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254)

“하늘? 하늘 같은 소리 하네. 그렇게 하늘의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서 기우제를 벌써 세 번이나 말아먹었나?”

“그래! 게다가 실제로 비가 온다 해도 그렇지.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이제 와 농사라도 지으라는 거야 뭐야?!”

“니미, 이미 죽은 약초야 말할 것도 없고. 이 말라비틀어진 쌀에서 싹이 나려 해도 일주일은 걸리겠구먼. 개소리도 가지가지.”

“말이 안 된다 여겨질 것 압니다. 당장 오늘을 넘기기도 힘들 지경인데 어찌 하루의 생을 연장해 줄 식량을 땅에다 뿌릴 수 있겠습니까.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화가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설득했다.

“불행히도 여기 있는 것들이 제가 가진 전부라 보상을 내걸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탁드립니다. 모레 있을 기우제까지만, 조금만 더 배고픔을 참고 기다려 주십시오. 기우제 때 이 나라를 버리는 게 아니라는 걸 반드시 보여 주겠다 약조해 주셨으니까요.”

강한 확신이 서린 시선이 한 명 한 명, 사람들의 것과 마주치며 움직였다.

그 단호한 모습에 무어라 더 반박하려던 사람들이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사람이 정치화에게 물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약조를 했다는 겁니까?”

“맞아.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사람들의 말에 정치화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늘이요. 하늘이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 * *

기우제를 통해 비가 내릴 것이라는 말이 더없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기우제 전 이틀은 지금까지 그들이 버텨 온 날들 중 최고로 뜨겁게 태양이 타올랐다.

손톱만 한 구름조차 보이지 않은 채 하늘은 새파란 민낯을 드러냈고, 가을이 온 지가 언젠데 사방에서 아지랑이가 들끓었다.

정치화가 하라는 대로 땅에 한 줌의 곡식을 뿌리고 그것을 허덕이며 지키고 있던 사람들의 눈이 꺼멓게 죽어 갔다.

어떻게 이런 날씨를 가르고 비가 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실낱같은 희망이 절망 저 아래에 담겨 있었다.

이틀 뒤 반드시 비가 올 것이라고. 하늘이 그렇게 말했다고.

담담하게 장담하던 목소리를 기억하면서.

그 지옥 같은 이틀을 견뎌 낸 사람들의 앞에 그렇게 기우제가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 * *

새벽부터 궁문 근처가 계속 소란스러웠다.

마치 온 도성의 사람들을 모두 깨우려는 것처럼.

열을 맞춰 선 궁인들은 연신 북을 두드렸다.

둥! 둥! 둥! 둥!

천둥을 닮은 그 소리가 비가 오는 소리인 줄 착각하고 나온 사람이 조금.

조금도 쉬지 않고 울리는 그 소리에 대체 무슨 소란인가 궁금해져 나온 사람이 조금.

이전의 기우제와는 다른 모습에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를 담고 지켜보러 나온 사람들이 조금.

그들로 인해 해가 높이 뜨기도 전 이미 광장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데 이번 기우제는 누가 지내는 거지?’

‘예판도 그리 무너졌는데. 혹시 이번엔 전하께서 직접 나서시려는 건가.’

사람들의 궁금증이 커지고 있을 무렵, 북을 울리는 궁인들을 둘러싸고 서 있던 관인들이 제단을 덮어 두었던 거대한 흰 천을 걷어 냈다.

그렇게 드러난 제단의 모습 역시도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이전엔 공물로 준비된 어린 소와 닭, 물을 바라는 수반들로 제단이 꾸며져 있었다면 이번엔 그런 것들이 없었다.

대신 여러 개의 함이 층층이 놓여 있었다.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제단의 양옆을 빈틈없이 메우며 쌓인 함들 사이로 이전보다 높은 계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제단의 모습이 그렇게 바뀐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약간의 희망이 더 생겼다.

이전과는 뭔가가 다르지 않을까. 혹시 정말 비가 오기라도 하는 걸까.

몰려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들의 머리 위를 뒤덮은 잔인한 하늘로 향했다.

여전히 손톱만 한 구름조차 품고 있지 않은 청명한 하늘은 그들의 한 줌 희망마저 부숴 내려는 듯 그저 푸르기만 했다.

* * *

세화는 기우제 전 잠시 최덕문의 저택에 들러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최장명을 보고 있었다.

그 뒤로 어두운 얼굴을 한 최덕문이 가만히 시립해 있었다.

“혹시 언제쯤 깨어날지 가늠이 되십니까.”

지금 이런 질문을 던져 봤자 탓하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음.”

그리고 당황한 세화도 달리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녀라고 어디서 권속 계약을 맺어 봤어야지.

지난번 그 살수 환족에게야 낙인을 찍고 무언가를 비축해 놓은 곳까지 달아날 수 있게 하기 위한 정도의 영력만 나눠 줘 봤으니.

“……음.”

두 번의 똑같은 망설임이 돌아오자 최덕문의 얼굴 가득 깊은 근심이 어렸다.

부인조차 인간계로 추방당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리고 그에게 남은 가족이라고는 이 아들 하나밖에 없었다.

저 매가 제 아들이라는 게 여태 잘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깨어나 주기라도 했으면 하는 것이다.

세화의 속도 제법 난감했다.

대체 왜 깨어나질 않는 거지? 덥석 권속 계약을 맺어 주겠다 했던 게 너무 섣부른 결정이었나?

모습이 바뀐 것도 그렇고, 내 이상 영력 때문에 혹 탈피하는 과정에서 뭔가가 변질되어 버렸다거나 문제가 생겼다거나 하는 건 아닐까?

그때였다.

누군가 분위기가 심각하게 어두워진 그 방 안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여기 있었군. 왜 혼자 왔어. 나랑 같이 왔어야지.”

“?”

내 권속의 상태를 내가 확인하는데 왜 굳이 당신을?

다급한 표정을 하고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의아했으나 세화는 그 의문을 굳이 입에 담진 않았다.

“왔어요?”

“아직 안 깨어난 거야?”

“네.”

“곧 깨어나겠지. 그대도 일주일 동안 잠들어 있었잖아.”

그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오색 깃털을 가지런히 모은 매 한 마리가 뻣뻣한 자세로 잘 깔린 비단 이불 위에 누워 자는 이상한 광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도 일주일이나 잠들어 계셨습니까.”

그 말이 희망이라도 되듯 조금 밝아진 얼굴로 최덕문이 물었다.

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조금 더 기다려 보지. 그래도 깨어나지 않으면…….”

그러면 어떡해야 하나.

설익은 불안감이 세화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아니, 벌써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그녀는 그런 제 불안을 눌러 삼키며 말했다.

“그러면 내가 환계로 데려가 어떻게 해서든 깨워 올 테니까.”

* * *

삐이―.

북소리가 단조롭게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도 사람들은 지루함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귀를 자극하는 현악기의 소리가 광장 사이를 길게 스쳐 지나갔다.

이제 드디어 뭔가 시작되는구나 하는 기대감 어린 시선들이 일제히 제단을 응시했다.

해금의 소리는 이제껏 늘 기우제의 시작을 알려 왔던 것이다.

몰려드는 시선 속에서 궁문이 열렸다.

굳은 표정의 제관들의 뒤로 열을 맞춘 악공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까지도 사람들은 제주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다.

하여 그 악공들의 뒤에서, 무명천으로 지은 옷을 입은 임금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그들도 감히 임금에게 책임을 돌리지 못해 예판을 탓하기는 했으나 이 일이 어찌 예판의 잘못일까.

만약 누구 하나를 지목해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단연코 임금의 덕을 제일 먼저 따져야 하겠지.

하지만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잘못하다간 역모로 몰려 일가족은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지목돼 떼죽음을 당할 참이니.

임금이 저 대신 다른 희생양을 내세우겠다 공표하면 그 희생양을 나무랄 수밖에.

한데 이번엔 전하께서 직접 나서신다고?

만약 비가 오지 않는다면 이전 기우제들의 실패까지 끌어 올려져 비난을 단단히 받으실 텐데?

임금의 모습은 그간 속이 편안하지는 않았다는 듯 초췌했다.

볼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안색은 핏기없이 푸르렀다.

눈 아래 드리워진 짙은 그늘에서 그의 속을 짐작한 사람들이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며 기우제의 진행을 지켜보았다.

그간 하늘에 어린 소와 닭의 목을 잘라 생명을 바쳐 왔던 것과는 달리, 거친 천으로 된 의복을 입고 나온 임금은 내관에게 술을 받아 제단 주변에 흩뿌렸다.

조심스럽게 긴 계단 아래 땅에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우사 이십사 년. 죄인 성익권이 하늘에 고합니다. 억조창생들은 물이 부족해 기갈에 시달리고 있고 팔도의 대지는 용암을 머금은 듯 뜨거운 열기로 절절 끓고 있으며 삼라만상의 조화는 이미 어그러진 지 오래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런 임금의 행동 하나하나를 낱낱이 주시했다.

“다른 가뭄과는 다르게 반년 사이에 땅을 완전히 말리고 식물을 꺾고 짐승과 사람까지 죽이는 이 가뭄이 결코 평범한 자연의 조화가 아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여 감히 이 죄인이 하늘께 고사하노니.”

성익권이 제단을 향해 이마를 조아렸다.

“모든 일이 제 부덕에 의한 것이니 이제 하늘께서는 부디 제 허물만을 탓하시고 제 나라와 가엾은 제 백성들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오롯이 제게 벌을 내리시고, 제 사지 육신을 꺾으시고 붉은 피와 생명을 받아 이 땅에 비를 허락해 주십시오!”

제단의 주위를 둘러싼 제관이 복창했다.

“비를 허락해 주십시오.”

성익권이 다시금 읍소했다.

“부디 비를 허락해 주십시오!”

제관이 그의 목소리를 따라 복창했다.

“비를 허락해 주십시오!”

* * *

시종은 밀실 공동 구석에 사색이 된 채 서 있었다.

혹여 제가 고요히 어딘가를 노려보는 교룡의 주의를 사기라도 할까 봐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게 서 있던 교룡이 일순 울컥, 붉은 피를 토해 내며 꼬리를 휘둘렀다.

챠르르르―!

두꺼운 돌벽에 비늘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울렸다.

뚝, 뚝.

바닥으로 교룡의 피가 떨어지는 것을 본 시종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지금 당장 신영을 모셔오겠습니다. 조,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고작 이런 일에 소란 피우지 말라.

“하지만 혹시 상처가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잘못돼? 감히 내가 하는 일에, 내 몸에 혹시 모를 일이 생긴단 말인가?

발톱을 세운 교룡이 시종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곤 안광을 번뜩였다.

-네가 아주 나를 낮잡아 보고 있구나.

“……그, 그런 말이 아니옵고, 저, 저는 으아아아아악!!!”

콰직!

촤악!

끔찍한 비명이 지나가고 난 이후, 짙은 피비린내가 공동 안에 내려앉았다.

고작 하나의 생명을 취한 것만으로는 분노가 멎지 않아 교룡은 또다시 몸을 비틀며 두꺼운 돌벽을 긁어 댔다.

크오오오!

뭔가가 틀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인간들의 생명을 단번에 빼앗지 않은 것은 그들이 절망하고 슬퍼할수록 그것이 제힘이 되기 때문이었다.

조금씩 숨통을 조여, 결국 옴짝달싹도 못 할 정도로 만들면 체념하고 더더욱 절망할 테니까.

하지만 어째서일까.

땅 위에 빽빽하던 절망이 지금, 이 순간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이것이 이상하였다.

혹여 그의 힘이 어그러져 제힘이 가둬 둔 열기가 잠시간 흩어졌다 해도.

모든 물을 빼앗고 약한 것들의 생명부터 빨아들여 짐승의 씨 역시 말려 버리고 있는 이상, 이 절망이 흐트러져선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짐작 가는 곳이 없진 않았다.

그 명윤의 여식.

-재미있는 짓을 하는군.

교룡이 웃음을 터트렸다.

차라리 끝없이 어두운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는 법이었다.

절망과 비탄에 빠진 이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보여 준다면, 그것이 얼마나 달콤하고 찬란하게 보일까.

하지만, 그 희망이 꺾인다면?

분명 처음보다 더 크게 절망하고 더 크게 체념하겠지. 빠져나올 수 없이 더더욱 절망은 커질 것이다.

-겨우 영수의 껍데기만 뒤집어 쓴 주제에 오만하구나.

희망이 난도질당했을 때 인간들이 겪을 절망을 상상하자니, 그의 계획이 점점 더 어그러지고 있어도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어디 한번 마음껏 해 보거라.

그래봤자 내 손아귀 안일 테니.

교룡이 제 혀를 씹었다. 강렬한 고통을 삼키며 검고 비린 피를 뿜어낸 후 제 온몸에 묻혔다.

차르르!

번뜩이는 비늘 사이사이로 스며 들어간 피들이 교룡의 영력에 강력한 붉은 빛을 뿜었다.

거대한 밀실 공동 안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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