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254)

5장.

한 그림자가 주가 신영의 저택 안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태도는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느린 움직임으로 저택 곳곳을 확인하는 시선은 어쩐지 초조하고 불안정해 보였다.

그 불안감은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을 감지하고 나서는 지운 듯 평온하게 바뀌었다.

복도 저편에서 새로 나타난 이가 복도를 걷고 있던 이를 보며 물었다.

“응? 천령이 아니냐. 네 여기서 뭘 하는 거냐.”

“삼보관, 강녕하시었습니까. 경현 님께서 잠시 심부름을 시키셔서요. 이 책을 팔부인께 가져다드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등극식 준비는 잘 되고 계시지요?”

“뭐 그렇지. 하지만 너무 일정이 촉박하여 조금 아쉽지 뭐야. 약식 연회라니. 이런 환계의 경사는 무조건 큰, 환계가 떠들썩해질 정도로 아주 큰 행사로 치러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천령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씀도 맞지만 저는 오히려 등극식이 빨라 좋던걸요. 하루라도 빨리 그분의 능력과 힘을 펼쳐 보이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삼보관이 혀를 쯧 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께서 신영의 위에 오르시고 나면 네가 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언제 어느 때라도 네 본분을 잊지 말고 그분을 잘 보필하여야 한다.”

“그럼요. 그리고 삼보관께서 많이 도와주실 것 아닙니까. 저는 삼보관을 믿고 의지할 것입니다.”

“뭐, 그렇게 되겠느냐. 신영이 바뀌니 나도 뒤로 물러나야지.”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주가도 그렇고 새롭게 신영을 모실 저도 그렇고, 오래도록 신영의 최측근으로 활약하신 삼보관의 지혜가 꼭 필요합니다.”

천령의 말에 삼보관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좋은 기색을 채 감추지 못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네가 뭘 좀 아는구나. 그럼, 이 주가는 아직 날 필요로 하지.”

진심은 아닌 상태로 천령을 떠보기라도 했던 것처럼, 삼보관은 그 말에 더없이 흡족한 얼굴로 천령의 어깨를 두드린 뒤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이 제 기감에서 사라지는 것을 읽어 낸 천령의 시선이 한순간에 돌변하며 다시 어두워졌다.

‘……뭔가 있을 텐데. 어딘가에.’

천령이 외출한 주경현을 따라가지 않고 건강을 핑계로 저택에 남은 것은 찾아봐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딘가 있을 거야.’

그가 찾고 있는 것은 밀실로 통하는 길이었다.

이 저택에 수많은 밀실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영은 주경현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천령 역시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반드시 찾아야 하는데…….’

지난 사냥 대회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명계 끝자락에 발을 디뎠던 천령은 주명윤이 나눠 준 영단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 이후 운신을 할 수 있을 만큼 몸을 회복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나 이상했던 건 그사이 제 주인에 대한 말들을 조금도 들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누구에게 물어도 무사하실 거라는 말만 할 뿐 실제로 주인을 본 이가 전혀 없었다.

하여 어느 밤은 확인을 위해 몰래 주경현의 방에 숨어들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주인은 그곳에 없었을뿐더러 그 밤 내내 돌아오지도 않았다.

‘침실을 바꾸실 분이 아닌데. 혹 여인과 함께 계시기라도 한 건가?’

그러나 그 이후로도 천령은 단 한 번도 주경현을 만날 수가 없었다.

다음 날은커녕 그다음 날에도.

그 다음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방을 옮긴 것도 아니었다.

주경현의 침실에는 여전히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간직해 온 모친의 유품이 남아 있었으니.

하면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천령은 제 건강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채 주인을 걱정하며 속만 태웠다.

한데 그러다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 이상한 소가주를.

“천령아.”

그렇게 천령을 부르며 나타난 이는 분명 제 주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준수한 외모도 미소도 이전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말투는 조금 더 강압적이었다.

결정적으로 시선이 뭔가 달랐다.

주변의 이들을 마치 무생물을 보듯. 조금의 감정조차 담지 않고 응시하는 그 시선은 제가 알던 주인의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자는 대체 누구지?’

주인은 분명 쌍생아가 아니신데.

한데 더 이상한 것은 따로 있었다.

주인은 검술 수련 중 영력이 담긴 파편에 맞아 약으로도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얻은 적이 있었다.

만약 눈앞의 이가 다른 사람이라면 그때의 상처가 없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주인은 그 상처가 있었다.

분명, 주인이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이 소가주는 천령의 주인이 맞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분이 아니야. 절대로.’

주인이 아니었다.

평생을 주경현만 바라보며 살아온 천령은 확신할 수 있었다.

뭐지? 그럼 내 주인은 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하여 그동안 천령은 날마다 저택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하지만 조금의 수확도 없었다.

주인의 작은 흔적조차도 찾아낼 수 없었던 그에게 이제 남은 곳이라고는 저택 곳곳에 입구가 흩뿌려진 밀실밖에 없었다.

만약 주인이 정말로 쌍생아였고 그들이 서로의 자리를 바꾼 것이라 해도, 의심 많은 신영의 성격상 바꿔 놓은 다른 자식을 어딘가 멀리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자신이 늘 확인할 수 있는 곳, 가까운 곳에 두었을 텐데.

‘그러면 밀실밖에는 없을 텐데.’

하지만 그 입구가 대체 어딜까.

아주 단서가 없지는 않았다.

때때로 신영이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갈 때가 있었는데, 그리 급히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며 사라지는 곳 몇 군데 중 한 곳이 바로 이 근처였던 것이다.

하여 천령은 오전 내내 이 근처에서 맴돌고 있는 중이었다.

밀실의 입구는 영력으로 막혀 있어 육안으로는 찾아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여 그의 손에는 예전 어느 날 주경현이 위험 앞에서 천령을 방패 삼았던 일을 머쓱하게 들먹이며 내줬던 영단 하나가 동아줄처럼 쥐어져 있었다.

만약 이 근처에 입구가 있다면 이 영단이 알려 줄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찾, 찾았다.’

그리고 정말 입구가 있었다.

난간 하나하나, 벽의 문양 하나하나를 샅샅이 뒤져 보던 중 쥐고 있던 영단이 떨리며 반응하는 작은 부분을 찾아낸 것이다.

인기척이 없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한 뒤 그곳에 영단을 가져다 댔다.

소가주의 영력을 확인한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벽이 열렸다.

검게 입을 벌린 통로가 깊은 곳으로 이어진 채 드러났다.

마른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막상 입구를 찾긴 했는데. 저 빛도 없는 밀실 안쪽에 정말 내 주인이 있는 걸까?

‘……그래도 만약 계신 거라면.’

“천령아. 네가 늘 내 뒤를 지켜 줘야지.”

그분이 만약 저 안에 있는 거라면.

‘그럼 나도 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

단단히 굳어진 눈을 한 천령이 열린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쿠르릉. 무거운 소리를 내며 그의 등 뒤에서 벽이 닫혔다.

시야는 온통 어둠뿐이고 돌벽 안엔 제 숨소리만 잡힐 듯이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그 상태로 천령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어둠을 헤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주인을 만나기 위해.

* * *

“가주님이다!”

“가주께서 돌아오셨다!”

잠시 영지를 비웠던 백기하가 제 말을 타고 당당히 영지 안으로 들어서자 그를 발견한 백가 혈족들이 흥분하며 그들 일행을 뒤따랐다.

지난번 잠시 백가에 들렀을 때는 행방불명인 세화가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둘이 따로 움직였었다.

하여 대부분의 혈족들이 백기하가 돌아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옆의 저 아가씨는 대체 누구시지?”

“와. 나는 태어나서 저리 아름다우신 분은 우리 가주 외에 처음 본다.”

“나도.”

멀리서 백기하의 존재만 보고 달려왔던 이들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 옆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걷는 이를 발견하고 점점 말이 없어졌다.

선남선녀라는 게 이런 것일까.

그들의 가주가 천 년만에 나타난 신수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백가 혈족들은 지금껏 그 누가 가모 후보로 거론되어도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자신들이 결정을 내리는 것도 아니면서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웠는지.

상대로 지목된 모든 여인 후보에게서 백만 개의 흠을 반나절 만에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한데 저 여인은.’

홀린 듯 가주 옆의 여인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의 목으로 저도 모르는 사이 마른침이 넘어갔다.

노을 아래에서 부드럽게 출렁이는 새까만 머리카락은 마치 비단이 흔들리는 것 같았고.

밤하늘을 동그랗게 오려다 박은 듯한 두 눈은 긴 속눈썹 아래에서 수많은 별을 품은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 아름다우면서도 고귀한 신분임을 의심하지 못할만한 기품이 넘쳐 흘렀다.

하여 그들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도 제 그런 행동이 혹 무례가 될까 봐 시선이 마주치기 전에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어느새 행렬이 지나는 길 양옆을 달려 나온 백가 혈족들이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때문에 가주와 정체를 모르는 신비스러운 여인은 아주 짧은 시간만 모습을 보인 채 곧 백가 혈족들을 스쳐 지나갔다.

가까이서 그런 여인을 바라봤던 이들은 두 눈을 한참이나 깜빡이다 한숨 같은 신음을 흘려내며 중얼거렸다.

“……난, 난 혹시 저분이라면 불만이 없다.”

“나도.”

뭐에 불만이 없는지 주어 따윈 없었다.

하지만 행렬이 그들의 앞을 스쳐 지나갈 때 보았던, 마치 꿀이 뚝뚝 떨어질 듯한 백기하의 시선을 보고 난 이들은 대화의 주제를 손에 잡힐 듯 읽어 낼 수 있었다.

“우리 가주보다 조금도 모자라시지 않은 저 아름다움이라면 분명 지니신 영력의 크기도 보통이 아니겠지?”

“그렇지. 거기다 저 우아함, 기품. 나는 저분보다 더 완벽하신 가모가 계실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하겠다.”

“하긴 나도. 저분의 정체도 나이도 모르지만, 저분이라면 인정.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저 아가씨께서 혹시 주가는 아니시겠지. 하하.”

“생뚱맞게 갑자기 주가는. 주가 혈족께서 어찌 저리 당당히 가주의 옆에서 말을 타고 계실 수 있겠어.”

“응. 왜 요전에 소문이 돌았었잖아. 신영께서 그 원로의 여식인지를 소가주 대신 이곳으로 보내려 한다고. 내가 그게 갑자기 생각이 났나 봐.”

“그 건은 주가의 원로가 직접 온 걸로 끝났는데, 뭐.”

“그렇지?”

피식 웃음을 흘린 그들은 연신 멀어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들끼리 쑥덕이기 바빴다.

저분이 누구시든 저분이라면 가모로 인정할 수 있다고.

저분이 단 하나의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점인 주씨만 아니시라면.

주위는 그들을 환호하는 목소리들로 가득 차 있어 능력이 뛰어난 백기하마저도 그 목소리들을 다 듣지 못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세화에게만은 그들의 대화가 박혀 왔다.

‘주씨만 아니라면’이라는 가정 다음에 이어지는 주씨에 대한 원망의 말들이.

주씨를 혐오하는 백가 혈족의 태도는 이전 생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와 똑같지는 않을 거야.’

세화는 이전 생처럼 그들을 향해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대신 허리를 펴고 자세를 바로 했다.

부드러운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머물렀다.

그녀의 그런 미소를 발견한 백가 혈족들은 떠들던 것도 잊고 언제까지고 그녀를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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