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254)

* * *

고요했던 백가 저택이 한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얼굴이 비쳐 보일 정도로 반짝이는 흰 대리석 기둥과 바닥 위로 한탄과 불만들이 순식간에 쌓여 맴돌았다.

“어, 어떻게 가주께서 주씨를 우리의 가모로 세우려 하실 수가 있지.”

백가의 영역에는 백가의 혈족들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주씨들은 환계에 존재하는 일곱 가문에 속하지 못한 환족들을 가차없이 다루며 핍박해 왔다.

하여 주가의 영토에서 달아난 이들은 육문의 수장인 백가의 휘하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 중 그런 식으로 주가에서 몸을 피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육문이 연합하여 주가와 전쟁을 벌일 때 기꺼이 주가의 몰락을 기원했건만.

이제 와 환계 유일의 신수이자 주가를 패퇴시킴으로써 그들의 자랑이 된 가주께서 주씨를 가모로 세우신다고?

그럼 주씨와 다시 연합하게 되는 건가?

실종된 아이들을 찾는다고 그렇게 난리가 났었는데 그런 일들은 모두 제쳐 두고?

“일단 우리는 정확한 앞뒤 사정을 모르니 기다려 보자고. 뭔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잖아.”

“잘못되긴 뭐가 잘못돼! 저 사실에 앞뒤 사정이 어디 있어? 주씨가 우리 가모가 될 거라는 사실이 이렇듯 확실한데.”

“한데 재상께서 친히 시중인을 발탁하실 거라는 걸 보면 재상께서도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재상께서도 아무렇지 않으신 건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그 아가씨께서 정말 남다르게 아름다우시고 대단한 영력을 소유하시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주씨……인데.”

백가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한탄 외에 나오는 것이 없었다. 상황이 도대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구석에서 그 목소리들을 입술을 문 채 듣고 있던 누군가가 벌떡 일어났다.

“내가 쫓아내 버릴 거야.”

“뭐?”

“내가 쫓아낼 거라고! 주씨 따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심지어 주씨가 가모가 되는 꼴을 보라고? 말도 안 돼!”

“덕근아. 너 뭘 하려고 그래.”

앙상한 몸을 가진 젊은 사내였다.

덕근이라 불린 이 사내는 주씨의 밑에서 노예처럼 학대받다가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주가 영역에서 목숨 걸고 탈출한 이였다.

주씨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작은 몸에 가득 솟아올랐다.

“나도, 나도 같이할 거야.”

덕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앙상한 몸을 가진 여인 하나가 그의 말에 동의하며 몸을 일으켰다.

“문주야. 너까지?”

“너까지는 무슨 너까지야. 더 없어?”

“……그래도 우리는 가주님의 자비로 이곳에 정착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분의 의사에 이런 식으로 반하는 건 너무 염치없지 않을까?”

“응. 그러다 여기서도 쫓겨나게 되면.”

모여 있는 이들 사이로 무섭도록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자 제문주가 분통을 터뜨렸다.

“이 등신들! 몰래 하면 될 것 아냐, 몰래! 게다가 아무리 은혜가 커도 그렇지. 우리가 여기까지 어떻게 도망쳐 왔는데 주씨 가모가 말이 돼? 살려 주신 은혜는 감사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주씨를 가모로 모실 수 있겠어!”

“…….”

제문주의 외침에 누군가 조용히 일어났다.

“그건 맞아. 게다가 저런 분을 반대하려면 한두 명의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으니…….”

그러니 자신도 손을 보태겠다는 말이었다.

“너희도 생각 똑바로 해. 당장은 우리가 주가에서 탈출해 온 걸 감출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걸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 있을까? 저분이 가모가 되셔도 그럴 수 있을까?”

“그래. 게다가 가모가 되신 주씨 아가씨가 우리를 주가 영토로 되돌려보내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어?”

잠시의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조용히 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또 누군가도.

잠시의 시간이 흘렀을 땐 그곳에 있는 모두가 일어나 있었다.

결연하게 눈을 치뜬 이들의 시선이 매서웠다.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읽어 낼 수 있는 어떤 계획을 공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기둥의 그림자 뒤에 숨어 숨죽인 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그 그림자는 모인 이들이 흩어질 기미가 보이기 전에 조용히 그 장소를 빠져나갔다.

* * *

“세상에. 그럼 지, 진짜…… 혼인식을 올리신 거예요? 두 분이서?”

“엄마야. 어쩐지. 백가주께서 아가씨를 보는 시선이 너무 뜨거워 녹겠다 녹겠어, 하고 있었더니.”

“저희는 아가씨께서 주가 영역으로 되돌아가실 때도 그렇고, 인계로 가실 때도 그렇고.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하여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맞아요. 저희가 그리 애를 태우고 있는 사이 아가씨께서는 백가주와 두 분이서 그리 꽃분홍 기운을 퍼뜨리고 계셨다, 이거인 거죠?”

세 자매의 목소리에 피식 웃은 세화가 입단속을 했다.

“너흰 알아야 하니까 미리 언질을 주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너무 수선 떨지 마. 어머니께도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으니까.”

“……도련님들께선 꼭 무사하실 거예요. 아 참, 그리고 등극식에 참석하러 가실 때 저희는 무조건 따라갈 거니까요.”

“맞아요. 저희 두고 가실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이번엔 절대로 안 떨어질 거예요.”

언제나 이렇게 든든하게 제 뒤를 지켜 주려 애쓰니. 그 마음이 어떻게 고맙지 않을까.

세 자매와 서로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세화가 자매가 직접 들고 들어온 찻잔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한데 어째서 영무가 차를 직접 가져온 거야? 백가에는 차 시중인이 따로 있다던데 아니야?”

다 알면서 묻는 말이기도 했다.

백가의 상황은 이미 지난 생에 질릴 정도로 겪어 보았으니.

아니나 다를까.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세 자매의 안색이 어두웠다.

“왜. 무슨 일 있었어?”

“말도 마세요. 백가의 사용인들, 다 너무 이상해요. 뭘 물어도 못 들은 체하고.”

“지금 저희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원로 어른과 장부인께서 이런 일에 신경 쓰시게 하고 싶지 않아 문제 삼지는 않고 있는데.”

“어휴. 너무 속 터져서 가끔은 이 사용인들과 멱살 잡고 드잡이질이라도 하고 싶어진다니까요.”

“아냐. 너희들은 아무것도 하지 마.”

세화가 각오를 다지는 세 자매를 만류하며 웃어 보였다.

“내가 할 거니까.”

“……네?”

아무리 그래도 원로 부처께나 아가씨께 무례하게 굴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반박하려던 세 자매가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뭘 하신다고요? 드잡이질을요?”

“응. 그러니 너희는 가만히 있어.”

흰 팔목이 들어 올려지며 작은 찻잔이 세화의 붉은 입술에 우아하게 맞닿았다.

백만용이 그녀의 저택에서 그리 불평불만을 쏟아 놓았던 것이 이해될 정도로 부드럽고 향긋한 차 맛이 선명히 느껴졌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데 좋은 말과 다정한 선의 따위가 뭐 얼마나 도움이 되겠니. 번거롭고 힘만 들지.”

잔을 비운 그녀가 소리 나지 않게 잔 받침 위로 작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소지었다.

“그러니 어쩌겠어. 다 싸잡아 먼저 족치는 수밖에.”

그 누가 상대든, 한참 당하다 보면 그들도 알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 앞에 있는 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 * *

“아가씨, 차를 가져왔습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진중한 표정을 한 시녀 하나가 반듯하게 쟁반을 받쳐 들고 문을 열었다.

내리깐 시선은 공손하기 그지없었고 신중한 행동은 그녀가 이 방에 있는 이를 얼마나 지극히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듯했다.

그 상태로 시녀가 창가에 요요히 앉아 있던 세화의 곁으로 다가왔다.

“임시로 아가씨를 모시게 된 재을지입니다. 식전에 드실 차를 가져왔습니다.”

“두어라.”

세화의 뒤에 시립해 있던 영선이 대신 명령하자 시녀가 “네.” 하고 공손히 대답하고는 쟁반을 소리 나지 않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조금 전까지 세 자매가 백가 사용인들에 대해 불만을 쏟아 놓았던 것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공손한 태도였다.

“백가의 마주 지방에서 나는 특산품 향라차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피로가 쌓이셨을 것 같아 준비하였습니다.”

이어 단정한 태도로 찻주전자에서 차를 따랐다.

폐부를 온통 시원하게 만드는 향긋하고 청량한 향이 진하게 퍼져나갔다.

차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영선마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 정도였다.

“드시면 목과 가슴이 시원해지실 것입니다. 편히 주무시는 데에도 도움이 되실 것이고요.”

세화 역시도 방안을 진하게 메우는 그 기분 좋은 향을 눈을 감은 채 잠시 음미했다.

“그렇구나. 나를 위해 이런 좋은 차를 권해 주어 고맙다.”

“아닙니다. 언제 어느 때고 정성 들여 윗분들을 모시는 것이 제 소임인 것을요. ……그리고.”

머뭇거리던 시녀가 세화의 뒤에 시립해 있던 세 자매를 보면서도 무릎을 살짝 굽혔다 폈다.

“그동안 저희가 손님분들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듯하여 송구합니다. 저희는 가모가 되실 분인지도 모르고…….”

“…….”

“저를 비롯해 이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은 그간 진전이 없었던 실종 사건의 해결 때문에 화가 나 있었습니다. 여태 불온한 마음을 가진 이들도 있고요…….”

영선이 매서운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하루아침에 마음이 바뀌기라도 했다는 거냐?”

시녀가 안색을 굳힌 채 시선을 더 깊이 아래로 내렸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지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다가 대답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물색없는 자라 마땅찮게 여기시게 될 듯하나. ……가모가 되실 분이라는 걸 알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지 뭡니까. 혹, 혹 가주님의 노여움을 사 이곳에서 쫓겨날까 염려도 되었고요.”

“…….”

“아무리 그랬어도 감히 모셔야 할 분들께 그리 버릇없이 굴면 안 되었던 건데.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부터는 정말로 열과 성을 다해 주인이 되신 아가씨를 모실 것입니다.”

진지한 표정엔 진심이 가득했고 거듭 용서해 달라 아뢰는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세화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아니다. 말해 주어 고맙다. 이리 먼저 마음을 다잡고 충심으로 모시겠다 하는 이를 내가 왜 내치겠느냐. 지난 일은 개의치 않을 것이니 염려 말아라.”

“참말이십니까?”

“그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론 정말 성심으로 모실 것입니다.”

“그래. 그럼 차를 일단 조금 더 가져오겠느냐.”

“차 말씀입니까? 아, 차가 식었겠군요. 새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다. 네가 준비해 준 차향이 너무 좋아 이 정도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그러셨군요. 그런 것이라면 금방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올 때 열 주전자 정도 더 준비해서 가져오렴.”

“예?”

시녀가 지금 제가 무얼 들은 건지 눈을 깜빡이다 되물었다.

“……열 주전자를요?”

“그래. 해 주겠니?”

세화가 그녀를 보며 상냥히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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