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아들을 눕혀 둔 안채로 백가 재상을 안내한 최덕문이 허겁지겁 정실로 돌아왔다.
그는 여태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한 버선발이었다.
하나 혹 은인께서 기다림을 불편하게 여기실까 봐 제 그런 꼴도 자각지 못하고 서둘러 흙바닥을 밟으며 달렸다.
문 앞에서 잠시 호흡을 고른 후 기별을 넣었다.
“아가씨. 들어가겠습니다.”
우리 아가씨가 어떤 아가씨이시던가.
인세를 말리던 재앙을 단번에 끝내시고.
타들어 가던 대지에 그냥 비도 아니고 빛나는 회복수를 퍼부으신 분이 아니시던가.
아무리 대량의 환석이 그 기적에 뒷받침되었다고는 하나.
‘본신의 힘이 그만큼 뛰어나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 암. 아무렴.’
백가의 신수가 그리 대단하다 칭송받는다 한들 그게 대수일쏘냐.
‘우리 아가씨야말로 환계를 지배하던 용의 재림. 진정한 신수의 등장이시지!’
어느새 세화를 지칭하는 호칭에 ‘우리’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며 최덕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떤 천운으로 저분이 제 아들의 주인이 되어 주셨는지.
“반갑습니다, 대감.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투자를 하며, 또 투자를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믿을 수 없는 짧은 만남이 저와 제 아들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풍성하고 신령스러운 영력을 요동치는 날개 안에 품고 있던 아들의 모습을 떠올린 최덕문이 또다시 뿌듯함으로 얼굴을 붉혔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데 왜 안에서 들어오라 말씀하시질 않는 거지?’
“아가씨, 저 최덕문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한 번 더 고했으나 여전히 내부에선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
‘뭐지? 이 방이 아닌가?’
그가 조용히 하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손님들을 이곳에 모신 것이 맞느냐.”
“예? 그럼요. 대감께서 직접 안내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이후 다른 곳으로 가신 건 아니고?”
“전혀 아닙니다. 두 분의 신도 여기 댓돌 위에 있지 않습니까.”
‘한데 왜 안에서 기별이 없으시지?’
최덕문이 그렇게 문밖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마침 하인 하나가 두 번째 다과상을 가지고 다가왔다.
노행수는 체면도 잊은 채 달려가 그 상을 빼앗았다.
“주어라. 내가 직접 가지고 들어갈 것이다.”
좋은 핑계를 만나 마음이 급해진 최덕문이 상을 직접 든 채 문 앞에서 다시 한번 고했다.
“아가씨. 저 최덕문입니다. 다과를 들이겠습니다.”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지만 최덕문의 눈짓 하에 하인이 재빠르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에구머니.”
와장창! 챙강!
노행수의 손에서 떨어진 상이 바닥에 나뒹굴며 난장을 만들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술과 음식들이며, 깨어진 찬기와 술병의 조각들이 난잡하게 흩어졌다.
소리를 들을 정신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입술을 맞붙이고 있던 한 쌍의 남녀였으나 그런 큰 소리까지 못들을 수는 없었다.
삽시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둘이 빛살처럼 서로의 곁에서 한 치 정도 떨어진 채 서둘러 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송, 송, 송, 송구합니다. 허, 허락 없이 들면 안 되는데 제가, 제가 나이가 들어 귀, 귀, 귀가 어두워진 것일까 봐……. 뭣, 뭣들 하느냐! 당장 이것들을 치우지 않고!”
황급히 하인들을 향해 호통치던 최덕문이 안절부절못한 모습으로 청했다.
“정말 송구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이곳이 지, 지저분하니 옆, 옆방으로 옮기시면……. 아 물론 저를 포함하여 하인들 역시 절대 접근치 않을 것입니다! 모두 일 리 바깥으로 물린 채 두 분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제가 아주 단단히 일러둘……,”
백기하가 목을 고르며 끼어들었다.
“큼. 자네가 뭔가 오해를 한 듯하네. 우린 그저, 그러니까 눈에 뭐가 들어간 듯하여. 그걸 빼 주려 잠시 서로에게 가깝게 있었을 뿐이야.”
“그럼요! 당연하죠. 제가 다 압니다. 티가 들어가면 얼마나 불편합니까. 당장 빼셔야죠. 그런 걸 가만히 두었다가는 눈을 비비다 상처가 날 수도 있고, 그러다 혹시 실명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지. 자네 뭘 좀 아는군. 게다가 얼굴 근처에 뭔가 묻어 있는 것 같아 체면을 잃기 전에 닦아 내려고 했던 것뿐이고-.”
“그렇죠. 얼굴에 묻은 것을 오래도록 닦지 않고 두었다가 그 부분이 혹시 괴사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다 옥 같은 피부에 큰 흉이라도 지게 되면 큰일이니까요. 잘하셨습니다. 두 분 정말 현명하셨습니다. 현명하십니다!”
대화 같지 않은 둘의 아무 말에 하인들이 열심히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빠르게 정리했다.
세화가 “그만하고 이만 들어오게.” 하고 말을 꺼내기 전까지, 아무도 끊는 이가 없는 듣기 괴로운 대화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 * *
“인계로 보내졌을 때의 상황, 말씀입니까?”
“그래.”
세화와 백기하가 이런 것을 물으러 저를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최덕문은 의외의 질문을 맞아 눈만 껌뻑거렸다.
“신영은 지금껏 제 심기를 거스른 이들을 그 자리에서 즉결 심판해 왔지. 지 행수의 일원들은 아주 작은 실수에도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산 채로 타 죽었다고 했어.”
세화가 상석에 앉은 채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한데 그 외에 자네처럼 인계로 보낸 이들도 있단 말이야. 이번 인계의 사태를 보고 둘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세화의 물음에 최덕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지만 세화의 말에 일리가 있다 느낀 것이다.
“일단 그때의 정황은…….”
“나는 틀렸어요, 여보. 나는 저 문을 넘을 수 없으니 당신만이라도. ……장명이를 잘 부탁해요.”
다시 되살아 난 끔찍한 기억 하나가 잠시 그의 말문을 막았다.
‘……부인.’
다리 위에 올려진 최덕문의 손이 힘주어 안으로 말려들었다.
“한데 그대도 알다시피, 그 신영이 뭔가를 하려 했다면 굳이 이들을 데리고 할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야.”
백기하가 세화에게 나직이 덧붙였다.
“육문의 아이들이 실종되었던 것처럼. 어떤 일에 쓰임새가 필요했다면 좀 더 풍성한 영력을 품은 이들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의 말을 듣던 최덕문이 한가지 얘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그의 빗나간 시선이 추방되던 과거 시간 어딘가를 더듬었다.
“장명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을 겁니다. 부인은 해산 때 고생을 하여 깨어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요.”
최덕문은 신중한 목소리로 제 기억이 맞는지 여러 번 확인해 가며 그때의 기억을 꺼내 놓았다.
“제가 신영의 저택에 납품을 간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신영의 삼보관께서 오셔서는 제 부인을 팔부인 중 일부인의 시녀로 보내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시녀?”
“네. 영광스러운 일이었으나 부인이 오늘내일하고 있었기에 감히 따르질 못했습니다.”
최덕문이 기억을 쥐어짜며 덧붙였다.
세화의 물음에 단서가 될 만한 게 있으면 뭐라도 꺼내 놓고 싶었으나 마땅한 게 이 정도밖에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들쥐고, 들쥐 환족은 백가주의 말처럼 신영이 굳이 그들을 데리고 뭘 할 만큼 가치 있는 이들이 아니었으니까.
“이후 그 일이 다시 언급되진 않았고?”
“네. 혹 명을 따르지 못해 신영의 심기를 상하게 했을까 봐 걱정했습니다만, 그 이후 딱히 별일은 없었습니다.”
말을 잇던 최덕문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잠시 멈춰 섰다.
“……그러고 나서 채 한 달이 되지 않았을 때였긴 합니다. 제가 신영께서 금지하신 주가의 영단을 취급한 죄로 추방된 것이.”
“부인은? 부인도 함께 인간계로 왔었던 건가?”
“그녀는 약해진 몸에 원신까지 파괴되어 문을 넘지 못했습니다. 아마…… 아주 힘들게 갔을 겁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린 최덕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였다.
“부인은 원신이 파괴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군.”
백기하가 갑자기 어두운 목소리로 단정했다.
“꺼지기 직전 촛불이 더 강렬히 타오르는 것처럼 환족이 원신을 파괴당하면 짧은 시간이지만 몸이 잠시 회복되고 영력이 넘쳐흐르지. 문을 넘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네?”
최덕문이 눈만 깜빡거렸다.
확실히 인계로 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 사라지긴 했으나 원신이 파괴되고 나서 온몸에 힘이 가득 솟아오르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부인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으니 그 영향이 아니었을까요? 회복되었다지만 문을 넘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던가.”
“아니. 예외는 없어. 원신이 파괴되었다면 마지막 힘으로 반드시 문은 넘을 수 있지. 몸이 아파서 넘을 수 없었다면 파괴되지 않은 거야.”
“그, 그럼.”
차마 말이 다 나오지 않는지 최덕문이 입술을 떨며 물었다.
“제, 제 아내는 어찌 된 것일까요. 문 앞에서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는데 그 이후로 대체…….”
“…….”
백기하가 잠시 침묵한 사이,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었었던 건 아닐까, 불안감이 든 최덕문이 손을 맞잡았다.
세화가 물었다.
“적룡의 영단을 취급했다고 했지? 정말 그러한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가족뿐만 아니라 상단 전체가 몰살당할 일인 것을요. 다만 누군가가 음해했다고 여겼습니다. 제가 거래하던 누군가가 저를 시기하여 일을 꾸몄다고요.”
“이곳으로 추방된 다른 이들은? 합당한 죄를 지은 게 맞나?”
“……그들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나 일단 대부분이 자신의 죄를 부인하긴 했었습니다. 음해를 받았다고요. 억울하다며.”
“…….”
“…….”
이것은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저희가 신영에게 어떤 쓰임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신영께선 원신이 파괴된 저희를 인계에 쓰레기처럼 버리시고는 한번 돌아보지도 않으셨는걸요.”
“그도 그렇지. 감시하는 이조차 없었으니까.”
이번 생뿐만 아니라 저번 생까지 이들을 주시하는 시선은 없었다.
만약 이들에게 효용 가치가 있었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영은 쓰임새가 있는 것이라면 모두 제 손이 닿는 곳에 두어야 마음이 풀리는 성미였으니까.
백기하가 고민하는 사이 최덕문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영의 행동에 의구심이 드신다면 혹 환계로 돌아가 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인계에서 얻는 정보보다는 돌아가셔서 얻으실 수 있는 정보가 더 많으실 테니까요.”
최덕문의 말에 세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백기하에게 권했다.
“일단 인계의 일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하니 잠시 백가로 먼저 가서 신영의 행보를 살펴보죠. 새로운 신영의 즉위가 있을 거예요. 이전의 신영과 주경현 모두 참석하는지 한번 보자고요.”
한데 그 순간이었다.
쿵!
갑자기 저택이 한번 작게 흔들렸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할 때 이해하지 못할 진동이 몇 번 더 이어졌다.
쿵! 쿵!
금세 문밖이 어수선해졌다.
심상치 않은 소란에 최덕문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하인이 헐레벌떡 뛰어와 그런 주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대감, 대감!”
“이게 도대체 무슨 소란이냐!”
“큰일입니다. 귀한 손님 분과 도련님이 지금!”
“장명이? 장명이가 왜.”
“지금, 그, 그러니까.”
황급히 이야기하던 하인이 시선을 피했다.
답답함에 최덕문이 노성을 터트렸다.
“어서 말하지 못할까!”
“……지, 지금 안채에서 두 분 사이에 개, 개싸움이 났습니다요.”
그 말에 최덕문뿐 아니라 세화와 백기하까지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무슨 싸움?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하인이 안내하는 안채를 향해 달려갔다.
그렇게 도착한 안채엔 신령스러운 빛과 광휘가 난무했다.
문제는 그 빛 속에서 보이는 장면이 전혀 신령스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문과 가구가 부서진 파편 하며 그릇들이 깨어진 조각까지. 게다가…….
“놔, 놔라. 딱 놔. 안 놔? 너 내가 누군 줄이나 아느냐! 네가 지금 감히 백가 재상을 건드려? 이건 네가 아무리 가모님의 수하라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육문 연합의 수장인 우리 백가의 명예가 달린 일이야! 지금 당장 손을 놓으면 용서할 것이나, 불복할 시 네게 드리워질 암담한 미래를 겪으면서 이 순간을 후회하지나 말아라!”
“…….”
최덕문과 백기하, 그리고 세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안채 마당을 응시했다.
거기엔 전혀 그럴 것이라 생각지 못한 두 사람이 머리채를 붙잡고 있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있었다.
하인이 개싸움이라는 상스러운 말을 내뱉기에, 말실수인가 했더니, 오히려 그가 말을 고르고 골랐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개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