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세화는 최덕문의 저택을 나와 기우제가 열리는 광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른 길을 밟아 가던 세화의 고개가 불현듯 한곳을 향해 돌아갔다.
그녀의 시선이 먼 하늘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알 것 같았다. 이 방향. 이곳으로 가면 그 혈호가 나온다는 것을.
“그가 방해하고 있어.”
세화의 뒤를 따르던 백기하 역시 그녀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추측이 맞았나 봐요. 영력이 저리 요동치는 것을 보면.”
성익권이 내어 준 기록들을 살폈을 때였다.
주가의 신수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부분을 찾던 도중 그들은 어떤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교룡이라는 것은 신수로 탈피하던 도중 어떤 문제로 인해 신수가 되지 못했거나, 신수였지만 무언가가 잘못돼 신수의 자격을 잃어버린 용을 통칭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영수로까지 추락한 것은 아니었다.
신수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지금, 교룡은 영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듯 방대한 힘을 가진 오래된 교룡이 대체 왜.
생명의 힘이 필요하면 그대로 죽이면 될 것을 어찌하여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는 걸까?
게다가 같은 인원수를 죽여야 한다면 환족을 죽이는 편이 더 도움이 될 텐데.
‘왜 인계를 말리며 인간들의 생명을 빨아먹고 있는 거지?’
교룡의 입장에서 인간의 생명을 취하는 일은 효용성이라고는 없는, 기별도 제대로 오지 않는 일일 텐데 말이다.
마치 녹용을 먹다가 개미를 잡아먹게 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굳이 인계에 와 일을 벌이고 있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것을 고민하다 자료를 하나 찾아냈다.
신수가 굳이 인계로 넘어와 만들어 낸 수많은 전설들은 그저 그들의 변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신수가 사라져 가던 무렵, 신수들이 나날이 무너져 가는 자신의 신격(神格)을 인간들의 신심(信心)으로 채우려 했던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절대적인 신심이 신수의 격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고?’
그렇다면 다른 감정들은?
혹시 신심이 아니라도, 그만큼이나 맹목적인 감정이 있다면 그것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걸까?
예를 들어, 절대적인 절망 같은.
나라 전체에 들끓는 비통함에서 모여드는 어떤 음기 같은 것.
그게 아니라면 교룡이 뭘 얻으려 이런 일을 벌였건 간에 굳이 반년의 시간을 허비하며 생명을 서서히 말려 갈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하여 시험을 해 보았다.
곧장 비를 내리게 하는 것보다 기우제를 준비하기까지 며칠의 기간을 두고.
굳이 곡식과 약초를 나눠 주고. 땅에 뿌리게 하고.
이틀 후면 결과를 받아 볼 수 있을 거라는 의뭉스러운 말을 남긴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이미 뭔가를 기다릴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이틀 정도면. 이 말도 안 되는 말에도 정말인가 기대를 하며 희망을 품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혈호에 다녀올게.”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둬요.”
허공을 노려보는 백기하의 팔을 잡아 말리며 세화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이 저 교룡을 더 화나게 할 테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힘을 사용하면…….’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른 어떤 말을 삼켜 낸 그녀가 가볍게 웃고는 눈을 감았다.
잠자듯 깊은 곳으로 내려앉은 제 영력의 끄트머리까지 낱낱이 깨워 냈다.
오색으로 뒤섞인 힘을 끌어 올리자, 그 순간 묶지 않고 늘어뜨린 긴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침 해가 떠올라 새벽을 몰아내는 광경처럼, 너른 길 사이로 세화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
그 광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백기하는 시선을 빼앗긴 채 그런 그녀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이 길에 달이 떨어진 듯, 태양이 잠시 쉬어 가는 듯.
환한 빛 속에서 서 있는 그녀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붉은 입술을 휘며. 그를 향해 몰라볼 수 없는 애정과 약간의 부끄러움, 긴장, 자신감을 드러내며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이 당장이라도 그를 무릎 꿇고 싶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다녀올게요.”
그녀가 말했다. 백기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이 기우제가 그들의 주인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 엄청난 재앙을 막아 내는 것이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인세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최덕문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모두가 기우제를 보러 간 때에도. 불온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이 시간까지도.
고요한 저택 내, 아들의 방에 앉아 눈을 감은 커다란 매만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최덕문의 시선이 암울하게 가라앉았다.
이 순간 그에겐 기우제고 가뭄이고 중요한 것이 없었다.
하나 남은 아들이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데 대체 무엇이 중요할까.
혹여 탈피 때 아들이 잘못되어 주인이 잠시간 그를 속이고자 이 매를 데려온 것은 아닐까.
이 매가 아들이 맞긴 할까.
맞는다면 정말 깨어나긴 하는 걸까.
온갖 뒤숭숭한 생각들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고개를 꺾어 버렸다.
“장명아…….”
그저 일단 눈이라도 떠 줬으면 좋겠다고.
혹여 이대로 다신 못 만나게 될까 걱정하지 않게 해 주면 좋겠다고.
힘없이 내려앉은 시선이 흔들릴 때였다.
파앗!
“!!”
눈이 감겨 있던 매의 몸 주변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갑작스러운 이상 현상에 깜짝 놀란 최덕문이 퍼뜩 뒤로 물러났다.
“장명아!”
그가 서둘러 매의 몸을 끌어안으려 했으나 빛이 품은 거대한 힘에 밀려 조금도 접근하지 못했다.
그사이에도 매의 몸은 허공으로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촤악!
오색의 기운이 매의 주위를 휘감으며, 옆으로 펼쳐진 거대한 날개깃 사이사이로 힘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매가 천천히 눈을 떴다.
“!!”
거대한 매의 시선과 마주친 순간 최덕문의 코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맙소사.
‘……정말 너구나. 정말 너였어!’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들이었다.
정말로 제 아들이었다.
매를 감싼 신령스러운 기운은 조금도 제 아들의 것 같지가 않았다.
들쥐를 잡아먹는 매의 본신마저도 제 아들이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뜨인 눈을 마주하니 그냥 알 수 있었다. 아들이라고.
매의 시선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가고 싶은 거구나. 그곳으로.
최덕문이 젖어 드는 눈가를 휘며,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지도 못한 채 온 입술과 턱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거라.”
그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날아오른 거대한 매가 더위를 줄이기 위해 열어 둔 창을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유연하게 창공을 날아 어딘가로 향했다.
주인이 있는 방향이었다.
* * *
갈라진 성익권의 목소리는 한시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하늘이시여! 부디 제 사지 육신을 꺾으시고 붉은 피와 생명을 받아 이 땅에 비를 허락해 주십시오!”
제관의 복창 소리도 조금의 쉼 없이 뒤따랐다.
“비를 허락해 주십시오!”
우레를 닮은 북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악공들이 연주하는 악기의 소리 또한 점차 고조되었다.
사람들의 기대도 그만큼이나 컸다.
가뭄이 든 이후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임금이 친히 제주를 자청하며 나섰고.
온전히 자신의 허물을 탓하라며 하늘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는 몹시도 절절한 데다가.
내 백성을 위해 내 생명을 내어 놓겠다는 말은 그만큼 진심으로 들렸으니까.
하여 그들도 꺼멓게 죽은 안색을 하고, 갈라진 입술을 힘껏 문 채 임금과 함께 간절히 하늘에 기도했다.
이대로 그들을 버리시지 말라고. 부디 그들을 가엾게 여겨 달라고.
하나 잔인할 정도로 푸른 하늘은 시간이 지나도 구름 한 점 만들어 낼 기미가 없었다.
하얗게 타오르는 태양 역시도 제 힘을 꺾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놀랍도록 빠르게 달아오르는 뜨거운 대지는 금세 아지랑이를 곳곳에 만들어 냈다.
울 힘도 없는 군중들이었으나 이 순간 치솟는 분노는 지금까지 그 어떤 때보다도 강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벗어날 수 없는 이 재앙은 대체 누구를 탓해야 하는 것인가.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고두한 임금을 향해 짚신을 벗어 던졌다.
“……헉!!”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일제히 숨을 삼켰다. ……감히. 가족을 모두 죽이고 싶은 것이 아니고서야.
그 찰나의 순간 악사와 악공들의 음악 소리도, 제관들의 복창과 북소리도 멎어 버렸다.
혹여 기우제가 실패할 경우 폭동이 일어날까 봐 관중들을 주시하고 있던 관인대장 이홍천이 가장 먼저 눈을 부릅떴다.
“저자다! 저자를 잡아라!”
“그냥 두어라!”
“전하!!”
“내 백성들을 위해 심장마저 내놓겠다고 하면서.”
성익권이 고사의 자세 그대로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이홍천을 만류했다.
“내 부덕에 화가 난 백성을 나더러 난도질하라 이 말이더냐!”
“전하!”
이홍천이 성익권의 뒤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 재앙이 어찌 전하의 탓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이들의 분노가 전하의 탓이라 말씀하십니까.”
“임금의 자리란 그런 것이니까.”
천천히 머리를 들고 몸을 일으킨 성익권이 뒤를 돌았다.
겁먹은 군중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가뭄이 극심해진 이후로 암행조차 나간 적이 없었기에, 한 번도 이리 가까이에서 상처받은 이들의 눈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시선을 옮길 때마다 깊이는 다를지언정 똑같은 절망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한때는 누구보다 힘차게 바람을 버텨 내는 들풀이었으나 이제는 옅은 호흡에마저 힘없이 꺾여 버릴 듯한 그런 절망들.
목 끝까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으나 성익권은 그것을 토해 내지 않고 내리눌렀다.
무슨 자격으로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이겠는가.
제 백성들의 목숨을 취하는 괴물들을 막아 내지도 못하고. 그저 조금이나마 이 재앙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초라한 그가.
그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해결 방법이야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그들이 가뭄을 원하면 비를 내리고, 비를 내리려 할 땐 태양을 끌어오면 되겠지.”
분명 그리 말했건만.
불같은 태양이 위치를 바꾸고, 열기를 뿜어내는 땅이 점점 더 달아오르는 이때까지도 그 말을 했던 이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여자도…….’
있는 힘을 다해 움켜쥔 주먹이, 소매 안에서 피로 젖어 들었다.
‘그저 짐승이었는가…….’
그의 볼 근육이 제멋대로 떨렸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대로 정말 그 짐승들이 제 백성들의 생을 갈가리 찢어 놓는 것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임금이 그들을 잡아갈 생각이 없다는 걸 느낀 것일까. 누군가가 울분에 차 외쳤다.
“이런 시팔. 심장이라도 바쳐! 당장!”
헉.
더없이 불온한 내용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다시금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