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저놈이!”
이홍천이 곤봉을 들어 올리기도 전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사내가 사람들을 밀치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목숨이라도 바친다지 않았어?!”
주변에 있는 이들이 만류하듯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거대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울먹이듯 입술을 깨물고 있던 그는 다시 한번 임금을 향해 소리쳤다.
“심장을 바친다 했으면 정말 바쳐야지! 그걸 미적이고 있으니 이리 비가 오지 않는 것 아니여!”
그는 제게 달려온 관인들에게 어깨를 붙잡히고 무릎 꿇려지면서도 그저 목소리를 높였다.
“정신들 차려! 어차피 우리 다 곧 죽을 것 아니여? 당장 내 살을 스스로 뜯어 먹고 내 피를 마시게 생겼는데!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 원흉에게 뭔 말을 못 하겠어?!”
그 말이 불씨가 되어, 군중들의 안색도 일시에 돌변했다.
“……마, 맞아!”
“맞아!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래! 바친다 했으면 정말 바쳐야지! 말로만 그러니까 하늘님이 더 노하시는 것 아냐!!”
광장이 아수라장이 되는 데는 채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간의 울분을 풀려는 듯 돌과 흙, 신발들이 제단을 향해 날아들었다.
너 때문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앞을 막아선 관병들을 밀어낸 성익권이 날아드는 것들을 그대로 맞았다.
퍽!
탁!
돌이 그의 이마를 치고, 지저분한 신발이 얼굴을 때려도 묵묵히 그것을 견뎠다.
이 돌이 아무리 아프다 한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보다 더 그를 아프게 하는 것이 있을 리 없었으니까.
이 재앙이 지나가기만을 두 손 놓고 그저 기다려야 하는 무력한 스스로보다 더 환멸 나고 끔찍한 것이 있을 리 없었으니까.
성익권의 감긴 눈 밑이 젖어 들었다. 그런 그에게로 다시 한번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화아악―!
한 줄기 빛이 군중 사이를 내달렸다.
제가 지나온 자리에 환한 빛의 궤적을 남긴 그것은 성익권의 앞을 막아서며 거대한 날개를 횡으로 펼쳤다.
파앗!
“!!”
분노로 핏대가 섰던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부릅뜬 채 굳어졌다.
‘……뭐, 뭐지. 저건.’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와 크기의 새가 성익권의 곁을 보호하듯 돌며 울고 있었다.
“――!”
그때마다 밝게 뿜어져 나오는 오색의 기운이 날아드는 돌과 신을 바스러뜨렸다.
모든 이가 그걸 보며 숨조차 멈춰 광장이 일순 조용해졌을 때였다.
자박자박.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그들 사이의 고요를 타고 날아들었다.
새와 똑같은 빛에 감싸인 여인이 이 장소의 아우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편안한 표정을 한 채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제단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아서던 군중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마치 파도가 갈라지듯 길을 내었다.
여인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임금의 앞을 부드럽게 맴돌던 새가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무게가 없는 듯 가볍게 그 팔 위에 내려앉았다.
분노로 가득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멍하니 풀렸다.
저건 대체 뭐지.
사람의 형상을 하고는 있었으나 여인을 사람이라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왔다.’
그리고 그런 세화를 바라보는 성익권은 입술을 떨었다.
‘맙소사. 그녀가 왔다.’
사흘 후에 기우제를 준비하라던.
먼저 왔던 짐승들을 막아 주겠다고 말을 해 주던 그녀가.
‘……그녀가 정말로 왔다!’
간신히 버티고 섰던 성익권의 다리가 풀리며 그대로 아래로 주저앉았다.
그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신령한 빛에 감싸인 채 제게로 다가오는 세화의 모습을 하염없이 응시하기만 했다.
“내가 조금 늦었구나. 미안하다.”
성익권이 가까이 다가온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와 주신 것만으로도.
약조를 지키기 위해 나타나 주신 것만으로도.
“미안하실 것이 없습니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성익권을 바라보며 눈을 휘었다.
“걱정 말아라. 이곳을 이대로 두지 않을 것이니.”
부드러운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머물렀다.
울 것 같은 얼굴이 된 그를 두고 세화가 다시 걸었다.
계단을 높이 올린 제단의 앞에 도착해, 그 주변을 둘러싼 첫 번째 상자를 희고 가는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최덕문이 예판의 저택 후원으로 옮겨두었던 바로 그 상자들이었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빛이 상자에 불처럼 옮겨붙었다.
첫 번째 상자가 타기 시작하자 그녀는 두 번째 상자의 겉면을 손으로 쓸었다.
두 번째 상자 또한 영력의 불꽃에 둘러싸이며 타올랐다.
그리고 그다음 상자, 또 다음 상자.
모든 상자에 영력을 불어넣은 그녀가 높은 제단의 꼭대기에 서서는 잠시 아래를 둘러보았다.
제단 아래 있는 이들 모두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희미한 희망들을 품고.
그러자 마치 이 희망을 읽어 낸 것처럼, 저 멀리 혈호가 있는 방향에서 검붉은 영력이 요동쳤다.
‘――!!’
그 영력은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고 있었다.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땅으로 곤두박질친 이무기처럼 버둥거리다가 그녀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안광이 형형한 붉은 영력과 세화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보호하듯 새를 날려 보냈다.
거대한 날개의 새가 제 빛으로 사람들을 감쌈과 동시에 세상이 단번에 어둠에 물들었다.
새까만 공간 속 거대한 붉은 영력이 지옥의 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불길 끝에 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인간은 아니었으며 환족도 아니었다.
거대하고 끔찍한, 숨이 멎을 듯한 불길한 기운으로 이루어진 어떤 그림자.
마치 뱀처럼 눈동자가 세로로 찢어진 그가 세화를 훑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명윤의 여식아.
여유로운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그를, 세화가 예리한 시선으로 살폈다.
사실 조금 기대했었다. 주가 전면에 나서지도 못하고 인간의 생명을 빨아야 하는 그에 대해서.
어딘가 문제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 백기하가 없이도 충분히 그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직접 목격한 교룡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두려운 것이었다.
온전하게 각성한 신수가 되어 부딪쳐도 모자랄 판에, 자신은 아직 각성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그렇다고 질 수야 없지.’
그러니 해 볼 수밖에.
“날 알고 있어?”
―나?
교룡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딴 건방진 말투라니. 제대로 신수로 거듭나지도 못한 것이 자신만만하구나. 내가 널 당장이라도 찢어발기면 어찌하려고. 아, 혹시 백가 가주를 믿고 그따위로 나오는 건가?
“…….”
―혹시 그런 거라면 대단히 실망스럽구나. 그 녀석이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그놈의 영력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것이냐?
그의 입술이 업화 속에서 위로 솟았다.
덜떨어진 환족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백가의 반편이를 칭송하고 있었으나 그의 눈까지 속일 순 없었다.
백가 가주의 영력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는 것을 억지로 이어 붙인 것과 비슷한 상태였다.
주가와의 전쟁 중 초반 승기를 잡고자 적의 무사들을 대량학살한 탓에 백기하의 격 역시도 추락해가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지가 서서히 뜯기고 찢기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으리라.
교룡의 비웃음에 세화의 시선이 흘깃, 백기하가 있을 방향으로 잠시 움직였다.
‘……당신은 건강해야 해.’
아주 오래전 들었던 말이, 대상을 바꾸어 그녀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니까 그건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세화가 과거 백가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세화가 주가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결정되어 떠나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전날부터 모습도 보이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야 달려 나온 그는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허겁지겁 제 목소리를 꺼내놓았다.
“건강, 해야 해. 알았어? 그대는 건강해야 해.”
아마 백기하는 스스로가 어떤 시선으로 세하를 보고 있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절대로 아프지 말고 슬프지도 말라고.
차마 닿지도 못하고, 마치 기도라도 하는 듯 읊조렸던 말들.
시간을 거슬러 모든 것을 바로잡고 있는 지금에도 세화는 백기하가 여전히 한 번씩 잠든 자신에게 그 말을 속삭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화는 탈피하던 때 만났던 백호를 통해 이미 그의 영력이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었다.
하여 푸른 거북이의 영력을 사용해 치료하였고 전부 고쳤다고 믿고 있었다.
하나 그것은 그런 식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몸을 뒤튼 오류는 잠시 모습을 감췄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길 반복했다.
이번 일로 그녀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곳에서 백기하를 제외시켜야 했다.
주가의 병사들이 영력의 파동을 느끼고 문을 통해 이쪽으로 넘어올지도 모른다고.
결계로 문을 막아 달라 부탁하며 그의 등을 떠미는 방식으로.
혹여 제가 잘못될 때를 대비해 그에게 제 영단을 내어주기도 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영단이 알려 줄 것이라는 핑계까지 대면서.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교룡을 상대해야 하는 이때. 한 푼의 영력도 더 필요한 이때. 그 바늘귀만 한 차이가 제 목숨을 앗아갈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넌 틀렸어. 난 한 번도 너를 상대하며 그의 도움을 받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으니.”
눈을 감고, 제단 위에 준비된 수많은 환석의 기운을 느낀 세화가 강하게 힘을 끌어 올렸다.
새까만 어둠을 밝히며 오색의 빛이 등불처럼 타올랐다.
“그러므로 네 상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일 거다.”
―뭐라? 네년 혹 이미 알고 있었…….
당신이 그때 어떤 마음으로 내게 그런 말을 했는지, 나도 알게 되었으니까. 나 또한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
나도 당신이 다치는 게 싫어. 당신이 그러했듯.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당신의 피부 위에 새겨질 작은 생채기조차 막아주고 싶지.
불안한 일은 여전히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교룡이 뿜어내는 업화 속에선 제 생명조차 보장할 수 없었다.
하나 세화는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대는 건강해야 해.”
‘응.’
“절대로 아프지 말고. 슬프지도 말고.”
‘응.’
그 떨리던 목소리와 언제나 그녀의 등 뒤를 지키며 미소를 되돌려주는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응.’
정말로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지금처럼.
환석들을 감싼 빛이 세차게 타올랐다.
저 교룡의 힘이 그녀보다 훨씬 더 강하다 해도.
그로 인해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된다 해도.
“그러니 찢어발겨 볼 테면 해 봐.”
그녀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