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254)

눈살을 찌푸린 세화가 먼저 나섰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장 그 손들 놓지 못해요?”

“앗, 가모님!”

“…….”

세화를 발견한 백만용은 냉큼 최장명의 머리채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지만…….

“아야야야. 안 놔? 아직도 안 놨어?”

최장명은 세화를 확인하고 미안한 듯 시선을 내리뜨리긴 했다.

하지만 백만용의 머리채를 틀어쥔 손에선 조금도 힘이 빠지지 않았다.

“당신도요! 그 손 빨리 놔요!”

“…….”

“자, 장명아.”

최덕문 역시 이 상황의 이유를 알 리 없었다.

하나 그는 제 아들이 이렇듯 화를 낼 땐 무언가 중대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건 알았다.

“그분께선 네 건강을 살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시더냐.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네가 이리 함부로 행동해선 안 된다.”

“…….”

하지만 여전히 최장명은 시선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아악!”

백만용의 비명을 들으며 세화가 한 번 더 강하게 명령했다.

“그 손을 놓아요.”

“…….”

“놓으라고 했어요. 내가.”

그제야 손에서 힘이 푼 최장명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탈피 후 처음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마주하게 된 그는 몰라볼 정도로 외형이 바뀌었다.

이전에도 수려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지금은 최덕문조차 제 아들을 보며 눈만 껌뻑일 정도였다.

온몸 위에 덧씌워진 화려한 빛깔의 영력이며 몹시도 아름답게 변한 외형이 잠시 그를 아는 이들의 입을 막았다.

그 사이에서 처음으로 최장명의 입이 열렸다.

“이자가 주인님을, 아가씨를 모욕했습니다.”

“??”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음해입니다! 가모님, 제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 상황을 최덕문이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다가 세화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장명이 저 녀석은 지금껏 그 어떤 이에게도 화를 내본 적이 없습니다. 저 아이가 저렇게 나온 데에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한번 이야기라도 들어 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세화가 최장명에게 다가가 그의 몸 곳곳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탈피를 마치고 완벽히 회복한 듯했다.

그처럼 가깝게 다가와 있는 사이 조용히 붉어진 최장명의 귓불은 발견하지 못한 세화가 담담히 물었다.

“무슨 일이었죠?”

“아가씨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모욕했습니다.”

“제가 그럴 리 있었겠습니까. 전 백가의 가모가 되실 아가씨를 저희 가주처럼 극진히 모실 준비가 되어 있고, 이 충심은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알겠어요. 그래서 무슨 말을 했었는데요?”

“…….”

“…….”

세화는 시비를 가리기 위해 당연한 듯 물은 것이었으나 둘은 그 질문에 짜기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최장명은 차마 그 말을 제 입으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듯했고.

백만용은 그 말이 정말로 모욕으로 들리는 말이었을까 봐 걱정한 탓이었다.

침묵이 무겁게 이어졌다.

어떻게 해서도 그들이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자, 한숨을 흘린 백기하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한데 그때였다.

또다시 급작스럽게 하인 하나가 헐레벌떡 최덕문을 향해 달려왔다.

“대, 대감!”

“뭐냐. 이번엔 또 뭐야. 또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그, 그것이. 또 손님이 오셨습니다. 지금 오신 분들과 같은 귀객이십니다.”

“뭐야?!”

손님이란 말만 듣고 지금은 때가 아니니 냉큼 돌려보내라고 명하려던 최덕문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환족이 또 왔다고? 내 집에? 대체 누가?

한데 이번 손님은 굳이 문 앞에서 기다리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자네가 내 딸의 권속이 되었다는 자인가?”

빠르게 달려온 하인의 뒤에서, 얼마 시간 차를 두지 않고 등장한 인물을 발견한 세화와 백기하가 동시에 깜짝 놀랐다.

“아버지?”

“미장 어른!”

주명윤이었다.

* * *

“신영 등극 연회에 대한 공표가 벌써 났다고요?”

“그래. 하여 내 둘을 서둘러 환계로 부르기 위해 온 것이란다.”

“연회의 준비만도 보통 반년은 필요할 텐데요. 대체 어떻게 이렇게 빨리…….”

“그리고 등극 연회의 초청장이 내게도 왔단다.”

주명윤이 소매 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세화에게 넘겨주었다.

“신영이 아버지께 초청장을 보냈다고요?”

세화가 서둘러 서신을 받아 펼쳐 들었다.

내용은 별 것 없었다. 새 신영의 등극에 대한 축사와 연회 일자 등이 적혀 있었다.

세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라버니들은요? 찾았나요? 혹시 주가에 잡힌 건 아니겠지요?”

주명윤이 세화의 손에서 서신을 받아 소매 안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영지선을 샅샅이 훑었는데도 불구하고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한 것을 보니 나도 혹 그런 건 아닐까 염려가 되는구나. ……하여 내가 이 서신에 응해 다녀올까 한다.”

“아버지!”

세화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함정이란 걸 아시잖아요! 그런데도 가신다니요. 오라버니들은 저와 이 사람이 조금 더 찾아볼-.”

주명윤이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초소를 점령한 이상 두 번째 전쟁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나도 그 녀석들이 아직 신영의 손에 잡히진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장담할 순 없단다. 그러니 확인을 해 봐야지.”

“아버지!”

“아들들을 구하는 일은 아비인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않니. 게다가 만약 가주께서 정말로…….”

주명윤이 이를 갈며 턱을 긴장시켰다.

“정말로 소가주의 몸을 빼앗으면서까지 삶을 늘리고 있다면. 그것도 내가 처리할 것이다. 주가의 일원으로서 가문이 거기까지 추락하는 것을 결코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아닙니다, 미장 어른. 마음은 알겠으나 그러지 마시고 저와 따님 둘이 가도록 허락하시죠.”

“네?”

“뭐라고요?”

백기하의 말에 두 부녀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하지만 제 여식은 이미 주가에선 행방불명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위험도 위험이지만 모습을 드러내며 백가주와 함께할 명분이 없을 텐데요?”

“……하여.”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백기하가 진지한 얼굴로 조언했다.

양심은 있어서 시선은 차마 주명윤을 마주하지 못하고 아래로 내리깐 채였다.

“저와…… 그, 저와 따님의 혼인식을 거행하여 육가 연합을 대표하는 맹주 부처의 신분으로 참석하게 되면…….”

“네??”

“저도 물론 혼인식은 장대하고 조금의 모자람도 없이, 환계의 모든 이들이 알 만큼 화려하고 찬란한 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그리 할거고요.”

……이게 무슨 말이지.

주명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백기하를 쳐다보았다.

들려 듣고는 있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일단 약식으로나마 혼인식을 치르고, 이후 다시 한번 제대로 준비하여 식을 치르면 어떨까 합니다.”

“…….”

“물론 정말로 식은 다시 한번 꼭! 꼭! 치를 것이고, 그때는 그 어떤 환족도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놀랍고 거대한 규모로, 이 혼인식이 대대손손 회자될 만큼 웅장하고 아름답게 준비하겠습니다.”

“…….”

“믿어 주십시오. 정말입니다.”

“…….”

주명윤이 여전히 이상한 소리를 내뱉는 망할, 아니 백기하를 보았다가 제 딸을 응시했다.

지금쯤이면 백기하를 말려야 할 딸은 입을 다문 채 눈가만 발그레 붉어지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왜 지금 혼인식의 규모에 대한 장담을 듣고 있는 거지?’

새로운 신영의 등극 연회에 누가 목숨을 걸고 참석할 것인가 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기승전 혼인식 결론이 대체 웬 말인지.

“……혼인식은 그렇다 치고. 제 여식은 왜 함께 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당연히?”

주명윤의 시선에 백기하가 잠시 말을 골랐다.

“……음.”

아무리 그라 해도 미장 어른 앞에서 한시라도 빨리 혼인식을 치러 온 사방에 ‘이 여인이 내 부인이다’ 하고 알리고 싶어서 그렇다는 말은 쉽사리 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혼인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질 않나.

다행히 미장 어른께서도 제 점수를 조금씩 높여 주시고 장부인께서도 절 잘 봐주고 계신데.

이럴 때 얼른 혼인을 해야지, 때를 놓쳤다가 혹 두 분의 평가가 흔들리기라도 하면. 그러다 혼약마저 날아가게 된다면.

하지만 이런 염려가 신영의 즉위식에 대한 우려만큼이나 강하게 든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변수는 두 분의 형님인데.’

두 분이 정말 정말 걱정도 되지만,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저를 세상 비열한 도둑놈처럼 바라보시지 않았던가.

그것을 생각한다면 형님들께서 백가로 오시기 전에 제발 어서 혼인식을 치렀으면 하는 마음뿐이고.

“음……. 큼…….”

결국, 생각한 말 중 어느 것도 꺼내놓을 수 있는 것이 없어 백기하는 헛기침만 반복했다.

한데 그때였다.

“제가…… 제가 말씀드릴게요.”

“??”

“??”

붉어진 눈가를 백기하와 마찬가지로 시선을 내려 가린 세화가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흰,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있고 싶을 정도로 서로를 연모하니까요. 뭔가를 알아보러 백가주가 주가에 가야 한다면 저도 꼭 함께 곁을 지키고 싶어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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