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발걸음은 차마 떨어지지 않았으나 머뭇거릴 수 있는 시간이 없었기에 백기하는 그대로 말에 올라야 했다.
그대가 내게 합류하지 않아도 되도록 빨리 돌아오겠다고.
진중한 약조를 남긴 그가 미련이 담긴 입맞춤을 그녀의 손가락 위에 떨어뜨리고 백가 저택을 떠났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에서 지켜본 세화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세화를 배행한 영무, 영채와 달리 급히 누군가가 찾아 잠시 자리를 비웠던 영선이 빠르게 세화의 옆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시중인들이 제게 이런 말을 전하며 도움을 청해 왔습니다.”
영선이 목소리를 낮춘 채 그녀에게 어떤 말을 짧게 읊조렸다.
요점은, 모시는 백가 주인이 막고 있던 삿된 것들 몇이 백가 사용인의 실수로 달아났다는 말이었다.
발이 빠르고 껍질이 단단한 것들이라 영력을 쓸 수 있는 이가 필요한데, 가주가 없는 상황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들은 큰 벌을 받게 된다고.
하여 비밀리에 그것을 포획하려는데 손을 빌려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고 했다.
“오라면 가야지.”
“그러실 것 같아 무구들을 이미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바로 가 볼게요.”
“그리 급하다는데 네 손 하나로 되겠느냐. 다 같이 가자꾸나.”
눈을 빛낸 세화와 세 자매가 전언이 온 곳을 향해 빠르게 발을 돌렸다.
기대를 벗어나지 않고 곧장 시작하다니.
영선의 말을 들은 세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복도를 오가다 그런 세화와 마주친 사용인들이 제법 놀랍게 바라보았다. 참 이상했던 것이다.
환계의 각 가문의 저택은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 온 만큼 증축과 폐쇄도 각양각색으로 이루어졌다.
하여 누군가 처음 저택에 오게 되면 안에서 헤매게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오래도록 지도를 보고 익혔다 하더라도 실제로 복도를 몇 날 며칠 걸어 보지 않고는 익숙해지기 힘들었고. 헌데.
‘분명 저 주씨 여자는 이곳에 온 것이 처음일 텐데. 그런데도 안내하는 시종 하나 없는 상태에서 어찌 저리 익숙한 듯 저택을 누빌 수 있는 거지?’
시중인들 중 절반은 이미 세화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에서 조금도 굽힐 마음이 없었고.
절반은 몇몇 시녀들이 어제부터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며 잠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지켜보기로 한 상태였다.
하지만 복도를 제집처럼 활보하는 모습이 어찌나 당당하고 위엄있어 보이는지.
그들 모두는 제 앞을 가로지르는 세화와 마주하고 나면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치 시리도록 하얗게 펼쳐진 설원 위 홀로 선 침엽수처럼, 눈을 개안시키는 어떤 우아한 기품이 넘쳐흘렀던 것이다.
‘……아니지. 내가 대체 주씨를 향해 이게 무슨 말이람. 주씨 영역을 간신히 탈출해 이곳에 와서야 산목숨 대접을 받는 주제에.’
몇몇 시녀들은 세화를 향해 그리 시선을 빼앗긴 제 상태를 깨닫고 자조했다.
그런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세화가 관리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몸을 틀었을 때였다.
제일 빠르게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세화의 옆으로 다가갔다.
“어디로 향하십니까, 아가씨. 이 앞부터는 전각을 관리하는 사용인들의 처소라 아가씨께서 혹 길을 찾으심에 어려움을 겪으실까 하여 여쭤봅니다.”
세화의 시선이 곧장 공손히 머리를 숙인 시녀에게로 날아왔다.
“…….”
허나 아무 말이 없었다.
보통 이런 경우 건방지게 제 아가씨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며 시녀가 나서기 마련인데 그런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뭐지?’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 아, 전 청삼로라 하옵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도와주련? 길 안내뿐 아니라 다른 도움도 필요하니까.”
삼로가 흘끗 시선을 올렸다.
흥미롭다는 듯 짙은 적자줏빛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빛나고 있었다.
“어떤, 도움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너 하나로는 조금 부족할 것 같으니, 여기 있는 이들을 모두 함께 가자꾸나. 할 일들이 있을 테지만 그것에 대해선 이후 내가 책임져줄 것이다.”
“……여기 있는 이들 전부, 말씀입니까?”
세화는 두 번 말하게 하느냐 묻는 대신 그저 가만히 삼로를 응시했다.
안색이 창백해진 삼로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원로 어른께서는 분명 이 여자가 이제 막 탈피를 마친 어린것이라 하였는데, 어깨를 온통 짓누르는 듯한 이 위압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비단 삼로만의 느낌이 아닌지 주변에 있는 시녀들 대다수가 창백해진 얼굴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니, 아닙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면 어디로.”
“후원으로 가자.”
세화가 정확히 후원 방향을 턱짓하며 말했다.
그녀와 세 자매가 가는 길 뒤로 십수 명의 시녀들이 뒤따랐다.
* * *
“온다고 한 거 맞지?”
“잘 지내보고 싶다느니. 아가씨께서 가모가 되실 때 전력으로 지지하겠다느니. 누구에게라도 알려지면 우리 모두 당장 쫓겨나게 될 거라느니. 거절하기 힘들게 말은 해 두긴 했지만…….”
“지만?”
“걔네들은 주씨 방계잖아. 사씨들의 콧대도 주씨 못지않은데, 돕는다고 올지 안 올지를 내가 어찌 알겠어.”
이르게 잎색이 변해 가는 백석저의 후원에는 날카로운 얼굴을 한 이들이 여럿 서 있었다.
정원을 사이에 두고 저택의 반대편에는 만년설산과 이어진 침엽수림이 너르게 펼쳐져 있었다.
그 숲 안쪽 먼 곳에서 미약한 말발굽 소리가 이어졌다.
말발굽 소리가 들릴 때마다 부산한 시선들이 더욱 자주 후원으로 통하는 입구를 향했다.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게 더 나으려나?’
초조한 얼굴들이 다시 한번 서로에게 시선을 맞출 때였다.
자박자박.
정원의 흙을 밟는 발걸음 소리가 드디어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여 있던 이들이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왜 이제야 왔-!”
“내가 너무 늦었니? 미안하구나.”
“아, 아가씨!”
눈을 동그랗게 뜬 이들이 당황하여 눈만 깜빡였다.
분명 하나만 들려와야 할 발소리가 끝없이 이어진 것도 모자라 제일 앞에서 걷는 이가 주세화 본인이었던 것이다.
“아, 아가씨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게, 게다가 이 많은 이들은 왜 갑자기 이곳까지…….”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 않았니.”
“네? 하, 하지만 그건 제가 아가씨의 시녀분께만…….”
“그게 무슨 말이냐. 위급한 일이 있다면 손을 가리지 않고 도와야지. 얼마나 마음이 급했으면 서로 잘 알기는커녕 어떤 영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내 시녀에게까지 도와달라 청을 넣었겠어.”
“아니, 그게……. 그게, 저희가 청을 넣었던 건 그런 이유가 아니오라……. 그러니까 영력의 사용이 자유로운…….”
“괜찮다. 한시가 급한데 더 말을 보탤 것 없다. 어서 일을 해결하러 가 보자꾸나. 내 직접 볼 것이니.”
“……아, 아가씨.”
“비키라 하였는데도.”
그럼에도 세화의 앞에 선 시녀가 머뭇거리기만 하고 움직이지 못하자 세화의 시선이 단번에 날카로워졌다.
“한시가 급하다 하지 않았더냐. 무언가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갑자기 어찌 이리 미적거려!”
“읏. 저는, 저는 그런 것이 아니오라.”
“비켜!”
세화의 기에 눌린 시녀가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긴장한 후원 안 모든 이들이 잠시 움직임을 멈춘 채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저 먼 곳에서 울리는 미약한 크기의 말발굽 소리들이 더욱 선명히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곳을 응시하고 있던 세화가 영무에게 조용히 명령했다.
“말을 가져오렴. 찾는 이들의 기척이 저기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우리도 말을 타야겠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시녀가 다시금 조용히 끼어들었다.
“아가씨. 정, 말 직접 가시렵니까? 이건 저희끼리 해결해도 되는 일인걸요…….”
게다가 이 여자가 말을 탈 줄은 아는 것일까?
주가의 여인들이 짧은 거리라 할지라도 가마를 꼭 이용한다는 사실은 환계에 공식처럼 퍼져 있는 이야기이건만.
입꼬리를 끌어 올린 세화가 일부러 그들을 가장 자극할 수 있을 단어를 꺼내 들었다.
“그럼, 당연하지. 나는 너희들의 가모가 될 몸이 아니냐. 어떤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지.”
“……!”
그 말에 세화를 둘러싼 이들의 시선에서 온기가 일제히 사라졌다.
‘……자기 입으로 벌써부터 가모라 내뱉다니.’
그래. 어차피 시녀를 먼저 끌어들이려 했던 건 결과적으로 이 여자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추락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계획했던 것과 일이 조금 달라져 우왕좌왕하긴 했으나 한 번에 한 계단을 오르든. 두 계단을 오르든. 오르기만 한다면 결론적으로는 달라질 것이 없는 얘기였다.
마침 세화의 명을 받았던 영무가 그들이 반색할 말을 해 주었다.
“아가씨, 송구하지만 제가 아직 마구간이 어디인지를 숙지해 놓지 못했습니다. 제 잘못이니 뭐라 나무라셔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세화가 없는 동안 주명윤과 천수아의 시중을 들어 왔던 이들이 마구간의 위치를 모른다는 건 누가 들어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건수를 노리고 있던 이들은 그 말에 덥석 미끼를 물었다.
“하면 아가씨, 제가 가서 말을 가져오겠습니다.”
세화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몇몇 시녀가 저택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그들이 돌아왔을 땐 하얀 갈기를 늘어뜨린 거대한 흑마의 고삐가 손마다 쥐어져 있었다.
“아가씨, 이를 어쩌지요. 저희가 다른 순한 말을 찾아오려 했는데 백가 기마단 분들께서 언제 순찰을 나가신 것인지 죄 이런 전마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백가의 시녀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떨며 고했다.
저런 전마들을 시녀들이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 일이 그들보다 더 위에 있는 누군가의 지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줄도 모르고.
헛웃음조차 내뱉지 않은 세화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발 앞으로 다가갔다.
“성정이 사나운 이런 전마를 귀하신 아가씨께서 타실 수는 없으실 테니 제가-.”
“고삐를 이리 다오.”
“……예?”
들은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던 시녀가 되물었다.
“이 말을 타시겠다고요?”
히히히힝―!!
보통 이런 전마들은 주인이 있었고 주인의 명밖에는 듣지 않았다.
시녀들도 원로에게서 미리 전달받은 도구가 아니었다면 말들을 데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세화가 시녀의 손에서 고삐를 낚아채자마자 거대한 흑마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두려울 정도로 위협적인 기세에 백가 시녀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혹시나 말발굽에 채기라도 할까 봐 시녀들이 서둘러 뒤로 물러섰을 때였다.
격하게 요동치던 전마가 제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이 풀리지 않자 세화를 앞에 두고 앞발을 치켜들었다.
히히히히잉―!!
“꺄아악!!”
그녀들도 이런 일까지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
이어질 끔찍한 장면을 차마 보지 못하고 시녀들이 일제히 눈을 감았을 때였다.
갑자기 모든 소리가 끊어져 버리더니 사방이 고요해졌다.
‘……?’
아무리 기다려도 뭔가가 부러지거나 터지는 소리라든가, 말이 다시 날뛰는 소리 같은 것이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어찌 된 거지? 말이 주씨 여자를 빗겨 가기라도 한 건가?’
무슨 상황인지를 확인하려 그들이 슬쩍 눈을 떴을 때였다.
시녀들은 일제히 거대한 전마 위에 앉아 별꼴을 다 본다는 듯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세화 일행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뭐, 뭐지? 이게 대체…….
아니. 저 명계에서 올라온 듯 사나운 전마들이 왜 저리 순한 양처럼 두드림을 받고 있고…….
“너희는 전혀 서두를 기색들이 없으니 먼저 가 보겠다.”
세화가 모여 있는 이들을 한눈에 훑으며 일갈했다.
“내 너희의 얼굴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낱낱이 기억해 두었으니, 너희 역시 곧장 말을 찾아 우릴 따라와야 할 것이다! 아니라면 너희 태도의 수상함을 내 가주께 반드시 알릴 터이니.”
“!”
그 말과 함께 세화가 세 자매를 이끌고 말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던 것인지를 몰라 당황한 이들을 뒤에 두고.
마치 오랫동안 세화와 손발을 맞춰 온 양 작은 움직임에도 정확히 목적지를 알아챈 전마가 후원 끝에 이어진 숲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