!!’
멀지 않은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목숨을 건졌다는 기쁨에 가득 찬 백가 무사가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렇게 시선을 향한 곳에서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백기하가 아니었다.
주가의 여자가 달리는 말 위에 선,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두두두두.
한 발로는 안장도 얹지 않은 말 등에 버티고 서고, 다른 한 발은 말의 목과 이어진 등에 얹은 채 발목에 감은 고삐로 말을 조종 중인 세화가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뒤따르는 누군가에게서 화살을 받아 한 번에 네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있었다.
달려가던 그녀가 또 어딘가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탕!!!
귀를 울리는 듯한 우레가 이어지고 먼 곳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북소리가 울려 왔다.
그 상태로 그녀는 또다시 화살을 넘겨받아 시위에 걸며 거대한 전마를 탄 채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
뒤에 남겨진 무사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제 상황도 잊고 눈을 깜빡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제가 뭘 본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단장의 전갈을 받은 영공 원로는 황급히 무사들을 이끌고 숲으로 달려왔다.
다행히 숲을 온통 헤매기 전에 단장을 만나긴 했으나 먼저 투입됐던 무사들은 벌써 상당히 부상을 입은 후였다.
팔이 끊어진 이도 있었고 얼굴 한쪽이 움푹 팰 정도로 심하게 상처 입은 이도 있었다.
“이, 이게 대체…….”
입술을 떨며 말에서 내린 그가 단장을 향해 뛰듯 다가갔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냥 그림자가 아니냐. 다른 것을 풀어놓은 것이야? 대체 어찌 이런 일이 생겼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분명 처음엔 그 그림자들이었습니다. 허나 점점 몸집을 불리기 시작하더니-.”
“몸집을 불리다니. 지금이 그믐도 아닌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이더냐.”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이것들이 숲 밖으로 나가면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겁니다.”
“!”
“풀어 둔 지 고작 두 시진 정도 지났을 뿐인데 벌써 형체도 힘도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지금이야 빛이 강하니 감히 이곳을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것도 언제 바뀔지 모릅니다.”
단장이 영공 원로를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다시 봉인해야 합니다. 봉인구를 가져오신 겁니까?”
영공 원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틀어졌다는 단장의 전갈을 받고 나선 이게 무슨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는 것만은 빠르게 파악했기에 호위들을 이끌고 와 본 것이다.
뭔가 그들이 잘못 본 거라 생각하고 싶었으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보았던 것이다.
제가 풀어 두라 한 것과 전혀 다른 생김과 크기와 힘을 지닌 삿되고 불길한 그림자를.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이런 것들이 퍼질 줄 알았다면 주가 여자가 아무리 밉다 한들 절대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봉인구를 가져왔으니 일단 이것들로 잡아넣을 수 있는 만큼 잡아넣고-.”
그 순간 맑은 목소리가 영공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그걸로는 불가능할 겁니다.”
“……!”
턱!
짤막한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머리가 관통된 삿된 것이 그들의 발치에 던져졌다.
짐승의 형상을 한 그림자 하나가 몸을 부르르 떨며 엎어졌다.
“이, 이건!”
자수가 선명한 화려한 의상이 바람에 휘날렸다.
안장도 없는 말을 능숙히 올라탄 세화가 바닥에 널브러진 짐승을 향해 눈짓했다.
“그 짐승이 지닌 힘과 봉인구를 비교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