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254)

* * *

“그걸 꼭 지금 가야 합니까? 내가?”

이른 시간부터 찾아온 영공 원로의 말을 듣고 백기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난 곧 등극식에 가기로 한 걸 아실 텐데요?”

“오래도록 자리를 비우시지 않으셨었습니까. 가주와 재상의 부재를 메꾸기 위해 저 역시 제 영지를 떠나 이곳에 있느라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요.”

“…….”

“주가와의 일전에서 방파제 역할을 하며 피해를 가장 많이 본 곳이 아닙니까. 가주께서 한번 살펴 주시는 것만으로도 그곳의 이들이 많이 기뻐할 것입니다.”

“…….”

이른 아침부터 백기하에게 찾아온 백심중은 제가 다스리는 영공 지방에 한번 시찰을 나가 주십사 청해 왔다.

백가의 거대한 영지는 열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가주가 머무르는 백석저를 중심으로 한 중앙 영지를 제외하고 나머지를 열 명의 원로가 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백심중이 시찰을 부탁한 영공 지방은 주가와 경계를 맞대고 있던 만큼 오랜 전쟁에서 가장 큰 무리가 가해진 곳이긴 하였다.

그러니 가주가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을 때 그곳을 돌아봐 달라고 말한 백심중의 말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주가와 배상품 목록을 상의하느라 돌아보지 못했고, 그 이후에는 세화를 만나러 주가로 넘어가느라 한번 살피지 못한 것이다.

“나는 등극식에 참석할 준비를 하느라 짬을 내기 어려우니 만용이를 보내겠습니다. 재상의 성정이 꼼꼼하고 다부지니 부족함 없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상의 방문이 어찌 가주의 방문과 같겠습니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선 등극식 이후 또다시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분명 영공의 피해가 반복될 텐데 미리 한번 살펴 주십시오.”

“이해가 되지 않는데.”

백기하의 시선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탁자 위에 그대로 걸터앉듯 몸을 기댄 채 성의 없이 상판을 툭툭 두드렸다.

“약간의 교전이야 몇 차례 있긴 하였으나 그것은 변경 영지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가의 영토를 중강변까지 빼앗아 왔고 그 과정에서 백가 영토의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는데 어떤 피해를 얘기하며 날 영지로 보내려 하는 겁니까?”

“그건.”

백심중이 곧장 대답하려 할 때였다.

탁자 상판을 두드리던 움직임이 멎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백심중을 향해 날아왔다.

“대답을 잘하셔야 할 겁니다, 영공 원로. 내가 어제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다.”

“……!”

“나는 말입니다. 원로.”

백기하의 목소리가 확고하게 제 감정의 모양새를 드러냈다.

“나는 그동안 모자람 없이 백가를 위해 헌신했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도 나 자신만을 위해 무언가를 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견을 가질 수 없다고 여기고요.”

“…….”

“하니 내 옆에 설 이만큼은 내가 정할 겁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내 판단에 따라 결정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

“지금 내가 더 단호히 이 일을 처리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난 시간 동안 백가를 충심으로 위해 주신 원로들의 입장을 고려하기 때문입니다. 그조차도 원로들께서 선을 넘으신다면 어찌 될지 모르지만요.”

“…….”

“하니 한 번 더 말씀해 보십시오. 이렇게까지 말씀드렸음에도 내가 영공 지방에 지금, 가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

영공 원로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지금 가주는 제가 지금 시찰을 청하는 이유를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일부러 문제를 만들어 그로 인해 일이 생긴다면 그를 처벌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네.”

한 번 깊게 눈을 감았다 뜬 영공 원로가 백기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가 하시지 않는다면, 예비 백가 가모의 자질을 온 백가 혈족이 알 수 있도록 일을 치는 것은 자신이 할 일이었다.

백기하의 시선이 오래도록 그에게 머물렀다.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백기하도 결국엔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원로께서도 내 말을 명심하셨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칼날처럼 예리한 검은 동공이 노인의 것과 부딪쳤다.

“내가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 * *

“이 중요하고 급한 시기에 일이 이리되어 미안해.”

오전이 지나기 전 급히 세화의 방으로 들어온 백기하가 그렇게 말했을 때, 세화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다녀와요.”

“…….”

“왜요?”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거야? 이대로 떠나면 삼 일 후에나 볼 수 있어. 그것도 그대가 백가 영지를 나서 영공 지방 쪽으로 와서 합류하는 식으로.”

“응. 이해했어요.”

“…….”

“또 왜요.”

“……아니야.”

“아닌 게 아닌데. 뭐예요. 왜 그래요. 신경 쓰이니까 빨리 말해 봐요.”

“……그대는 나와 떨어져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거야?”

백기하가 딱딱한 어조로 세화에게 물었다. 모를 수 없는 실망감을 가득 품고서.

어린애 같은 질문이었으나 세화는 그걸 듣고 웃거나 타박 주지 않았다.

그의 등 뒤로 돌아가 단단한 허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

“아무렇지 않을 리가 있나요.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부터 빨리 보고 싶을 텐데.”

하지만 세화 역시도 굳이 그 영공 원로가 이런 시기에 백기하를 떠나보내려 한 이유를 모를 수가 없었다.

‘사실 그 원로가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려 하기도 했고.’

일이 쉬워지기 위해서는 이 남자가 잠시 이곳에서 멀어져 있는 편이 나았다.

세화가 날카로워지는 제 시선을 숨기고 장난스레 덧붙였다.

“그래도 당신이 계속 여기 있으면 잠을 잘…… 못 잘 것 같으니까요.”

“잠을? 왜.”

“……그야.”

“…….”

“그야, 마음이란 게 어찌나 간사한지 이리 급박하고 중요한 시기에도 당신이 옆에 있으면 자꾸 닿고 싶고…….”

삽시간에 남자의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부모님이 계신데도 자꾸 끌어안고 싶고.”

“…….”

“그러니 빨리 와요. 보고 싶을 테니까.”

그를 있는 대로 자극해 놓고 그녀를 마주 끌어안으려 백기하가 돌아서자마자 세화는 그의 허리를 놓고 달아났다.

한달음에 달려온 백기하가 그런 세화를 들어 올렸다.

미처 결계를 치지 않은 창호 문 너머로 짤막한 웃음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다.

복도로 나와 있던 세 자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닫힌 방문을 돌아볼 정도였다.

* * *

저택 입구 인근 전각 상층 창가에 선 영공 원로의 손이 안으로 말려들었다.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곳에서 그의 가주가 말에 오르고 있었다.

배웅을 나온 이는 주씨 여자와 그 시녀 둘 뿐이었다.

백만용이 시찰을 떠나는 가주의 배웅을 나오지 않은 적은 없었다.

하니 주씨 여자로만 구성된 저 배웅 인원은 온전히 가주의 뜻일 터였다.

시기가 급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러 가지 해결할 일이 많아 한시가 바쁜 상황일 텐데.

그럼에도 가주는 주씨 여자와 떨어지는 것이 못내 힘겨운지 출발을 늦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방 한쪽을 향해 턱짓했다.

신호를 받은 제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주씨 여자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이젠 알았으니, 효성 아가씨를 위해서라도 이번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뜬금없이 그 녀석 얘기는 뭐 하러 꺼내느냐. 주가 계집이 머리 굴리는 게 보통은 아니라 한들 그뿐이지. 이제 막 탈피한 어린것 주제에 도와줄 이가 없으면 영력 운용이나 제대로 하겠느냐. 어서 가 보기나 해라.”

“예, 영공 원로 어른.”

제문주가 빠르게 방을 나선 이후에도 영공 원로의 찌푸려진 미간은 쉬이 펴지지 않았다.

제문주가 제 딸을 언급한 일이 불쾌했던 것이다.

“……갑자기 그 녀석의 이름은 왜 꺼내 가지고.”

“아버지! 전 꼭 그 사람과 혼인할래요. 행복할게요. 꼭 행복할 테니 혼인하게 해 주세요. 네?”

육가의 이름으로 뭉쳐 주가에 검을 들이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아무리 연이은 실종 사건이 있다고는 하나 환계의 지배자였던 주가에게서 등을 돌리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 육문을 설득시킬 수 있었던 건 영공 원로가 그간 필사적으로 조사해 모아 둔, 주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들 덕분이었다.

그가 그런 것들을 조사하게 된 것은 딸 때문이었고.

“그 바보 같은 녀석.”

그의 부인은 예전 주씨와 시비가 붙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주씨가 손을 사납게 놀리는 바람에 원신이 손상되어 아이를 갖기가 힘들었다.

하여 늘그막에 간신히 얻은 딸아이가 얼마나 소중했던가.

그런 딸이 어느 날 주가 사내를 제 짝으로 맞이하고 싶다며 선을 보인 것이다.

부인의 일도 있었기에 주씨라는 소리를 듣고는 전혀 허락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딸과 자신이 살아있는 한 늘 딸을 사랑하고 아끼겠다는 맹세를 진중하게 거듭하는 사내를 계속 반대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그래. 모든 주씨가 다 나쁜 건 아닐 테니까.’

그런 마음으로 오랜 고심 끝에 혼인을 허락했다.

그리고 고작 삼 년이었다.

혼인해 주가로 넘어간 이후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아 영공 원로 부처를 전전긍긍하게 했던 딸은 삼 년 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의식도 없이 돌아왔다.

그때 그 탈출을 도와준 것이 제문주였다.

제문주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온 딸은 회임한 상태였는데, 문주의 말에 따르면 딸은 신분패도 빼앗겨 주가의 영지를 탈출하기 위해서 커다란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고 했다.

딸은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원신이 파괴되어 있었다.

그 이후 십이 년간 한 번도 깨어나지 못한 채였고.

영단들을 사용해 간신히 목숨을 이어가고는 있었으나 평생 깨어나지 못할 딸을 이대로 붙잡아 두는 것이 맞는지 시간이 갈수록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딸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부인마저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나자, 분노한 영공은 백가 원로의 이름으로 주가에 항의 서한을 넣었다.

하나 수십 통에 걸친 서한에도 불구하고 주가에선 한 번도 답변이 오지 않았다.

사위의 가문에 찾아가기도 했으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문전 박대를 당해야 했다.

“그때는 그리 사랑했지요. 하지만 결국 마음은 변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인데, 그 이치를 제가 어쩌겠습니까.”

몇십 번의 방문 끝에 얻어 낸 답변은 고작 이런 것이었다.

‘그래도 모든 주씨에 대해 분노를 태우지는 않으려 하지 않았나.’

그런 과거가 있었음에도 영공 원로는 대의에 따라 주명윤 부처를 백가의 품 안에서 비호해 줄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비록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성품이라 하여도 주명윤의 딸 역시 주가 신영과 대적하는 입장이라고 들은 이상 충분히 백가에서 비호해 주었을 것이다.

주씨가 주제를 모르고 백가의 가모가 되려고만 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괜히 딸의 상황만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 영공의 눈빛이 서글프게 가라앉았다.

그 이후로 시작된 주가와의 전쟁도 끝났겠다.

……자신도 이제는 딸을 더 힘들게 하지 않고 놓아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 눈꼴신 주가 계집을 쫓아내고 내면 그렇게 할까.”

마음 아픈 생각을 이어가던 영공 원로가 고개를 털어 생각을 지웠다.

지금 생각할 일이 아니다.

지금은 눈앞에 닥친 일을 먼저 처리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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