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254)

어, 어떻게 저런 악귀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나.

누가 주씨가 아니랄까 봐. 명왕도 놀라게 할 만큼 잔인한 말을 어떻게 저리도 아무렇지 않게…….

주씨에 의해 핍박받았던 어린 시절을 여전히 뼈에 새길 정도로 선명히 기억하는 이들 사이로 격한 공포감이 스쳐 지나갔다.

주씨들은 정말로 한다는 걸, 그들에게 주씨 이외의 환족은 그저 쓰레기에 소모품이라는 사실을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력으로 영력을 사용해 문을 부수고 달아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들의 가주께서 무려 가모로 삼으시겠다고 모셔 온 이인데. 아예 백가 밖으로 달아날 게 아닌 이상에야 얼굴을 다 알려 놓고 어디로 가겠는가.

‘게다가…… 저 힘은 대체.’

그런 스스로의 상황을 계산했으면서도, 일단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그녀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열의 없이 창가에 앉아 있는 듯한 아가씨의 가녀린 어깨 위로 오색의 영력이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넘실대고 있었다.

마치 등을 돌리기만 해도 쏜살처럼 날아와 단번에 그들의 발목을 낚아챌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힘의 파동이 허공에서 제 모습을 위협적으로 드러냈다.

시녀 하나가 바싹 마른 입술을 이로 물었다.

“……제가!”

어떻게든 이 자리를 정당히 벗어날 핑계를 찾다가 결심한 듯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열었다.

“제, 제가 그 향라차에 대해 알고 있다는 이를 데려오겠습니다.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세화의 시선이 잠시 목소리를 낸 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 제가 그를 데려오겠습니다.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어떻게든 끌고 오겠으니, ……그러니 저희들을, 아니 저는 풀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고개를 조아린 그녀가 필사적으로 더듬듯 덧붙였다.

“을지 역시도 제가 몰랐다고 하였으니 저는 이만 풀어 주시면…….”

그렇게만 해 주시면 그이를 곧장 잡아다 아가씨의 앞에 꿇어앉히겠다고.

그자도 공범이 틀림없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시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세화가 눈을 휘었다.

“그래. 네 말이 일리가 있구나. 죄가 없는 이를 잡아 둘 수는 없지.”

하지만 그 긍정의 응대에도 불구하고 시녀는 화색을 띄우긴커녕 시선조차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내리깔았다.

“하지만 결국 네가 가져온 차를 마시고 내가 큰 탈이 날 뻔했잖니.”

“…….”

“몰랐다는 네 말을 다 믿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풀어 줄 수 없는 내 입장도 네가 이해할 거라 생각한단다. 그렇지?”

말투는 나긋했고 시선에는 훈풍이 가득했음에도 갈수록 뱀 앞의 쥐가 된 듯 온몸이 움츠려졌다.

겁먹은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몸을 떠는 시녀를 응시한 세화가 빙긋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너도 이 일을 무마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일을 하나 해 주어야겠구나.”

“……무, 무슨 일을 하명하시려 합니까?”

세화의 무심한 목소리가 가볍게 흘러나왔다.

“새를 기를 때 말이다. 빠져서 날리는 깃털이 제법 번거롭지. 그거 아니? 이 손바닥에 올라갈 만한 크기의 작은 새 한 마리에게서도 깃털이 꽤 빠진단다.”

하여 매번 깃털을 치우는 것보다 더 간단히 번거로움을 해결할 방법이 있지.

“그 방법이 뭔지 아니?”

“…….”

탁자를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리던 세화가 대답을 못하고 저를 올려다보는 시녀를 보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목을 쳐야지.”

깃털이 날릴 틈도 없이 단번에 목을 자르고 시체를 창밖으로 던져야지.

그리 말하는 맑고 상냥한 목소리를 들으며 시녀들이 일제히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 *

“하여 시중인들을 그리 발탁할 예정입니다. 가주께서 가모가 되실 아가씨에 대해 신신당부를 주셨으니 영공 원로께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 주의 부탁드립니다.”

“가주의 명인데 여부가 있겠느냐. 한데 만용아. 너도 그 아가씨께서 가모로 서시는 것에 대해 찬성하는 것이냐?”

“찬성하다마다요. 저는 저희 가주와도 비견되실 만큼 그렇게 빼어나게 뛰어난 능력을 갖추신 분을 처음 봅니다. 원로께서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마주하는 이들의 혼을 앗아갈 만큼 아름다운 그분의 외형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는 거대한 영력의…….”

“조용히 좀 해 보거라. 그럼 만용이 너도 그 주가 아가씨의 능력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 그저 활 조금 쏘는 것만 보았다며?”

“네, 뭐. 완벽하게 능력을 사용하시는 것을 본 것은 아니긴 하지만……. 한데 왜 그러십니까? 원로 어른께서는 주가 아가씨께서 가모가 되시는 일에 반대라도 하시는 겁니까?”

“…….”

“그러시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영공 어른께서도 이후 보시면 아시겠지만 가주께서 아주 마음을 쓰고 계신다는 걸 모를 수가 없습니다. 저는…… 가주가 그리 웃으시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 나 역시 그분께서 무거운 어깨의 짐을 때때로 내려놓고 쉬실 수만 있다면 그렇게 만드는 상대가 누구라 해도 전혀 상관이 없구나.”

키가 큰 노인의 길고 마른 턱이 연신 위아래로 끄덕였다.

“조건이 조금 부족하고 가주께 못 미치면 뭐 어떻겠느냐. 우리가 충심으로 보필하여 받쳐 드리면 되는 것을.”

오래도록 외롭게 지내신 가주께서 누군가를 마음에 두셨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신은 더 바랄 것이 없다며.

노인이 낮은 목소리를 쏟아 내자 백만용의 눈빛에 경탄이 스치고 지나갔다.

“역시 영공 원로이십니다. 제가 괜한 염려를 했군요. 하면 전 시중인을 뽑고 등극식 참석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만용이 네가 고생이 많구나. 어서 가 보거라.”

제 용건을 마친 백만용이 노인에게 묵례한 후 복도 저편으로 바쁘게 사라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백가의 십원로 중 하나인 영공 원로 백심중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하지만 그게 주가면 안 되지. 주씨만은 안 되지.”

정면을 빗겨 간 그의 시선이 복도 한편을 향했다.

“차를 가져다주었느냐.”

“그…… 그게.”

기둥 뒤에서, 조금 전 시중인들을 자극하며 의견을 모으던 제문주가 낭패감 어린 얼굴을 하고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 * *

“실패, 했다고? 고작 차를 마시게 하는 일인데?”

“면목 없습니다. 사용인들을 자극해 주가 계집을 핍박하기로 하는 데까지는 분명 의견을 잘 모았습니다만…….”

“의견을 모은 게 뭐! 실제로 뭘 했어야 성과가 있는 거지! 어쩌자고 초장부터 일을 이따위로 만들어!”

탕!

주름진 손이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이러다 그 주가 계집이 정말로 제 반반한 얼굴을 내세운 채 백가의 가모 자리에 앉는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네가 책임지기라도 할 것이냐?!”

그는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연이어 몇 번 더 탁자를 내리쳤다.

영공 원로 백심중의 시선이 허공을 험악하게 긁어내렸다.

조금 전 가주가 돌아오실 때였다.

버선발로 마중 나간 백만용과 달리 그는 건물 안에서 그 일행들의 귀환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 가주가 한갓 어린 주가 계집을 마치 수행하듯 친히 동행하여 다닌 것을 믿을 수 없어서였다.

‘백가의 가주가, 육문 연합의 수장이 어떻게 주씨 따위를!’

하지만 더욱 믿을 수 없고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건물 상층에서 내려다보는 어린 계집은 백만용이 호들갑을 떨 정도로 빼어나게 아름답긴 했다.

하지만.

‘……저리 웃으시는 분이 우리 가주가 맞으신 건가.’

몰라볼 수 없는 뜨거운 시선으로 계집을 바라보고 있는, 긴 시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가주의 모습이 그를 제일 놀라게 했다.

충격에 휩싸인 채 백심중이 그 장면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어린 계집이 고개를 틀었다.

날카로운 적자줏빛 눈동자가 조금의 방황도 없이 위로 돌려지며 정확히 백심중을 응시했다.

“!”

순간 움찔한 그가 하마터면 뒤로 물러설 뻔한 몸을 간신히 굳히고 섰다.

잠시간 그를 응시하던 적자줏빛 시선은 곧 정면으로 돌아갔으나 어째서일까.

잠깐 시선이 맞닿은 것일 뿐인데 영공 원로 백심중이 느끼는 불안감은 더욱 몸집을 키웠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주가의 횡포가 더욱 거세었고 백심중 또한 그 시기를 맨몸으로 헤쳐 왔다.

이제 드디어 후안무치한 주가의 힘을 조금이나마 꺾어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주가는 제 핏줄을 백가에 붙이며 이런 식으로 또다시 권력을 탐하려 하는 건가?

‘절대로 그 꼴만은 볼 수 없지. 절대로!’

그렇게 이를 악물며 다짐했건만 초장부터 일이 제대로 실행이 되지 않았다 하니 그의 속이 뒤집힐 수 밖에.

“차 몇 잔 마시게 하는 것이 뭐가 어렵다고! 네가 이런 식으로 무능을 드러내는데 내가 어떻게 널 중용할 수가 있겠어?!”

“…….”

제문주가 참담하게 고개를 숙일 때였다.

작지만 다급한 기척이 가까워졌다 싶더니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덕근이었다.

“영공 어른. 큰일 났습니다!”

“또 뭐냐.”

“주가 계집의 전각 근처에 피워놓으라 하신 나매향을 그 주가 계집 본인이 전부 가져갔답니다. 심지어 발칙하게 가주의 명이었다고 하면서요.”

“뭐야?! 아니, 제가 뭐라고! 게다가 그걸 그년이 왜!”

나매향은 백가 영지를 둘러싼 설산의 만년설 사이에서만 자생하는 특수한 풀로 만든 향이었다.

이를 태우면 무취의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연기에 익숙해지면 마음을 진정시키거나 심기를 안정시키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구토와 두통, 소화불량, 불면 등을 유발하며 원인불명의 지병처럼 보이는 증상을 만들어 냈다.

향에 익숙한 이들을 시켜 그 전각 마루 아래, 곳곳에 두고 오라 하려 했건만.

‘뜬금없이 그 계집이 대체 그걸 왜 가져가. 그 향이 뭔 줄 알고! ……아니지. 혹 가주께서 알려 주신 건가?’

“그것이…….”

그때 또다시 작은 발소리가 이어지더니 향라차를 함께 들고 주가 계집의 방에 들어가게 했던 시녀 하나가 굳어진 얼굴을 한 채 들어왔다.

“네가 어떻게 나온 것이냐? 들고 들어간 차가 뭐였는지를 들켜 내부가 뒤집어졌다더니 그게 아니었어?”

“아, 아닙니다. 그건 맞습……. 저, 영공 어른. 그, 그 주가 아가씨께서, 아니 주씨, 주씨 여자가 전하라는 전언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뭐? 전하라니? 누구에게? 그곳에 있던 시녀들을 각 원로들에게 보냈다는 거냐?”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오라.”

혹 제가 말한 것으로 오해라도 살까 봐 입술을 깨문 채 전전긍긍하던 시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절대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전 정말로 영공 어른에 대해선 입도 뻥끗하지 않았는데. 그 아가씨가 대체 어찌 알았는지 정확히 영공 원로 백심중 어른께 가서 전하라며 전언과 함께 이 함을…….”

영공 원로의 시선이 시녀가 들고 있는 작은 함에 가 닿았다가 다시 올라왔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어린 계집이 대체 나를 어찌 알고 전언을 보냈다는 건지.’

일단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는 해 영공 원로가 턱짓했다.

“뭐라 지껄였는지 얘기해 보아라.”

하녀가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꺼내놓았다.

“그게,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이르시기를…….”

“오랜 전쟁의 원인이 된 실종 사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범인은커녕 행방불명된 아이들마저 이때까지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하루하루 생때같은 자식들의 목숨을 염려하며 얼마나 힘들게 밤을 지새우셨습니까. 그 고통은 어떤 말로도 감히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제게 짧은 재주가 있어 백가의 비전인 나매향을 변개하여 그간 힘드셨던 심신을 추스르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려 하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라시며.”

“시며는 무슨 놈의 시며냐! 아까부터 왜 자꾸 그깟 주씨 계집 따위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야?!”

영공이 버럭 노성을 지르며 호통쳤다.

“게다가 오만하기도 하지. 나매향은 백가의 전유물이건만 감히 주씨 따위가 그걸 가져다 조잡하게 변개를 하니 마니 지껄여?”

나매향은 아주 오래전부터 백가 영지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지가 대체 그 향에 대해 뭘 알아서.

‘그래도 전언이 저자세인 것을 보면 제 위치가 백가에서 어느 정도인지 주제 파악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지. 그래 봤자 주씨 년인 것을.’

백심중이 코웃음을 쳤다.

“내놔 보아라. 내 대체 뭘 얼마나 잘 바꿨다는지 봐야겠으니.”

그 말에 시녀가 들고 있던 작은 함 하나를 조심히 내밀었다.

함을 받아 든 영공이 뚜껑을 열었다.

“!”

그 안엔 변개는커녕 가치 없이 반으로 동강 난 향 묶음 하나와 한눈에 내용이 들어오는 짧은 서신 하나가 접히지도 않은 채 놓여 있었다.

<그 음습한 저열함은 원로의 바닥인가. 아니면 백가 전체의 바닥인가.>

“……이, 이.”

작은 종이쪽지를 움켜쥔 영공 원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이년이 미친 것이 아니냐. 이년이 돌았구나. 어? 누가 주가 년이 아니랄까 봐 앞뒤 다른 제 속을 이런 식으로 까발리는구나!”

턱을 부들부들 떤 영공이 움켜쥔 서신을 잡아 찢어 버렸다.

이런 미친년을 가모로 받으라고? 그의 눈에 흙이 들어갈지언정! 천지가 개벽한다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갈며 턱을 굳힌 영공이 덕근에게 턱짓했다.

“당장 일원로와 삼원로, 사원로, 칠원로에게 서신을 넣어라! 평범한 방법으로는 제 주제를 알아차릴 것 같지가 않구나.”

“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찌하긴 뭘 어찌해! 제 발로 백가에서 나가겠다고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쏙 빼도록 아픈 맛을 보여 줘야지!”

“…….”

“그래봤자 탈피를 막 마친 어린것이 아니냐. 제까짓 게 영력이 있어 봤자지. 추잡한 모습으로 울며 빌 때까지 내 본때를 보여 줄 것이다!”

영공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다짐했지만, 세화의 영력을 목격했던 시녀 하나는 불안한 듯 그 모습을 보며 말을 삼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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