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254)

* * *

식사를 하거나 짐을 정리할 새도 없이 세화는 백기하의 안내를 받아 어머니를 만났다.

두 오라버니가 주가에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하자마자 천수아의 다리가 풀렸다.

“어머니!”

“부인!”

쓰러질 뻔한 그녀를 주명윤이 곧장 단단한 팔로 붙잡아 지탱했다.

“내 잘못이다. 그 아이들이 먼저 달아날 시간을 주었어야 했는데 내가 괜히 그들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그런 말이 어디 있소. 멋대로 당신을 잡아간 그들의 탓이지, 어떻게 그게 당신의 탓일 수가 있어.”

“아버지의 말씀이 맞아요. 게다가 오라버니들에 대해서도 확실한 건 없으니 아직 너무 걱정하시지 마세요.”

그래. 고작 향낭이 아닌가.

사태를 과소평가하여 오라버니들의 안위를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을 과대평가하여 자신을 함정에 몰아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판단이 정확해야 했다.

백기하의 소집령에 급히 백기하를 비롯해 천, 장, 강, 진, 여의 육가 수장들과 관련자들이 회의실로 모여들었다.

* * *

“그 무슨 개떡 같은 말이랍니까?”

쾅!

천가주가 탁자를 내리치며 노성을 터뜨렸다.

“없어진 애들을 찾으며 부모들이 속이 타 죽어 갈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 놓고, 제 등극식엔 아무도 참석지 않을까 봐 직접 먼 길을 왔답니까? 수하의 자식들을 인질로 잡아 협박까지 하면서?”

아직 아들들이 발견되지 않은 문제로 천수아의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암담한 소리를 듣게 된 천가주의 속도 뒤집어졌다.

“차라리 이 기회에 먼저 주가를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천가주의 말에 모두가 눈을 빛냈으나 단 두 사람. 진과 여의 두 가주만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가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지만?”

“아니, 아닙니다.”

뭔가 불안한 듯 시선을 피한 그가 입술을 꾹 물었다.

그 사이를 진가주가 끼어들었다.

“공격이라니, 그건 좀. 비록 우리가 육가 연합의 형태로 주가와 오랜 시간 전쟁을 해 왔다고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실종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지, 주가에 실제로 칼을 들이대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여가주 역시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말이었다는 듯, 진가주의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주가는 처음부터 환계의 지배자였는데, 그런 주가를 향해 계속 적의를 드러냈다가 하늘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 것은 아닌지…….”

떨떠름한 그 말들에 장가주가 기가 차 물었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입니까. 교룡에 대한 일과 신영이 제 아들의 몸으로 갈아탔다는 얘기를 들어놓고도 그런 말들이 나오십니까?”

“우리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뭐라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저 추측일 뿐이지, 실제로 우리가 그 광경을 목격한 것도 아니고. 허황된 추측 하나를 모두가 믿고 대뜸 증거도 없이 주가와 전쟁을 하자는 건 좀…….”

“네. 신영이 아들의 몸을 빼앗았다는 말 역시 아직 증명된 바가 없고요.”

헛웃음을 흘린 천가주가 반문했다.

“허황된 추측이라니. 그럼 실제로 인계에서 벌어지고 있던 재앙이 멈춘 일은 어찌 설명하려는 겁니까?”

“내 그 교룡이라는 걸 실제로 목격하지는 못했으나 만약 주가 신영이 인계에 재앙을 내리고 있었다면 그건 인간들이 감히 환족의 명에 불복하고 건방지게 굴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주가는 계속해서 초소를 통해 인계를 관리해 왔으니까요. 뭔가 벌을 줄 만했으니 벌을 준 것이겠지요.”

“그건 그냥 듣고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니군요. 누군가가 잘못을 했다면 그 인간만 집어 벌을 내리면 되는 것을. 죄도 없는 수많은 이들을 함께 죽였는데 그 모든 게 그저 벌을 받아야 하니 받은 것이다, 이 말입니까?”

“흠. 뭐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주가를 공격해야 한다면 우리 진가는 그 일에서 빠지겠습니다.”

“우리 여가도요. 우린 행방불명된 아이들을 찾으려는 마음뿐이지 주가와 완전히 척을 지려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여, 진의 두 가주는 그리 선언하고 회의실을 먼저 빠져나갔다.

남은 이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연륜 있는 얼굴을 한 장가주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교룡에 대한 정보를 먼저 공유한 것이 실수였군.”

“……그런 것 같습니다.”

회의실의 한쪽에서 그 언쟁들을 지켜보고 있던 백만용이 민감한 분위기를 읽어 내며 조용히 물었다.

“두 분의 의견으로는 저분들의 저런 결정이 교룡 때문이라는 말씀이신 겁니까?”

노가주가 난 그렇게 생각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육문이 주가를 향해 검을 들이댈 수 있었던 것은 그간 육문 수장인 백가주 외에는 신수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천가주도 혀를 차며 덧붙였다.

“주가의 용은 천리안을 가지고 모든 삼라만상을 꿰뚫으며 대대로 환계의 질서를 유지해 온 존재이니까.”

정식 신수는 아니라고 해도 주가에 용이 남아 있다는 걸 알았으니 저들이 겁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이거 참.”

“저리 회의실을 나간 이들이 쉽게 다시 우리와 결속을 다질 것 같지는 않은데, 문제는 문제군요.”

암담한 공기가 회의실을 짓누르며 내려앉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세화가 조심히 끼어들었다.

“빠지겠다면 그냥 빠지게 두면 안 되나요?”

“일이 그리 쉽지가 않단다. 초소를 점령하기 전이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주가와 전면전이 예정된 상태나 마찬가지인데.”

인계의 상황을 육문의 가주들에게 낱낱이 알리고 더 이상 이런 일들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보이기 위함이었으나.

이전에는 불만 없던 이들이 이제 와 저렇게 나오고 있으니.

“약조를 받으시면 어떨까 해요. 육가 연합을 나가는 것은 상관없지만 주가에 붙어 어설프게 간자 노릇을 하지만 말라고, 영력을 걸고 맹세케 하시는 거죠.”

“음? 하지만 그런 맹세는 영구히 지속시킬 수가 없단다. 얼마든지 약조의 허점을 찾아낼 수 있거든.”

“시간을 버는 거예요. 아이들이 이미 살해당했고 교룡은 신수가 아니라 악의로 더럽혀진 암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한 시간이요.”

“하지만 그걸 어떻게 찾아낼 수 있겠느냐. 등극식에 참석하고자 주가에 갈 사절단은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고려하여 최소한의 인원으로 꾸려야 하는 것을.”

“기억나세요? 제가 초소에서 주경현에게 선물을 가지고 가겠다고 했던 것을요.”

“그렇지.”

“전 아마도 그 선물을 주고 나면 증거를 잡을 수 있게 될 것 같아요. 그러니 일단 저와 이……이, 에게 맡겨 보세요.”

이이라고 부르며 백가주를 눈짓한 세화는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는 백기하와 시선이 마주치고는 눈가를 붉혔다.

그 호칭에 백가주의 귓가도 달아올랐다.

눈을 휘며 서로에게 미소를 돌려주다가 자신들을 주시하는 시선을 알아채고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 그래서 흠. 흠. 이, 일단 주가엔 저희 둘만 다녀오도록 할게요.”

둘의 눈꼴신 모습을 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주명윤이 천수아가 팔을 때리고서야 눈에서 힘을 풀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선물로 대체 뭘 준비할 것인데?”

“뭐. 그쪽에서 눈이 뒤집혀 달려들 선물이라 하면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요.”

“우리가 언니 건강에 얼마나 민감한지 알고 있잖아요.”

“니들이 뭐가 불쌍해. 내가 제일 불쌍해. 너희 때문에 억지로 아등바등 살아 있어야 하는 내가!”

‘인질에는 당연히 인질로 답을 해 줘야 하지 않겠어?’

부드럽게 미소지은 세화가 주명윤에게 대답했다.

“감히 내 오라비들을 다치게 한다면 이쪽의 인질은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찢어 죽일 거라는 걸 친절히 알려 줘야지요.”

섬뜩하게 눈을 빛낸 세화가 손에 든 향낭을 다시금 움켜쥐며 웃었다.

* * *

“이 방을 사용하도록 해.”

“여기요? 여긴 너무 좋은 방 같은데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대가 이 백가 저택에서 사용하지 못할 곳이 어디 있다고. 한 층을 통째로 내어 놓으라 해도 기꺼이 그리할 것을.”

백기하가 제 방도 내어 놓지 못하는 게 한이라는 듯이 덧붙였다.

그런 둘의 모습을 하인과 시녀들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흘끔거렸다.

‘……세상에. 가주께서 저리 자주 웃으실 수도 있는 분이셨나. 미소라고는 모르는 분인 줄 알았는데.’

‘……저리 꿀이 넘쳐흐르듯 다정하게 누군가를 바라보실 수도 있는 분이셨다니.’

자신들의 가주는 어느 경우에도 공정하고 바른 존경할 만한 분이었다.

하나 어깨에 짊어진 것이 많아서일까.

늘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채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어떤 경우에도 꺾이지 않을 듯한 기세를 품고 있었다.

한데 지금 그들의 앞에 보이는 가주는 그때 그들이 보았던 가주가 아닌 것 같았다.

하인들이 제가 하겠다고 나설 새도 없이 손수 저 아가씨의 짐을 들어 옮기지 않나.

친히 방을 골라 방까지 직접 안내해 주시지 않나.

하지만 그런 가주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멍하니 응시하게 되는 저분의 아름다움은 그 어떤 미사여구를 가져다 붙인다 한들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 속 등장했던 그 어떤 미인의 대명사도 이분의 앞에 서면 빛을 잃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런 외모가 알려 주는 이 아가씨의 영력의 크기를 짐작하며 시녀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거대한 방 안엔 남쪽으로 뚫린 창들 사이로 긴 노을이 넘어와 넘실대고 있었다.

그 붉은 노을빛이 또 이 아가씨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마치 저 황혼을 그대로 사람의 형상으로 빚은 듯, 여러 가지 찬란한 색들로 이글대는 저녁놀을 바라볼 때의 막막한 경외감이 이 아가씨에게서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때문에 가주께서 자신의 방뿐 아니라 백가 저택 전부를 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한들 제대로 그 내용을 인지하는 이가 없을 터였다.

“……거라.”

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자신들의 가주도 가주지만 놀람과 망연함을 담아 지켜보던 이들이 하명을 제때 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예? ……죄, 죄송합니다. 가주.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

“내 방에 있는 영단함을 전부 가져오라 하였다.”

“헉! 가, 가주. 그 명만은 거두어주십시오. 저희는 감히 그 함들을 만질 수 없습니다.”

백가 가주의 방에는 커다란 영단이 담긴 함이 몇 개 놓여 있었다.

백가의 신수들이 대대로 가문을 위해 남겨 놓은 것으로, 만들어지고부터 한 번도 백가 가주의 방을 떠난 적 없는 물건들이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나오라 하시다니.

게다가 아무래도 분위기상 그것을 저 아가씨께 내주실 것 같은데.

‘아무리 저 아가씨께서 백가의 가모님이 되실 분이시라 하더라도 그 귀한 영단을 혼인식도 치르지 않은 지금 내어 드리기엔…….’

시중을 드는 이들의 망설이는 표정에 백기하의 눈끝이 매섭게 올라갔다.

“하면 내가 직접 가져와야겠군. 그리고 아가씨께서는 이제부터 백가에 영구히 머무실 것이며 아가씨를 보좌할 이들 역시 발탁할 것이다. 백가 재상이 직접 선발할 것이니, 발탁된 이들은 아가씨를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모셔야 한다. 알겠느냐.”

칼날같이 서늘한 시선과 말투.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으로 그들에게 경고하는 가주의 모습에 하인들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가모가 되실 것 같은데 정말로 그런 건지.

그렇다면 어떤 가문의 아가씨이신지.

대체 어떤 가문에서 저리 위엄있고 아리따우시며 힘이 강력한 여식을 배출해 냈는지 등이 말이다.

하여 그들을 시중드느라 따라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본관 관리장이 망설이고 망설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주, 혹 괜찮으시다면 귀빈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신다면 저희가 더욱 세심히 저분을 보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이 아가씨가 누구신가에 따라 차등을 두어 섬기겠다, 이건가?”

“그럴 리가요. 절대 그런 것이 아니옵고 어떤 이유로 이곳에 계시는지를 알게 된다면 필요하신 것을 미리 더욱 세심히 준비해 드릴 수 있을 듯하여 여쭤보는 것입니다.”

“이분이 이곳에-.”

“내가 얘기할게요.”

백기하가 나서려는 것을 말리며 우아하게 걸어 나온 세화가 그들의 앞에 섰다.

“난 실종 사건의 조사 임무를 맡아 주가에서 책임자로 보내진 주세화라고 한다.”

“!!”

“!!!”

방 안에 들어서 있던 하인과 시녀들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그 변화를 보면서도 세화는 자신을 응시하는 시종들을 향해 환히 미소지었다.

이미 이 반응을 짐작했다는 듯이.

“그래. 이리 내 이름과 신분을 알게 되면 네게 도움이 되겠느냐.”

“…….”

목소리는 마치 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영롱했고 그들에게 보여지는 미소도 숨을 멈추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하인과 시녀들은 여전히 말문이 막혀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지금 실종 사건의 책임자로 이미 주가의 원로가 와 계시지 않았던가.

왜 갑자기 이 아가씨께서는 당신이 실종 사건의 책임자라 말씀하시는 거지.

그것도 가주께서 저리…….

‘저리 따뜻한 미소를, 몰라볼 수 없는 마음을 드러내고 계시는데, 그 대상이 주…….’

“주, 주씨 아가씨라는 말씀이십니까? 주, 주가의 아가씨라고요?”

“그래.”

순식간에 시선의 온도가 변하고 그녀를 보는 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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