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254)

아무리 세화여도 제 아버지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부끄러웠다.

볼을 붉힌 그녀가 초조하게 치마 천을 매만졌다.

그 모습이 세화가 조막만 할 때 장난을 치던 모습과 닮아 주명윤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세화야. 너와 백가주가 서로 연모하는 사이인 것은 이 아비도 잘 안다. 하지만, 네 나이가 아직 어려 혼인은 아직 너무 이르구나.”

“어리다니요. 아버지 제 나이가 벌써 스물-.”

“서른, 아니 마흔-. 아니, 요즘 시대에 마흔이 뭘 안다고! 마흔도 어리다. 적어도 쉰은 넘어야 슬슬 혼인할 상대를 찾고 교제를 하는 거지.”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세화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버지…….”

“좋다, 쉰다섯. 딱 쉰다섯이 되면 내가 그때는 허락할 터이니.”

“아버지. 사실 백기하와 저는 이미 약식으로 혼인식을 치렀어요.”

“뭐, 뭐야?!!”

너무 놀란 주명윤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으면서도 제가 서 있는 지도 몰랐다.

“……너, 너. 다시 말해 보아라. 지금 부모도 자리하지 않은 상태에서 뭘 했어?”

“……음. 그게 그러니까.”

세화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서슬 퍼런 주명윤의 시선이 백기하에게 옮겨갔다.

백기하는 두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으며 세화를 보다가 주명윤의 시선을 느끼고 화들짝 얼굴을 돌렸다.

저, 저 망할 놈이.

주명윤이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백가주. 물심양면으로 저희 일을 도와주시는 것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백가주께 서운한 말씀을 조금 드려야겠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장인…… 미장 어른.”

“백가주께서는 제 여식에 비해 더 오. 랜. 시. 간을 살아오셨고 그만큼 지혜와 지식도 더 쌓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저 어린것이 부모의 허락도 없이 덜컥 혼인식을 치르게 하신 겁니까. 그것도 정식 혼인도 아니고 약. 식. 으로!”

뒷목으로 열이 뻗쳐 오르는 듯했고 머리가 깨질 것처럼 달아오르는 듯했다.

저 조그만 것을.

한번 부모로서 제대로 사랑도 보살핌도 주지 못했음에도 저리 잘 커 준 장한 것을.

그간 백기하에게 신세 진 것이 많았기에, 딸도 저이를 좋아한다고 하니 많은 걸 양해하고 허락할 준비도 되어 있었거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이건 백가주여도 너무한 처사입니다. 저희 주가는 오늘부로-.”

“제가 좋아서!”

세화가 두 눈을 꽉 감고 주명윤에게 외쳤다.

“……세화야?”

“제가 너무, 너무 좋아서! 한시도 못 견딜 것 같아서 먼저 약식으로나마 혼인하자 졸랐어요.”

“뭐, 뭐야?”

“백가주께는 죄가 없으니 부디 절 책망하시고 혼내 주세요. 감히 부모님의 의사도 여쭙지 않고 멋대로 행동한 딸이라 꾸짖어 주세요.”

세화가 주명윤에 대고 깊게 고개를 숙이자 기가 막힌 주명윤이 입만 뻥긋거렸다.

백기하가 씰룩이는 입가를 채 감추지도 않으며 세화의 옆에서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장인어른.”

‘……아까는 미장이라고 다시 바꾸기라도 하더니, 이제는 그냥 장인어른이라고?’

“부부는 일심동체라지 않습니까? 저도 부인과 똑같은 생각을 했으니, 꾸짖으시려거든 저희 두 사람을 함께 꾸짖어 주십시오.”

“…….”

주명윤이 다시금 입만 뻥긋거렸다.

뚫, 뚫린 입이라고 제 앞에서 감히 부부는 일심동체 따위의 말을 내뱉어?

불같이 솟아오르는 분노를 주명윤이 애써 가라앉혔다.

여기서는 할 수 없었다. 여기서 얘기해 봤자 세화가 또 모두 자기 잘못이라고만 할 테니.

차라리 시기를 보아서 사내 대 사내로 백기하만 따로 불러 얘기해 볼 수밖에.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천천히 호흡을 가라앉힌 주명윤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일, 단 네 어머니도 알아야 하니 환계로 넘어가서 생각해 보자꾸나.”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방을 나가 버렸다.

세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백기하를 향해 말했다.

“어쩌죠. 화가 많이 나셨-.”

쪽!

이 여인을 대체 어쩌면 좋을까. 이렇게 예뻐서, 이렇게 사랑스러워서.

백기하가 세화의 양 볼을 손에 잡고 입을 쪽쪽 맞추기 시작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책임질게.”

쪽!

“뭐든 내가 책임질게. 어떻게든 허락을 받을 테니 그대는 너무 염려하지 마.”

쪽!

“꼭 어떻게든 허락받고 혼인식을 올릴 거야. 물론 지금도 그대는 내 아내지만 꼭 모두 앞에서 한 치의 오점도 없이 그대를 당당히 내 아내로 소개하고 싶으니까.”

여러 번 그의 입술이 맞닿았던 제 입술을 가는 손으로 가린 세화가 붉어진 얼굴로 일어섰다.

“일, 일단 아버지를 따라가요.”

“손을 잡고 가야지.”

“아버지가 보시잖아요.”

“보시면 어때. 우린 부부인데.”

그들이 그렇게 서로를 보며 눈을 휠 때 방문 밖에서 거센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화야!!! 빨리 나오지 않고 뭘 하는 거냐!”

“헉. 우리 빨리 나가요.”

그 부름에 백기하와 세화가 서둘러 방 밖으로 나섰다.

환계로 돌아간다는 말을 주명윤에게 들었는지 백만용과 백가 기마단 역시도 출발 준비를 마치고 도열해 선 상태였다.

최장명만이 어두운 얼굴로 한편에 최덕문과 같이 서 있었다.

아마도 저 일행 속에 제 자리는 없을 거란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었다.

“탈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오늘 막 사람으로 바뀐 참이니 몸이 불편하거나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 곧 돌아와 몸 상태를 다시 한번 살펴 줄 것이니 기다리고 있도록 해.”

“……돌아오실 거지요?”

“그럼, 당연하지. 아직 인계를 통해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은걸.”

“그럼 됐습니다. ……언제가 되었든 돌아와 주시기만 한다면. 그날만을 전 쭉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최장명의 나직한 목소리에 세화는 “과장은.” 하면서 웃었지만 주명윤의 옆에서 그것을 듣고 있던 백기하의 시선은 더없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결국 아무 일 없이 일행이 출발하게 되었다.

아쉬운 눈빛으로 언제까지라도 세화의 뒤를 바라볼 듯한 최장명과 그런 최장명의 상태를 인지한 최덕문이 그들을 저택의 대문까지 배웅할 때였다.

고까운 얼굴로 최장명을 바라보고 있던 백만용이 입을 열었다.

“햐. 저 두 분께선 어찌 저리 하늘에서 맞춰 내려 주신 듯 저토록 서로가 서로에게 한 치의 모자람도 없이 어울리실 수 있단 말인지. 우리 가모님께서도 더없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시고 아름다우시지만 천 년 만에 등장하신 신수였던 우리 가주야말로 지극히 위대한 능력을 소유하셨으니, 감히 저 두 분 사이에 그 누가 낄 수 있단 말입니까.”

백만용의 주절거림이 못마땅했던 주명윤이 나직이 경고했다.

“아직 제 여식은 혼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삼가시지요.”

“그 무슨 말씀입니까. 혼인식 따위가 무슨 큰 대수겠습니까. 서로 연모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런 허례허식 없이도 합방하고 한집에서 지낼 수 있는걸요.”

‘……이 새끼가 또.’

아까부터 올라간 혈압이 끝을 모르고 솟구치고 있었으나 보는 이가 너무 많았다.

주명윤이 애써 제 분노를 드러내지 않으며 다시 한번 점잖게 타일렀다.

“아무리 그래도 여식을 가진 입장으로서는 모두의 축복 속에서 진실로 만족스러운 식을 올려,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딸을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요. 하여 재상의 말씀이 불편하니 제 여식을 두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그만두셨으면 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가씨께선 원로 어른의 따님인 동시에 이미 저희 백가의 가모이신걸요.”

주명윤의 서슬 퍼런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백만용이 이글대는 눈으로 세화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최장명을 떠올리고 피식 비웃음을 쳤다.

“가끔 주제도 모르는 이가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릴지도 모르겠으나, 제가 볼 땐 두 분의 사이엔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아까의 모습을 보셨지요? 혼인식 따위가 다 뭐랍니까. 저분께선 그야말로 우리 백가의 가모가 되시기 위해 태어나신-.”

그때였다.

번개처럼 백만용을 향해 날아든 누군가가 백가 재상의 새까만 머리채를 낚아챘다.

“아! 으아! 이, 이놈이 또! 또 내 머리채를!”

“분명 제가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가씨에 대해 그따위로 말씀하지 마시라고요.”

“이놈아! 내가 우리 가모님의 흠을 잡았느냐, 아니면 험담을 했느냐. 칭찬만 했는데 대체 왜- 아악!”

“백가의 가모가 되시기 위해 태어나셨다니요. 저희 아가씨는 무엇이든 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한 가문의 가주로도 충분히 차고도 넘칠 분이시란 말입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최장명이 더욱 세차게 백만용의 머리카락을 잡아 뽑을 듯 쥐고 흔들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두 사람을 떨어뜨리라며 백가 무사들이 황급히 움직였고, 저 멀리 앞서던 세화와 백기하까지 돌아와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주명윤만은 벼락이라도 떨어진 듯 멍하니 굳어 그 광경을 빤히 보았다.

“……이.”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그의 얼굴에 듬뿍 묻어나고 있었다.

“이런 인재를 내려 주시었나.”

마치 나를 위해, 정확히는 백가 재상의 주둥이를 위해 준비된 듯한 인재가 아닌가.

두 눈을 껌뻑이던 주명윤이 최덕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네의 아들을 데려가야겠네.”

“……네?”

“이런 인재를 인계에서 썩힐 수 있나. 내 자네 아들을 환계로 데려가야겠어! 거기서 크게 중용할 것이야!”

아들의 돌발 행동에 당황해 상황을 우왕좌왕하며 지켜보고 있던 최덕문도 주명윤이 그랬듯 멍하니 굳어졌다.

최덕문이 다시 한번 제 귀가 잘못되었는지를 확인하며 되물었다.

“……제 아들을 뭘 하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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