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254)

* * *

일행이 추가되며, 조금 전과는 달리 준비 시간이 조금 필요해졌다.

‘내 아들이 탈피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환계로 간다고?’

갑작스레 결정된 일에 최덕문이 가장 놀랐으나 당황은 짧았다.

“맙소사. 탈피하는 것만으로도 감격이었건만. 이제는 주가 수석장로의 오른팔로서 환계를 좌지우지하게 될 거라니!”

상기된 볼로 집 마당을 왔다 갔다 하는 최덕문의 읊조림에 최장명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그 뒤를 쫓았다.

“아, 아버지, 진정하십시오. 오른팔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도 없고 환계를 좌지우지하게 되는 건 더 말이 되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냐! 그게 그 말이지! 널 큰일에 중용하여 쓰실 거라지 않으셨더냐.”

그렇지! 그렇지! 게다가 그 말씀을 하신 것이 다름 아닌 우리의 주인이자 천 년 만에 이루어진 용의 재림이신, 고귀하신 우리 아가씨의 춘부장이 아니시던가!

그 주가의 수석 원로. 백가 신수와 맞서 주가를 지켜 낸 영웅!

“…….”

“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인계의 일도 아비의 일도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너른 환계로 넘어가 네 꿈을 펼치거라.”

최덕문이 눈시울을 붉히며 제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버지. 아파요. 너무 아파요.”

“왜 저는 계속 아파야 해요? 너무 힘든데. 정말 너무 힘든데.”

고열을 내며 쓰러진 채 울먹이던 어린 아들의 예전 모습이 떠오르자 결국 눈가가 축축이 젖어 들었다.

“네가 어느덧 이리 장성하여 탈피를 마치고…….”

생뚱맞게 본신이 변화한 것은 한번 상상해 보지도 못한 일이지만.

그래도 최덕문은 이제껏 이런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놓아 본 적이 없었다.

“너희 어머니를 그리 보내고 너까지 부인의 옆으로 가게 할까 봐 긴 세월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하늘이 야속하지만은 않아 오늘 내게 이런 날을 내려 주시는구나.”

“……아버지.”

“다녀오거라. 이 아비는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테니. 네게는 지치고 힘들 땐 언제든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련.”

아들은 이제부터 한번 발을 디뎌보지도 못한 낯선 곳에 맨몸으로 던져져야 했다.

아들이 혹시 앞으로 쭉 함께해야 할 낯선 이들 사이에서 기가 죽기라도 할까 봐.

최덕문은 제가 가진 물품들 중 환계에서도 사용이 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아낌없이 포장했다.

하여 마당에 준비된 수레 세 대는 늘어나는 부피를 감당하지 못해 네 번이나 더 큰 것으로 교체되어야 했다.

더 이상 시간을 늦출 수 없는 오후가 되었을 때는 이미 말 두세 마리로는 끌지 못할 크기였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아닙니다. 은인분들께 고작 이 정도밖에 드리지 못해 그저 죄스럽기만 합니다. 가져가십시오. 부디 받아 주십시오.”

“맞습니다. 제 아버지의 몸을 낫게 해 주시고 저의 탈피까지 도와주셨는데 그런 은인분들께 드리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받아 주시지요.”

“누가 보면 혼수라도 가져오는 줄 알겠군.”

많은 이들의 앞에서 체면을 잃은 일로 여태 분이 풀리지 않은 백만용이 날카롭게 눈을 뜬 채 빈정거렸다.

“아직 입조심을 하실 준비가 되지 않은 것입니까? 그만큼 매운맛을 보셨으면 이제 자제하실 때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만.”

“매운맛? 네가 권속 계약으로 아주 기세등등한 것 같은데, 이건 알고 떠드느냐? 난 가모님과의 권속 계약 없이도 주가에서부터 지금까지 엄청난 일을 함께 겪으며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는 걸 말이다.”

“…….”

“게다가 환계에는 우리 가모님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모셔 온 이들도 있고 백가의 혈족들도 포진해 있어 네가 끼어들 틈이라고는 조금도 없을 테니까.”

“아직 혼인하지 않으셨으니 아가씨라 부르라고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늘이 내리신 우리 백가의 가모님을 네가 대체 뭐라고-.”

최장명이 이를 갈며 날카롭게 노려보자 백만용이 뜨끔하며 한발 물러섰다.

이놈을 혼쭐내 주기 위해 이미 있는 힘껏 힘을 써 보았지만 조금도 통하지 않은 것이다.

능력이 대등하거나 저 매가 자신보다 조금 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가모님께선 대체 권속 계약으로 얼마만큼 영력을 나눠 주신 거람. 조금만 덜 주셨어도 내가 지금 이렇게 볼썽사나워지진 않았을 텐데.’

“일단 어서 환계로 가자. 네가 머리채를 잡은 이가 누구인지 내 환계로 가면 똑똑히 보여 줄 것이다. 내가 환계에서 얼마나 대단한지 또 얼마나…….”

“잘. 못. 된 말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가능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만약 자신의 말이 잘. 못. 된 줄은 모르고 지적하는 이를 잘. 못. 되었다 비난하며 말을 듣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잘. 못. 된 행동 아닐까요.”

“이, 놈이 지금 잘못되었단 말을 몇 번이나 하고…….”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는 백만용의 모습이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주명윤이 최장명을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뒤범벅된 시선으로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들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면서도, 일행들은 세화와 백기하를 뒤에 남기고 문을 넘기 위해 먼저 출발했다.

세화는 그녀를 찾아온 성익권과 목소리를 낮춘 채 말을 나누는 중이었다.

“그럼 내가 말했던 것은…….”

“맡겨 주십시오. 빠르면 이달, 늦어도 내달 안으로 완벽히 시행해 두겠습니다.”

성익권이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세화야…….”

대화를 이으며 대문을 나설 때, 어떻게 알고 왔는지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정치화 역시도 눈을 적신 채 황급히 다가왔다.

“……또 오는 거지? 이대로 완전히 어디로 가는 건 아니지?”

“당연하지. 그러니 밥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있어. 다시 와서 이번처럼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으면, 아예 만나지도 않고 돌아갈 테니 그리 알아.”

“세화야.”

정치화가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로 세화를 끌어안았다.

세화 역시 자신에게 안겨 오는 몸을 가볍게 토닥였다.

궁문에서도 보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욱 친해 보이는 둘의 모습에 성익권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도대체 저 천인과 예판의 여식은 어떤 식으로 친구가 된 건지.

저 천인께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시고 나면 예판의 여식을 불러다 대체 어떻게 저분과 알게 되었는지, 어떻게 친해지게 되었는지 자세히 물어보리라 생각하며.

하여 본의는 아니지만 많은 짐과 우왕좌왕한 인간들의 배웅 덕에 약간의 시간이 더 지체되었다.

주명윤과 백가 재상, 백가 기마단 등이 먼저 문을 넘었고 그 뒤를 최덕문이 준비한 수레들이 따랐다.

고맙다고 연신 반복하는 정치화에게 한번 웃어 주고, 성익권에게 지시한 일을 끝마쳤을 때쯤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며 세화 역시 백기하와 함께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새하얀 빛이 그들을 감쌀 때 그들은 서로의 손을 단단히 맞잡은 채였다.

하나 그렇게 넘어온 문안의 상황은 인계 쪽과 완전히 달랐다.

“!”

공간을 가득 메운 불온한 살기와 기세가 그들을 덮치자 백기하가 세화의 앞을 곧장 가로막았다.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초소가 점령되었다고 했으니 이 초소엔 백가 무사들을 위시한 육문의 무사들만 남아 있어야 정상인 것을.

지금 눈앞에는 수많은 주가의 무사들이 소수의 백가 무사들과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세화 아가씨?”

대외적으로 실종되었다 알려진 세화의 모습을 발견하고 주가 무사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갈 때였다.

뚜벅뚜벅.

주가의 병사들 뒤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솟구치는 어떤 거대한 영력의 존재감에 세화와 백기하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말은커녕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는 이가 없을 때였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 고요 사이를 갈랐다.

“이제야 모두가 모였군.”

주가의 병사들이 빠르게 좌우로 길을 텄다.

누군가 그 사이를 유유히 걸으며 두 눈을 휘었다.

주경현이었다.

세화의 시야에서 시간을 막 거슬러왔을 때 보았던 장면이 겹쳐졌다.

신영의 알현실을 막 빠져나오던 그때가.

그때도 저리 귀 끝에서 새까만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지.

그녀를 바라보며 휘어진 눈은 부드럽기만 했고 말이다.

마치 그리웠던 옛 친구를 만나는 듯. 세화 가까이 다가온 주경현이 그녀를 다정하게 불렀다.

“세화야.”

분명 주경현이었다. 지금 그녀를 부르는 이는.

“얼마나 걱정한 줄 아느냐. 이리 몸 건강히 잘 있을 거면서 어찌 어른들이 걱정하시게 행방불명인 척 몸을 감춰.”

“걱정되니 일단 돌아가 푹 쉬고 있거라. 내가 곧 찾아가겠다.”

얼굴도 목소리도 그때와 꼭 같았다.

하지만 걱정스레 건네오는 음성 저편으로 느껴지는 칼날같이 예리한 살기.

휘어진 눈 안쪽으로 야비하게 빛나는 사갈 같은 야망을 발견하며 그녀는 완벽히 깨달았다.

이 자는 제 사촌 오라버니가 아니라는 걸.

제 어머니의 추측이 맞았다는 걸.

“세화야.”

대답이 없는 그녀를 향해 그가 한 번 더 목소리를 냈다.

주경현의 겉가죽을 뒤집어쓴 다른 이가.

“……신영.”

신영이었다.

* * *

“신영? 아. 내 등극 소식을 너도 들은 거구나.”

부드럽게 미소지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이르게 내게 양위를 해 주셨지.”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이상한 말이구나. 이곳은 주가의 영역이고 주가 전체가 나의 것인데 그런 내가 못 갈 곳이 있던가?”

“그래서 오신 건가요? 초소를 둘러보러?”

“그럴 리가 있겠니.”

그리고 세화는 주경현의 모습을 한 신영과 대화하며 한 가지를 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인자한 척하지만 자신 이외의 이들을 쓰레기처럼 낮잡아보는 경멸 어린 시선이 소름 끼치도록 익숙했다.

“관용의 은혜를 모르고 발칙한 세 치 혀를 놀리는구나.”

“여봐라! 그대들을 위해 헌신했다 외치는 이 몰염치한 배신자를 위해 천신주를 가져오라!”

‘……너였구나!’

그때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고 고문했던 이도 주경현이 아니라 신영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손끝이 차게 식어 갔다.

그녀의 그런 반응을 몰라볼 백기하가 아니었다.

세화의 앞을 막아선 그가 주경현의 독사 같은 시선에서 그녀의 모습을 가렸다.

“뭐지. 여긴 이미 우리 육문이 점령했다는 걸 알 텐데. 굳이 두 눈으로 확인하러 오기라도 한 건가?”

주경현이 픽 비웃음을 흘렸다.

“아, 점령. 그런 소릴 듣긴 했지. 한데 내가 그걸 신경 써야 하나? 그건 내가 다시 이곳을 점령하면 해결되는 일인데?”

“전쟁에서조차 비참하게 밀려나 갖가지 배상품을 내놓아야 했던 주가의 소가주가 할 말이 아닌데.”

“그 잘난 전쟁의 승자는 그리 능력이 대단하여 종전 협상이 이루어지고 배상품을 모두 지불했음에도 멋대로 영역을 다시 침범해 초소를 점령했나?”

주경현이 혀를 차듯 대꾸했다.

“정말 비열한데 그래. 이렇듯 신의도 없고 뱉은 말조차 지키지 않는 자가 육문의 수장이라니. 육문의 앞날도 알 만하군.”

세화가 백기하의 등 뒤에서 나와 섰다.

인원이 월등히 많은 주가 무사 쪽을 경계하느라 조금의 틈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제 아버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차갑게 내뱉었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용건이나 말씀해 보시죠. 친히 여기까지 나서신 걸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아닌가요?”

“그래. 있지.”

그 말과 함께 주경현이 그들의 발치로 툭 무언가를 던졌다.

“!”

그건 청색과 자색의 향낭 두 개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적 제가 두 오라비에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었으니까.

세화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주경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너에게도 주는 내 등극식의 초청장이라 하자.”

“……,”

“꼭 올 거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저를 바라보는 주경현을 확인한 후 세화가 천천히 그 향낭을 집어 들었다.

“……살아 있나요?”

“뭐, 그거야. 네가 와서 확인하면 되지 않을까.”

“이……!”

이를 문 백기하가 주경현에게 달려들려 하는 것을 표정을 굳힌 세화가 팔을 잡아 말렸다.

“좋아요. 이렇게 정성스럽게 초대장을 전달해 주는데 가지 않을 이유가 없네요.”

있는 힘껏 향낭을 움켜쥔 그녀가 신영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저택에서 기다려요. 커다란 선물과 함께 내가 찾아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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