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254)

* * *

이름도 알았고. 신분도 알았고. 궁 안으로 이들의 방문을 알리기 위해 사람이 달려 들어갔지만.

그렇다고 해도 답이 돌아올 때까지 마냥 이들을 궁문 앞에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궁문지기 하나가 성안으로 달려 들어갈 동안, 다른 궁문지기는 이들을 잠시 거처로 안내했다.

소식이 닿아 사람이 온 것은 금방이었다.

어서 그분들을 안쪽으로 모시라는 내관이 도착함과 동시에 외당이 시끄러워졌다.

“가주!”

누군가 도착한 기미를 느끼고 백만용이 가장 먼저 바로 튀어 나갔다.

맙소사. 우리 가주께서!

우리 헌헌하시고 옥골선풍이셔야 할 우리 가주께서!

“가주, 고작 사흘하고도 반나절 사이에 어찌 이리 해쓱해지셨습니까. 인세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도 좋지만 가주의 몸은 가주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십사 제가 그토록 간곡히 아뢰었건만. 인세가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주께서는 천 년 만에 등장하신 신수이시옵고 환계 육문을 단단히 묶는 중요한 위치에 계시며 앞으로 밝혀내야 할 주가의 파렴치하고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될 어두운 비밀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는 이 중요한 시국에 이리 몸을 상하게 하시다니요. 이것은 아무리 그간의 상황을 놓고 본다 해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저는 언제까지고 가주를 충실히 따르는 가주의 수족이겠으나 가주의 건강에 대한 간언만은 백가의 은혜를 뼈에 새긴 충심으로 무장한 채 마치 가슴을 갈라 제 절절한 마음을 꺼내 보이듯-.”

“만용아.”

“네, 가주.”

“너, 여기 어떻게 넘어왔느냐.”

“……네?”

“너 여기 어떻게 온 것이냐 물었다.”

그들을 둘러싼 궁인과 관인들은 계속해서 뭔가를 들여오고 있었다.

그것이 새로 방문한 자신들을 맞아들일 만한 무언가를 부랴부랴 가져오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 찬찬히 둘러보니 가져오는 것들이…….

“재상. 그러기에 제가 그냥 환계에서 기다리자고 말씀드리지 않았……. 아니 그보다 우리 무, 무릎 먼저 꿇는 것이 어떠십니까?”

가져오는 것들이 어째 다 취조장을 연상케 하는…….

“만용아.”

천천히 걸어 성익권이 마련해 준 상석에 앉은 백기하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성익권을 위시한 그 휘하 내관들과 근위관들과 궁인들이 멀찍이 그들을 둘러싼 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백만용은 그런 것도 개의치 않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뭔, 뭔가가 잘못되었다.’

가주의 반응에서 지금 뭔가가 단단히 틀어졌다는 걸 느낀 백만용이 백기하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무릎을 꿇던 순간이었다.

뒤를 이어 걸어 나온 세화를 발견한 그가 뭔가를 더 생각할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가모님!!”

“??”

“!!”

이해할 수 없는 호칭을 들은 세화가 걸음마저 멈춘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는 동안 화를 내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백기하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가모요? 지금 저를 부르신 겁니까?”

“그럼요!! 당연하지요!! 그보다 어찌 제게 말을 높이십니까. 편안히 대해 주십시오.”

“…….”

“혼인식과 같은 격과 형에 매인 행사 따위가 진실로 완벽히 어울리는 한 쌍의 남녀 앞에서 다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가모께서는 이미 천 년에 한 번 등장하시는 저희 가주의 옆자리에서 백가의 혼과 열을 환계 그 누구보다 충분히 소유하고 계심을 입증하시었고, 비록 주씨 성을 가지고 계시지만 조금도 주가 혈족이 떠오르지 않게, 그저 영민하시고 심성 바르시고 격조 높으시고 거기다 놀라울 정도로 순도 높고 거대한 백가의 영력까지 소유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가씨 같은 분이 아니라면 대체 그 누가 백가의 가모 자리에 앉을 수 있단 말입니까. 모든 환계를 통틀어 아가씨가 아니라면 그 어떤 환족도 절대! 결코 제가 용납할 수 없고 용납해서도 아니 되는…….”

백만용의 말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백기하의 시선이 세화의 상태를 분주히 살폈다.

다른 구경꾼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성익권은 특히 ‘헉, 두 분이 부부지간이셨단 말인가. 저분들이 편안하게 쉬시게 함이긴 했으나 일찍이 별관을 통제하고 사람들을 물리길 정말 잘했군.’ 하는 얼굴이 아주 역력했다.

궁인과 관인들 역시도 ‘역시. 저렇게 잘 어울리시는 두 분께서 부부가 아니실 리 없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모든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한 백기하의 안색에 뿌듯함이 조금씩 차올랐다.

암. 우리는 미리 혼인한 것을. 이미 부부지, 부부!

그러느라 백만용을 향한 시선에 담겨 있던 칼 같은 예리함과 북풍 같은 한기도 사라져 버렸다.

한결 부드러워진 눈길을 건네며 백만용이 한 마디 한 마디를 세화에게 덧댈 때마다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을 알아챈 백가 기마단 사이에서 나지막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와. 우리 재상, 능력 봐라.”

“더 무서운 게 뭔지 아냐? 재상의 저 말은 진심이 반이고, 나머지 반도 진심이란 거야.”

“그게 뭔 헛소리야. 진심이 반, 진심이 반이면 그냥 진심이란 말이잖아.”

“그게 무서운 거라니까. 발밑까지 몰아닥친 불운의 업화를 진심으로 피해 갈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저분이 우리 재상이신 거지.”

“뭔 소린진 모르겠고, 일단 크게 경을 칠 것 같진 않아서 너무 좋다.”

“나도.”

백기하는 온 궁 안 사람들을 다 데려다가 이곳에서 저 ‘가모님!’ 소리를 듣게 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백가 기마단의 무사들은 점점 따뜻하게 변해 가는 가주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내내 품고 있던 불안과 긴장을 놓아 버리고 편안히 그 시간을 즐겼다.

열성적인 재상과 그런 그를 전혀 말릴 생각 없는 가주.

일단 저 재상이 뭐라 하는지 끝까지 들어나 보자고 선 세화 덕분에 그 시간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 * *

“장부인께서 시키신 거라고?”

“네, 그렇습니다. 어제 주가에서 양위가 발표되자마자 인간계로 향하는 문이 있는 초소를 먼저 장악해야 한다고 의견 주셨습니다.”

“양위가 발표되다니. 하면, 신영은 죽었다더냐?”

“아닙니다. 후계자인 주경현이 막 탈피를 마쳐 주가와 환계의 반석이 될 준비가 되었다며, 젊은 후대에게 가문을 맡긴다는 말로 물러났습니다.”

세화의 안색이 제 어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어두워졌다.

“그는 결코 살아 있는 한 양위를 할 성격이 아니에요.”

“그렇지. 하면 장부인께서 하셨던 추측이 그대로 이루어진 걸까? 그 늙은이가 제 아들의 몸을 빼앗았어?”

“그럴, 수도 있죠.”

“…….”

“…….”

방 안이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것까진 아니길 바랐는데, 만약 정말 그 일을 시행한 거라면.

그렇다면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닐 터였다.

“정말로…… 대대로 이런 일을 하며 명을 늘려 왔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렇듯 제 아들의 몸을 빼앗는 데 망설임이 없을 정도라면요.”

“다른 희생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뭔가 수를 내야겠어.”

“일단 최장명의 집에 잠깐 가 보죠.”

“뭐? 거기는 왜. 아직도 그 매가 사람으로 돌아왔는지가 궁금해?”

“그게 아니라 추방자들에 대한 의문 때문이에요.”

세화가 유독 최장명의 일이라면 날카로워지는 듯한 백기하의 손을 잡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그간 왜 굳이 신영이 그들을 인계로 추방했는지 궁금했거든요.”

신영은 칠문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의 생명을 몹시도 가볍게 여겨 왔다.

화풀이하듯 지 행수의 일행을 신영의 불로 태워 죽이기도 했다 하지 않았나.

하여 지 행수와 같은 환족들은 신영을 직접 만나게 되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니 말이다.

한데 최덕문과 같은 환족들은.

‘그들도 신영의 심기를 거스른 범죄인들이라는 데서 마찬가지인데 왜 죽이지 않고 굳이 추방한 것이지?’

“그거라면 그 아버지와 만나 보면 되겠군. 매는 굳이 만날 필요 없잖아.”

찰싹!

세화가 아프지 않게 그의 손등을 내리쳤다.

“권속이 되었으니 이제 내 식솔이에요. 자꾸 그렇게 나올 거예요?”

백기하가 마뜩잖은 얼굴을 하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였다.

백만용이 불쑥 끼어들었다.

“가모님.”

“?”

“가모님께서 너른 덕으로 자신의 식솔을 세심히 보살피시고 제 살처럼 아끼시는 마음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가문이 커지고 살피셔야 할 자가 많아지다 보면, 모두를 아끼시는 가모의 마음은 모르고 물색없이 그 배려를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자가 분명 나오지 않겠습니까.”

백만용이 신중한 얼굴로 세화에게 직언했다.

“지금이야 아직 식솔이 적어 그런 불온한 마음을 먹는 이가 없다고는 하나, 호의를 그저 호의로 여기며 감읍하지 않고 제 권리인 양 여기는 이는 분명 나오기 마련입니다. 지금 제가 다시 없을 배려를 받은 것은 모르고 후에 그것이 똑같이 주어지지 않을 때 왜 저를 천대하냐며 따지는 이가 있을 수 있지요.”

백만용의 목소리가 흘끗 제 가주의 안색을 살핀 후 다시 이어졌다.

“하여 가모께서 양해해 주신다면 식솔의 관리는 식솔에게 맡겨 보심이 어떠십니까. 가모님께서 새로운 권속의 탄생과 그로 인한 몸 상태를 깊게 염려하고 계신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제가 직접 상태를 살피고 돌보겠습니다.”

“……음. 뭐.”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잠시 생각하던 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 백만용을 바라보는 백기하의 시선이 뜨거웠다.

저 영특한 것. 장한 것.

저것이 백가 재상이지.

저 예쁜 것!

저래서 우리 만용이가 백가 재상이지!

언제 이마를 짚었냐는 듯 뿌듯함이 넘쳐나는 시선을 받으며 백만용도 감격에 몸을 떨었다.

별관 주변을 지키고 있다가 봉변을 맞은 기마단원들만 대화가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일 장씩 더 앞으로 나설 뿐이었다.

* * *

“오셨습니까, 아가씨!”

세화와 백기하의 방문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최덕문은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대문까지 한달음에 달려 나온 그는 제가 신을 신지 않았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기우제의 소식을 들었는지 염려스러운 표정을 하고 세화에게 물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시고요.”

“음. 괜찮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는 하인도 물린 채 직접 세화를 정실로 안내했다.

“아, 잠깐만.”

방 안으로 들어서기 전 세화가 백만용을 가리키며 최덕문을 잡아 세웠다.

“자네 아들을 살펴봐 줄 이를 데려왔으니 저이를 먼저 데려다주고 와.”

“!!”

세화의 배려에 깜짝 놀란 듯한 노행수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제 아들은 조금 후에 살피셔도 괜찮으니 일단 아가씨께서 기다리시지 않도록-.”

“괜찮네. 자네 아들은 막 탈피를 마친 데다가 정신이 들자마자 힘을 사용하지 않았나. 염려스러우니 저이를 먼저 데려다주고 오게. 난 조금 기다려도 상관없으니.”

“그렇게까지…….”

최덕문은 세화가 이토록이나 제 아들을 신경 써 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먼저 안으로 들어가 계시지요. 하인을 물린 탓에, 제가 저분을 장명이가 있는 별관 근처까지만 안내해 드리고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러게.”

최덕문이 빠르게 백만용을 데리고 사라진 뒤에도 백기하는 여전히 뭔가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간 세화가 나직이 타박했다.

“자꾸 그럴 거예요?”

“뭐가.”

“자꾸 그렇게 표정 구기고 있을 거냐고요.”

“…….”

백기하가 아이처럼 고개를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겹쳐진 손은 더없이 힘주어 맞잡은 상태였다.

누가 그 사이를 지나치더라도 결코 손을 놓는 일이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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