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254)

* * *

풀벌레 소리마저 쉬어 가는 늦은 밤이었다.

만년설의 흰 빛을 삼켜서일까.

유난히 노란빛을 잃고 하얗게 떠오른 커다란 달이 밤하늘 위에 넓게 몸을 펴고 앉았다.

이곳은 주가 영지보다 기온이 한참은 더 낮은 듯했다.

서늘한 바람이 활짝 열어 둔 창을 통해 방 안 가득 흘러들었다.

늦게까지 여러 가지 걱정에 쉬이 잠들지 못한 세화는 창 너머로 보이는 하얀 달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러다 새벽녘이 가까워서야 간신히 눈을 붙였다.

초조한 듯 때로는 가쁘던 호흡은 시간이 지날수록 평온해졌다.

얇은 눈꺼풀 아래로 보이던 눈동자의 움직임마저 사라졌을 때였다.

분명 결계를 단단히 치고 잠자리에 들었건만 소리도 내지 않고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고요한 방 안의 상황을 확인한 후, 조심스레 스미듯 내부로 몸을 들였다.

그림자는 커다란 침상 위에서 편히 잠을 자고 있는 세화에게로 점차 다가왔다.

그리고 긴 팔을 그녀에게 뻗을 때였다.

“이 늦은 시간에 자지 않고요.”

“!”

조금의 잠기운도 스미지 않은 목소리가 세화와 그림자 사이를 날았다.

당황한 그림자가 망설이다 침상 옆에 조심히 앉았다.

“……안 잤어? 난 그대가 자는 줄 알고.”

긴 속눈썹 아래로 검게 음영 진 세화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잠이 잘 안 와서요.”

“……형님들 걱정 때문에 그래?”

백기하의 커다란 손이 침상 위에 누인 그녀의 가늘고 긴 손을 쥐었다.

“그것도 있지만.”

세화가 따뜻한 그의 손을 엄지로 잠시 문질렀다.

“그냥 원래 잠이 그리 많지 않아요.”

“…….”

“왜요?”

“……미인은 잠이 많다던데, 그대는 잠이 없는 걸 보니…….”

찰싹!

그의 손 아래에서 제 것을 빼낸 세화가 아프지 않게 그의 손등을 내리쳤다.

둘의 입가로 나직한 웃음들이 새어 나왔다.

백기하가 세화의 손을 다시금 움켜쥐었다.

“형님들은 무사하실 거야.”

“응. 알아요.”

그녀가 그의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당신이야말로 왜 여기 왔어요? 이 밤에.”

답을 아는 질문이었다.

그는 종종 이렇듯 그녀의 상태를 살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듯 굴었으니.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데다가 지난번에 백가로 왔을 땐 잠깐의 회의 후 하룻밤을 지낼 새도 없이 바로 떠나지 않았던가.

오늘이 그녀가 돌아오고 백가에서 맞이하는 첫 밤이었으니 예전의 기억이 있는 그는 더욱 신경 쓰였을 것이다.

‘날 살피는 것만큼 자기 몸을 조금만 더 신경 쓰면 좋을 텐데.’

“……그냥. 낮에, 조금 소란이 있었던 걸 알아서. 와 봤어.”

미리 더 재빨리 손을 써 놓지 못해서 미안해서 와 봤다고.

그의 목소리는 목이 아픈 사람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선명히 드러난 어떤 죄책감에 그녀가 상체를 일으켰다.

“왜 그런 말을 해요. 당신이 한 게 아닌데.”

“하지만 예전 일을 모르는 것이 아니면서 내가 너무 무르게 군 것 같으니까.”

그녀에게 많은 일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건 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 곧장 백가에서 영체인 송곳니를 가지고 왔고.

그녀의 어머니와 오라버니들을 구하러 주가의 영토를 오가야 했다.

백가로 향한 이후에도 잠시도 쉬지 못하고 인간계에 가야 했다.

그리고 교룡과의 싸움이 환계로 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내도록 결계를 세우고 있다가 이제 막 백가 영지로 돌아온 참이니.

“당신도 조금도 쉴 틈 없이 힘들었으면서 무슨 소리예요.”

세화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거기다 그런 것까지 당신이 해 주지 않으면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아요? 그건 날 너무 얕보는 건데.”

“그런 생각은 아니야. 그저 난.”

백기하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욱 낮아지자 세화가 더 당황했다.

자신이 그렇게 말하면 이 남자가 맞다고, 하마터면 그녀를 과소평가할 뻔했다고 이리 대답할 줄 안 것이다.

하지만 백기하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부재가 오래되어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산적된 채 그를 기다리고 있긴 했다.

하여 만용이를 통해 모든 원로들과 전각 관리인들에게 협박으로도 들릴 수 있을 만한 엄포와 당부를 넣어 놓긴 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과거에 내 혈족들이 그녀에게 어찌했는지를 알면서도 그리 쉬이 처리하려 했다니.’

그녀의 방에서 있었던 소동이 전해지자마자 밀려드는 죄책감은 그 스스로가 어쩌지 못하는 정도였다.

백기하가 여전히 차마 무어라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 제 입 근처로 끌어 올렸다.

‘이런 바보 같은 당신을, 나야말로 어쩌면 좋을까.’

그런 일에 당신은 내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는데.

당신은 이미 아무것도 내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낸다 한들 그에겐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여 세화는 말 대신 형태가 선명한 단단한 마디마다 천천히 입술을 눌렀다.

남자의 목소리가 어디서 끊겼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누구도 아무 말이 없는 방 안의 공기가, 열어둔 창에도 불구하고 점점 온도를 올리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눈을 들자 그가 한 번 깜빡이지조차 않는 검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자꾸 하니까 잠이 안 오는 거잖아요.”

아스라한 달빛 속에서,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하얀 침의로 감싸인 팔을 벌렸다.

“할 수 없네요. 이리 와요. 잠이 안 오면 내가 안아 줄게요.”

원래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도록 정해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말에 단번에 가까워진 뜨거운 입술이 열감 어린 호흡 사이에서 그녀의 것과 겹쳐졌다.

입술이 마주 닿은 순간부터 모든 이성이 흐려졌다.

뒤엉킨 팔들이 서로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어딜 어떻게 긁히고 부딪힌 걸까.

소리가 되지 못한 여러 말들이 숨들 사이에서 뒹구는 동안. 정신없이 서로의 호흡을 들이마신 입술 사이로 피 맛이 났다.

그녀의 입안으로 밀려 들어온 것이 치열 사이를 휘젓고 내벽을 긁어내렸다.

등줄기가 쭈뼛해질 정도로 선명한 감각이 온몸을 치고 지나갔다.

순간 몸을 뒤로 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고 오히려 저를 끌어안은 단단한 몸을 더욱 힘주어 안았다.

그녀야말로 이 남자를 더욱 단단히 손에 넣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는 어떻게 하면 더 깊게 뒤섞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듯 여러 번 각도를 바꿔 가며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씹히듯 빨린 입술과 세차게 빨린 혀가 아릴 정도였다.

있는 힘껏 끌어안긴 피부 역시도 금방 붉은 자국을 드러냈으나 그는 그조차도 모자란 사람처럼 욕설 같은 말들을 삼키며 큰 손에 힘을 줬다.

모든 일에 신중한 그가 가장 감정을 강하게 드러낼 때는 항상 그녀가 얽혀 있었다.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인생에도 지금껏 특별하게 소중한 이들이 많았는데.

‘……어째서 이 남자는 이토록 다른 걸까.’

거친 움직임에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는 제 모든 곳을 내주었다.

이 남자가 목숨을 걸고 시간을 되돌려주었지만 준비된 미래는 밝지만은 않았다.

주가와 또 한 번의 결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적인 상황도 그러했고.

이 남자는 믿을 수 없는 무력을 지녔으나 영력에 문제가 생겼다.

그녀 역시도 전무후무한 힘을 지녔으나 힘을 사용할수록 제 존재를 잃어 갈 것이다.

그런 그들이니 신영이나 교룡의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해도 결국 분명 둘 중 한 명에게는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 자명할 수밖에.

하지만.

“무슨 생각해.”

무던히 낮아지고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물었다.

마치 낙인을 찍듯이 그는 쉬지 않고 그녀의 온 얼굴 위에 제 입술을 찍었다.

몸서리쳐질 정도로 뜨거운 호흡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결국엔 휩쓸려서 그와 함께 쓸려 내려가지 않을 수 없는 강도로.

어느새 그녀의 침의 매듭은 완전히 풀어져 있었다.

큰 손이 얇은 천을 벗겨 냈다.

달빛 속에 드러난 흰 어깨를 매만지다가 소담하게 솟은 가슴 위를 움켜쥐었다.

끄트머리가 그의 손에 잡히자 그녀가 애처롭게 몸을 떨었다.

깜빡이지 않는 눈꺼풀 아래로, 월식 같은 새까만 눈동자가 집요하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은데 깨닫고 보니 어느새 치마마저 치워진 맨몸이었다.

투명할 정도로 하얀 살결이 돋보이는 그녀의 몸이 마치 물 위로 떠오르듯 드러났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도 지체 없이 남자의 옷깃 속을 파고들었다.

손 아래로 단단한 피부를 느끼며 팔을 뻗자 긴 침의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며 벗겨졌다.

날이 춥다고 여기진 않았는데 바짝 달아오른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제 피부만 그런 줄 알았더니 이 남자의 상태 역시도 다르지 않았다.

“언제 혼인할 거야.”

커다란 두 손으로 그녀의 몸을 세차게 끌어안은 그가 초조하게 속삭였다.

“언제 나와 혼인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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