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새하얀 영력이 교룡이 만들어 낸 어둠을 가르고 솟구쳐 올랐다.
이를 간 교룡이 턱을 치들자 검붉은 영력이 쏜살처럼 날아갔다.
새벽의 빛처럼 어둠을 걷어 내는 빛줄기의 목덜미를, 너무 짙어 새까맣게 보이는 교룡의 영력이 단번에 잡아챘다.
“――!!”
두 영력이 나선으로 서로를 휘감으며 뒤엉켰다.
그와 동시에 비명 같은 영력의 기파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퍼져 나갔다.
쿠르르르릉-!
쾅!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이 진동하고 천둥이 일듯 땅이 몸을 떨었다.
“꺄아아악!”
“저, 저게 무슨!”
시간이 멈추었다가 다시 흐르기라도 한 듯,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제단 아래 서 있던 이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움직일 수 없이 굳어진 채 소변을 지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뒤도 보지 않고 뛰어가거나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벌벌 떠는 이들도 있었다.
그 사이에서 성익권은 오히려 몸을 곧게 펴고 선 채, 하늘을 찢어발기는 두 힘의 형태를 또렷이 응시했다.
그를 고꾸라지게 했던 거대한 절망을 마주하는 것은 두렵고, 또 두려운 일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몸이 떨렸다.
하나 자신은 이것을 피하지 말고 지켜보아야 했다. 지금 그 절망 앞에 선 것이, 바로 그의 단 하나의 희망이었으니까.
“걱정 말아라. 이곳을 이대로 두지 않을 것이니.”
첫 일격은 막상막하처럼 보였으나 여인의 몸을 둘러싼 새하얀 빛은 거대한 어둠에 비해 너무나 작았다.
해일처럼 여러 겹으로 덮쳐드는 어둠 속에서 그 빛은 곧 꺼질 작은 촛불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승리를 기대하기는 명백히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그러나 왜일까.
“그들이 가뭄을 원하면 비를 내리고, 비를 내리려 할 땐 태양을 끌어오면 되겠지.”
마치 이틀 뒤 바짝 마른 곡식에서 싹이 날 거라 들었던 사람들처럼.
성익권의 가슴 저 안쪽에도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희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발. 제발.’
임금이 필사적인 얼굴을 하고 두 손을 모았다.
하나밖에 없는 제 희망을 향해 열렬히 기도를 보냈다.
그렇게 하늘을 가르고 대기를 진동시키는 거대한 짐승들의 싸움을, 성익권이 숨도 쉬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흘깃 아래를 응시한 교룡이 제화를 비웃듯 턱을 울렸다.
―어둠을 밝히는 편이 네게 유리할 것 같더냐?
“…….”
―그렇다면 잘못 생각했다.
교룡이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하늘에서 찢어질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마른하늘에 수없이 많은 붉은 낙뢰가 번뜩이며 나타났다.
그 붉은 빛줄기가 싸움을 지켜보던 이들을 향해 낙하했다.
제 목숨과 누군가의 목숨을 저울질할 시간조차 없었다.
세화의 시선이 허공을 비행하며 기파를 막고 있는 매와 마주쳤다.
“끼이이!”
높은 소리로 운 매가 세화와 비슷한 빛의 영력을 펼쳐 냈다.
쿠쾅!! 쾅!! 쾅―!!
뿌연 반구 형태의 영력이 사람들을 지켜 냈으나 그것을 버텨 낸 매는 기력을 소진한 듯 비틀거렸다.
후들후들 날개를 떨면서도 세화에게 날아오려 하다가 결국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매에게 영력을 나눠 준 세화 역시 상태는 비슷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교룡의 그림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제 막 탈피를 끝낸 어린것들이 자주 하는 착각이 있지.
연옥의 업화처럼 크고 불길한 붉은 영력이 교룡의 주변에서 몸집을 키웠다.
―영력이 커지고 모습이 변하니 제가 뭐라도 된 것처럼 주제를 모르고 꼭 이렇게 영웅 놀이를 하고 싶어 하거든.
그것이 제 명줄을 조이는 줄도 모르고.
눈앞에 있는 어린것은 분명 저 인간들까지도 보호하려 할 게 뻔했으니, 승패는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건 마치 무거운 추를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일 테니까.
비릿하게 웃은 교룡이 다시금 손가락을 움직였다.
고작 옆으로 선을 긋는 것만으로도 이전보다 많은 낙뢰가 생겨났다.
하늘을 가른 그것들은 한순간에 아래 있는 이들을 향해 쏟아붓듯 떨어져 내렸다.
“……하늘이시여.”
그 절망적인 광경을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응시하며.
사람들은 기우제를 지내는 내내 성익권이 왜 그리 무너질 듯 고통스러워했는지를 깨달았다.
이건, 달아날 수가 없다. 하늘이 그들을 죽이고자 마음먹었으니 그저 제 목숨을 내어놓아 분노를 잠재울 수밖에.
그 순간이었다.
그들을 지켜 주던 매는 이미 땅에 떨어졌건만. 다시금 매가 펼치던 것과 같은 투명한 반구가 그들을 덮었다.
붉은 낙뢰가 반구의 위로 떨어지며 막대한 힘이 공명했다.
―――!!
대지가 울리고 사방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땅 위에 서 있던 이들이 그 울림에 모두 쓰러져 나동그라졌다.
“윽……!”
세화 역시도 한쪽 무릎을 꺾은 채 주저앉았다. 떨리는 입가로 붉은 피가 주르륵 새어 나왔다.
작은 어깨가 들썩이자 교룡의 그림자가 입을 찢을 듯 웃었다.
그녀의 힘이 약해진 사이, 시야에 닿는 모든 곳에 교룡의 영력이 스미기 시작했다.
세상이 온통 붉게 물들였다가, 이내 다시 하나로 모였다.
칼날처럼 다듬어진 날카로운 영력들이 이번엔 세화에게 쏟아졌다.
쿵, 소리를 내며 세화의 몸이 제단 위로 내리박혔다.
찰나 정신을 잃은 세화가 몸을 동그랗게 말곤 거세게 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콜록.”
핏방울이 후드득 바닥에 떨어졌다.
끔찍한 고통에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쉬울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상황은 그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신영과는 차원이 다른, 절대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거대한 힘이었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져, 세화가 피가 배어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몇 번이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시야가 바로 잡히지 않았다.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마치 과거, 천신주를 마셨을 때와 비슷한, 죽음이 다가오는 느낌.
―여기까지 버티다니, 살아남았다면 꽤 쓸 만하게 자랐을 텐데, 아쉽구나. 하필 상대가 나빴어.
저 버러지들을 지켜 내려 하지만 않았어도 좀 더 명줄을 잡고 있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제단으로 가볍게 내려온 교룡이 퍽 다정한 말투로 세화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라, 명윤의 여식아. 외롭게는 하지 않으마. 너를 죽이고 난 뒤엔, 네 친인척, 친구와 가족, 널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다 뒤따라 보내 줄 테니.
세화에게 다가온 교룡이 그녀의 팔을 잡아 올렸다.
곧장 어린 예비 신수의 목을 꺾어 버리려던 순간이었다. 교룡의 손이 잠시간 멈췄다.
비늘로 뒤덮인 손안으로 세화의 영력들이 세세히 느꼈다.
사람들을 보호하느라 힘을 몸으로 받아 낸 탓에 어린것의 영력은 잔뜩 흐트러져 진탕이 되어 있었다.
‘이 영력으로는 지금은 결코 날 이길 수 없어. 그렇다면.’
그가 서리 같은 안광을 번뜩였다.
이년이 느끼는 절망이라면, 이깟 버러지 같은 인간들 천만 명을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진하게 농축된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허면 난. 난 단번에…….’
마른 입술을 혀로 핥은 교룡의 붉은 눈이 형형히 빛났다.
―네 짝인 그 백가 놈도 반드시 같이 보내 주마.
두근, 두근.
세화의 심장이 가쁘게 고동쳤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백기하의 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죽는 걸까.
만약 내가 지금 이곳에서 죽는다면, 그럼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주가를 떠나던 그 날 그때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백기하.
세하의 속삭임에 교룡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백가 놈을 반드시 주가의 지하 밀실에 처넣고, 손발을 자르고, 살점을 하나하나 저미고.
입술은 귀 끝까지 찢어져 있었으나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혀를 잡아 뽑은 다음 머리 가죽을 벗겨 버린 뒤에, 끔찍한 고통으로 만신창이를 만든 후에 네 곁으로 보내 주마. 내 약속하지.
교룡이 붉은 사기를 세화에게 밀어 넣었다.
“……!”
온몸을 진동시키는 세찬 고통에 세화가 신음했다.
저를 보고 웃던 백기하의 환영이 어느새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과거의 자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더러운 밀실 바닥 위에 누워 있었다.
감옥 속 백기하가 고개를 들었다.
텅 빈 시선으로 그가 입 모양으로 뭐라 벙긋거렸다.
세화는 그것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주세화.”
안돼.
있는 힘껏 입술을 물었다.
그를 그런 꼴로 만들 순 없어.
내가 들어갔던 감옥에, 결코 그가 발을 딛게 하지 않을 거야.
그는 교룡의 손에 참혹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을 겪을지언정. 당장 그녀를 잃었다는 가시를 견디지 못할 사람이었다.
“안 돼.”
백기하가 붙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살아서 제 복수를 하겠다 할 수도,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그는 평생 절대 행복하지 못하겠지.’
“……그건, 안 돼.”
―이제 와 후회하는 것이냐?
“그래.”
세화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제 팔을 틀어쥔 교룡의 커다란 손목을 붙잡았다.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거라 해 놓고.”
그녀의 적자줏빛 눈이 번뜩였다.
“잠깐 흔들렸어. 바보같이.”
―무슨!
있는 힘껏 제힘을 교룡의 몸속에 퍼부어 넣으면서 세화가 이를 악물었다.
죽음을 각오하진 말아야 했다.
사지를 잃고 비참한 모습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교룡의 말처럼 온몸의 살가죽이 벗겨져 끔찍한 몰골이 되더라도.
그래도 일단은 살아야 했다. 그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의무였다.
저들을 지키면서도 나는 내 생명 또한 지켜야 한다.
헌데 그 작은 생각의 변화에 뭔가가 바뀌었다.
‘어…….’
배 속의 영력들이 불이 붙는 듯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이어지는 빛나는 폭포가 교룡의 위로 떨어졌다.
콰앙―!
―크아아악!
세화의 팔을 뿌리치려던 교룡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흰빛이 닿는 곳이 넓어질수록 교룡의 살갗에 금이 가더니 이내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이런 일은!’
믿을 수 없는 일에 교룡이 날아올라 세화를 떨어트리려 했으나, 그녀는 오히려 거센 힘으로 교룡의 손목을 다시 낚아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콰앙! 쾅!
제단에 처박혀, 계단으로 굴러떨어진 교룡이 황급히 몸을 세우며 세화를 응시했다.
세화의 뒤로 거대한 영력이 하늘 위까지 퍼져 나갔다.
그 오색의 영력 사이로, 제단을 둘러싼 환석의 기운이 압도하듯 뿜어져 나왔다.
푸르고 붉은 영력. 태양처럼 찬란한 황금색과 새하얀 회오리로 만들어진 영력.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며 공명하는 수많은 환석들.
눈을 멀게 할 정도로 환하게 빛을 내던 힘들이 이내 하나로 뭉쳐졌다.
일렁이던 것들이 마치 그녀를 비호하듯 그녀의 등 뒤에서 변화했다.
세화 본인도 알 수 있었다.
이건 탈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