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254)

따뜻할 때 드시기 위해서는 하나씩 가져다드리는 편이 좋을 텐데.

혹 따뜻한 차보다는 식은 차를 좋아하시는 걸까?

조금 이상하긴 했으나 눈앞의 아가씨는 그녀가 가장 지극히 모셔야 하는 귀한 손님이었다.

아가씨가 시킨 일 역시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곧장 방을 나간 시녀는 서둘러 차를 준비했다.

그것을 하나씩 쟁반에 얹어 다른 시녀들에게 들린 다음 서둘러 세화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가씨. 명하신 차를 가져왔습니다.”

세화의 눈짓에 탁자 위에 열한 개의 찻주전자가 열을 지어 놓였다.

“이리 모아 놓으니 향이 훨씬 맡기 좋구나.”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어서 드셔 보시지요. 입술에 닿는 느낌도 아주 깔끔하고 목 넘김은 더욱 향긋하답니다.”

“그래. 그럼 내게 가깝게 놓인 것부터 찻잔에 따라 마셔 보거라.”

“네?”

뜬금없는 명에 시녀가 다시 한번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였다.

“제가, 말씀입니까?”

“그래.”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 세화의 표정은 아주 당연한 명령을 하는 듯 위화감이라고는 없었다.

‘아! 혹여 독 같은 걸 염려하시는 건가?’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주와 그녀의 사이가 어찌 되었든 일단 드러난 두 분의 사이는 적이었으니. 저 아가씨께서 경계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었던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시녀가 더 질문치 않고 다가가 찻잔에 차를 따라서는 채 식힐 새도 없이 단번에 마셨다.

‘내가 이리 확인시켜 드리면 안심하고 드실 수 있겠지.’

그녀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빈 잔을 세화에게 내보였다.

독이 들지 않았음을 몸소 보여 준 것이건만 세화는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차는 네가 골랐니?”

“네. 먼 길에 피로가 쌓이셨을 귀빈께 어떤 차를 내어 드리면 좋을지 고민하던 중, 귀하고 비싼 이 향라차가 적당할 것 같아-.”

“좋구나. 그럼 더 마시렴.”

“네?”

“자꾸 되물어 나를 피곤하게 하는구나. 나를 위해 준비해 준 차는 네가 모두 마시라고 말했단다.”

“하, 하지만 이건 아가씨를 위해…….”

“하지만 난 별로 목이 마르지 않으니 이를 어쩐다. 그러니 네가 마실 수밖에.”

도대체 이게 무슨 뜬금없는 말이지? 열 주전자나 가져오랄 땐 언제고 갑자기.

하지만 이런 변덕을 이미 주가의 영지에 살 때 경험해 본 적 있던 시녀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씨가 그러면 그렇지.’

“아가씨. 그럼 드시지 않을 차들이 이미 많이 놓여 있으면 불편하실 것 같은데 제가 치워도 괜찮을…….”

“마시라고 했을 텐데.”

세화의 어조가 단번에 차게 변했다.

시선을 홀리는 아름다운 미소는 여전했으나 옥구슬이 굴러가듯 영롱한 목소리는 단번에 온도가 내려가 냉랭했다.

“그 열 주전자를 모두 마시기 전까지 넌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단다.”

“……네?”

시녀가 이리 계속 되묻게 되는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이 계속하여 들려오자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며 세화가 서늘하고 날 선 목소리로 호통쳤다.

“너는 이것이 차라 말했지. 하지만 너희 재씨들이 이것을 손과 발을 닦는 용도로 사용한다는 걸 모를 줄 알았더냐! 내게 발 씻는 물을 가져다주고는 귀한 차를 가져왔다고?!”

“……!”

“한두 잔 정도야 향긋하고 담백하니 차로도 마실 수 있겠지. 하지만 일곱 주전자가 넘어가면 체기가 있는 듯 호흡이 답답해지고, 한번에 과다한 용량을 섭취하면 내장이 다 진탕되는 등 건강을 크게 해치거늘. 그걸 알면서 이 많은 양을 시킨 그대로 준비해와?!”

“그, 그걸 어떻게……. 아, 아가씨 저는…….”

“영선아.”

그 이름이 신호가 되어 영선이 눈 깜짝할 새에 다가와 시녀의 어깨를 바닥으로 잡아 눌렀다.

“악!”

팔을 뒤로 강하게 꺾고 뒤를 돌아보자 영채와 영무가 나머지 아홉 명의 시녀들을 제압한 뒤 꿇어 앉히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걸 물을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시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 아가씨가 천하디천한 재씨들 밖에 모르는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거지?

이건 정말 재씨 외에는 절대 알지 못하는 비밀인데.

시녀의 그 얼빠진 물음에 피식 웃은 세화가 성의 없이 대답했다.

“이미 겪어 봤거든, 너를.”

“그, 그게 무슨. 저를 겨, 겪어보셨다고요?”

황망한 시선이 저를 따라오는 것을 기억하며 세화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열 주전자를 한 번에 마시진 말라 한번 만류라도 하지 그랬더냐. 그랬다면 이토록 화가 나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사실 네가 이럴 것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 모자란 년은 결국 집에 돌아갈 때까지 내내 그 발 씻는 물을 마셨네?”

“그러니까. 아무리 향과 맛이 괜찮다고는 해도 그렇지. 마실수록 장기를 진탕시키는 데도 끝까지 알아채질 못하더라고.”

“뭐라는 거야. 그야 우리가 그거 외에는 딱히 마실 물을 가져다주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선택지도 주지 않아 놓고 하는 말 하고는.”

“아 그런가? 그래도 그걸로 손과 발을 씻으면 피부가 뽀얗고 하얘지잖아. 분명 내장이 다 뽀얗고 예쁘게 변했을 테니 오히려 우리에게 고마워 해야하지 않을까?”

모여 있던 이들 사이에서 높은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퍼져 나갔다.

비열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여자가 턱을 치켜세운 채 세화를 비웃었다.

“끝까지 그게 제 몸을 상하게 하는 줄을 모르고. 멍청하게.”

사실 생각해 보면 장기가 진탕되는 부작용이 있다고는 하나, 차를 마시는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몸의 증상이 나아지는 효과도 있으니.

그년은 아마 백가에 있는 내내 그 손발 씻는 물을 약차인 줄 알고 귀하게 여기며 마셨을 거라고.

그렇게 소리 높여 웃던 재을지의 얼굴이 세화는 아직도 선명했다.

적의 딸이 얼마나 아니꼽고 눈엣가시 같았을까.

사라진 아이들은 생사도 모르건만 주가에서 부족함 없이 매일을 보낸 제가 당연히 밉고 원망스러울 거라고.

그런 생각에 과거의 저 그들의 조롱과 핍박을 모른 척 넘어갔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른 척 덮어둘수록 그들의 괴롭힘은 더더욱 정도를 모르고 심해지기만 했다.

‘쉰 음식을 가져다주던 것과 머리 위로 오물을 뒤집어씌우던 정도는 그 이후 내 가문에서 이어진 오 년간의 고문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지만.’

그렇게 하여 정말로 깊이 주가를 증오하고 분노하던 이가 제 마음을 추스를 수 있다면 이번에도 모르는 척해 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 주가의 계집이 제 년의 반반한 얼굴을 믿고 혹 하늘처럼 위대한 우리 가주께 몸을 맡기려고 할까 봐 그간 얼마나 걱정이 많았습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문란한 주씨 피가 어딜 가겠습니까. 당연히 그리하려 하였을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가 현명하게 막아 낸 것이고요.”

“가주께서 유독 저 계집에게 신경을 쓰시는 듯하여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제야 발 뻗고 자겠습니다.”

“주무시다뇨. 이제부턴 백가 혈통을 가진 가모 후보를 우리가 올려 드려야지요. 가주께 걸맞은 이를 찾기 위해선 꼬박 밤을 새워도 모자랄 텐데 잠을 주무신다고요?”

“그게 또 그렇군요. 지금부턴 저 계집을 압박할 때보다 더 바빠지겠습니다. 하하.”

제가 당한 일에 다른 이유가 섞여 들어간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백가를 떠나던 날 듣게 된 백가 원로들의 목소리를 생각하면 그동안 이를 물고 버텨 낸 시간들은 대체 뭐였던가 헛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과거를 상기한 세화가 서늘한 눈을 한 채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미리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가 시녀들을 포박한 세 자매가 그 신호를 바로 이해했다.

그들이 재을지를 포함한 시녀 셋부터 세화가 가리킨 곳으로 끌고 가려 할 때였다.

울상이 된 얼굴로 몸을 떨고 있던 시녀 하나가 무릎을 꿇은 채 고두했다.

“아가씨.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는 몰랐습니다. 저흰 그저 저이가 이걸 들고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고 하여 그리했을 뿐입니다.”

그녀가 이내 재을지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네 이년! 감히 가주께서 친히 모셔 온 아가씨를 욕보이는 일에 우리를 끌어들이다니! 네년 때문에 우리까지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벼락 맞을 년, 나쁜 년!”

바락바락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영무의 손 아래에 눌려 있던 시녀 역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희는 저이가 그냥 많은 수의 찻주전자를 나를 일손이 필요하다고 하여 그냥 그런 줄만 알고…….”

“그래서 너흰 몰랐다?”

세화가 천천히 다시 창가의 의자에 앉은 채 찻잔을 손안에서 가볍게 돌렸다.

“네. 정말, 정말입니다. 저희가 어찌 하늘 같은 가주께서 지극히 모시라 명한 분께 이런 참담한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네. 저흰 정말 아닙니다. 저흰 정말 모르고 당한 겁니다.”

“그래?”

“네, 네! 정말입니다. ”

“그렇구나. 좋아. 몰랐으면 죄가 없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세화가 한 말에 시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저 아이들의 말은 믿지 못하겠으니 네가 말해 보렴.”

세화의 시선이 재을지에게 닿았다.

“저 아이들이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 맞니?”

재을지는 잠시 그 시녀들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네.”

재을지가 시선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향라차에 대한 것은 재씨들밖에는 모르는 비밀입니다. 이곳 백가 영역은 겨울이 길어 몸을 차게 만드는 향라차를 즐기지 않아 아는 이가 거의 없습니다.”

“거의면, 나머지는 누구?”

“…….”

“내 앞에서 입 다물 때가 아니라는 정도의 상황 파악은 됐을 텐데?”

“…….”

“뭐, 말하지 않겠다면 그것도 좋지. 영선아. 대답도 필요 없으니 묶어서 뒤에다 던져 놓으렴.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어디까지 버틸지 봐야겠으니.”

“어머, 아가씨. 하지만 아가씨께선 일주일 뒤엔 신영의 등극식에 가셔야 하잖아요.”

“그렇구나. 내 정신 좀 봐. 등극식에 머무르는 시간과 거기까지 오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을 모두 계산해야 하니, 반강제로 한 달은 버티게 해야겠구나.”

“가져온 약 중에 마비산이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챙긴 것은 확실한데 양이 충분한지 모르겠네요.”

“모자라면 또 어떨까. 살고 싶으면 알아서 버티겠지.”

“네. 원신을 깎아 내며 버티면 어떻게든 두 달은 명줄을 붙잡고 있을 겁니다. 대신 스스로의 오물로 더러워질 수 있으니 어디 상자 같은 데에 넣어 둘까요?”

“그래. 가져온 함이 꽤 있지 않니. 몇 개 비우고 안에 넣어두렴.”

“네.”

“!”

“……!!”

사지가 꽁꽁 묶여 있던 시녀들은 그 대화에 입을 벌린 채로 입술만 덜덜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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