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최덕문은 얼떨떨한 얼굴로 백기하가 내미는 커다란 매를 받아 들였다.
성인 남성의 힘으로도 들기 힘든 무게의 매를 받아 들자 잠시 다리가 꺾여 휘청였다.
“…….”
“…….”
여전히 망연한 얼굴을 지우지 못한 최덕문이 잠을 자는 매 한 마리와 세화의 얼굴을 한 번.
다시 자고 있는 매와 백기하의 얼굴을 한 번.
그렇게 번갈아 바라보다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세화에게 물었다.
“……제, 아들이라고요?”
“……그렇게…… 됐네.”
“…….”
“…….”
“……정말, 제 아들입니까?”
“……그럴 거야. ……아마.”
아마?
“일단 깨어나 봐야…….”
늘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던 세화답지 않게 그녀가 노행수의 망연한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
최덕문은 도통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탈피하며 본신이 바뀌는 일은 환족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이 갑자기 물고기가 될 수 없는 것처럼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여 그는 신비한 깃털 색을 가진 거대한 매를 내려다보며 할 말을 잊고 머뭇거렸다.
기운도 제 아들과 전혀 다르고, 탈피 후 처음 드러나는 본신은 말이 되지 않을 정도고.
‘부인의 본신도 분명 들쥐였는데.’
그럼 대체 이 매는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설마 부인이 부정을?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이가 결코 아닌데.’
게다가 최장명은 젊었을 적 제 모습을 쏙 빼닮지 않았던가.
한데 탈피하고 갑자기 매가 되었다니.
‘아들은 분명 들쥔데. 어떻게 피식자에서 갑자기 포식자로 탈바꿈을…….’
이보다 더 뜬금없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이 매가 제 아들이라는 말 자체가 어떤 추측으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여 최덕문이 다시 매를 한 번, 세화를 한 번, 매를 한 번, 세화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럼…… 이 매는 언제 깨어나는 것입니까?”
“……그건.”
그건?
“……그건.”
세화가 또 한 번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뭔가를 해야겠다는 압박을 느꼈는지 매를 대신 옮겨 주려 다가갔다.
그녀의 옆을 지키던 백기하가 한발 앞서 매를 가로채 들어 올리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일단 방에 데려다 놓음이 어떠한가. 언제 깨어날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맞는 말이라 최덕문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들의 방으로 그들을 안내하는 동안, 백기하의 품에 들린 커다란 오색의 매가 나직이 코를 골았다.
* * *
세화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치화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궁에서 나서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그 목소리에 담긴 걱정을 읽어 내고 치화가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이리 내 살길을 열어 주는데 나도 내 할 일을 찾아서 해야지.”
정치화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명백히 밝아져 있었다.
“정말 기우제에 반드시 비가 오는 거야?”
“응.”
세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 긴장한 입매를 허물어뜨리기도 했다.
사실 기우제 때 어떻게 반드시 비가 온다는 것인지,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딱 하나는 알았다.
저를 구해 주겠다고.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한데 이건 다 뭐야? 이게 기우제 때 다 필요한 거야?”
“응.”
이전에 세화가 준비해달라 부탁했던 곡식과 약초들을 저택으로 옮겨온데다가, 최덕문이 보낸 환석 상자까지 잔뜩 쌓여있는 탓에 예판 저택의 후원은 발 디딜 곳이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곡식과 약초야 네가 하라는 대로 사용할 테지만. 이 돌은 뭐 하는 건데?”
“…….”
“뭐야. 왜 얘기 안 해 주는데?”
“너 궁금하라고.”
“뭐야?”
“하하.”
세화가 웃자 치화의 시선이 다시 멍하게 풀렸다.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다시 볼 땐 조금 달라져 있을 거라더니, 정말 못 본 사이 하늘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아닌가. 본래부터 그곳에 속한 이였었나. 나는 그런 이와 동무가 된 것이고?’
“그나저나 내가 일단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긴 할 건데, 사람들이 정말 그대로 따를까?”
“전부는 아니더라도 분명 누군가는 시키는 대로 할거야. 기우제가 끝난 뒤 아무 일도 없으면 그대로 주워 가면 될 일이니, 그들도 손해 볼 것 없는 일이지.”
“그래도 반발이 있을 것 같은데. 그냥 나랑 집안사람들이 몰래 나가서…….”
저도 모르게 다시 말을 덧붙이려던 치화가 이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세화가 그렇다 했으니 그냥 믿어야지. 내 친구가 그랬으니까.
치화는 목까지 치솟아 오른 궁금증을 꾹꾹 눌러 참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좋아. 기우제나 돌에 대해서는 더 안 물어볼게. 대신, 이것만 말해 봐.”
“뭘?”
“너 그 옆에 훤칠한 사내분은 누구셨어?”
“훤칠한 사내분?”
“그래, 계속 네 뒤를 졸졸 쫓는 그분 말이야. 그분, 백 도련님 맞지!”
세화의 곁을 태산처럼 굳건히 지키는 듯한 사내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너무 아름답게 변한 그의 용모 때문에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어쩐지 왜 이렇게 낯익은 느낌이 드나 싶어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어느 순간 딱, 겹쳐 보인 것이다.
그들이 학당에 다닐 때, 종종 언급하곤 했던 그 백가 도련님의 모습이.
“그때 그분 맞지? 세화 너 그때는 백씨라면 딱 질색이라고 해 놓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
“응? 말해 봐. 넌 백씨 싫다며? 주씨가 더 좋다며.”
“……아냐, 착각한 거야.”
친구의 물음에 세화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아까와는 달리 목소리가 작아지고 입술을 달싹거리는 게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얼굴이라, 치화가 간신히 웃음을 참을 때였다.
저 멀리 세화의 뒤로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걸어오고 있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치화가 조금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그렇게 목소리가 작아. 혹시 아직도 주씨가 더 좋은 거야?”
“그만해.”
“대답해 봐. 그럼, 그만 묻고 갈게. 누가 더 좋은데?”
“…….”
“진짜야. 대답해주면 더 귀찮게 안할게.”
달아나듯 돌아서려는 세화의 손을 잡고 묻자 한숨을 쉰 세화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백씨.”
“뭐라고? 잘 안 들려.”
“…….”
“응? 누가 더 좋다고 한거지? 주씨라고 한건가?”
“어휴 정말. 백씨라고. 주씨보다 백씨가 더 좋다고. 이제 됐어? 그래. 백씨가 더 좋다. 백씨 너무너무 좋아!”
그때였다.
땡그랑!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나 세화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엔 얼굴이 붉어진 백기하가 바닥으로 떨어뜨린 물건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화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 버렸다.
얼른 웃는 입을 손으로 가린 정치화가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그 자리를 피했다.
‘좋을 때다.’
아무리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선남선녀라 해도 친구의 연애란 가까이서 봐 주기 어려운 것이었으니까.
* * *
도성의 궁문 앞 광장이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뭔가를 분주히 만들어 내는 소리가 이어지자 힘이 없어 대부분의 시간 누워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궁금증을 참지 못해 집을 나섰다.
“뭐지? 뭘 하려는 건가?”
“뭘 세우나 본데?”
기웃거리는 시선들 사이로 혀를 차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뭐긴 뭐여. 제단이잖아. 또 기우제를 지내려나 보구먼.”
“기우제를 또 지낸다고?”
“……나라님도 정신이 나가셨군. 그런 쓸데없는 데에 쓸 돈 있으면 나나 주지.”
“근데 뭐라도 하긴 해야지.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래도 저런 걸 한다고 비가 오겠어? 하늘님이 땅을 다 말려 버리시기 전엔 화를 안 푸실 것 같은데.”
“맞아. 게다가 기우제를 지내 비가 온다 한들, 남은 것이 없는데 올해를 어찌 넘길 것이며 긴 겨울은 또 어찌 살아남겠어.”
“거기다 저 기우제는 또 누가 지낼 건데? 예판은 죽임을 당할까 봐 식솔들도 죄 버리고 달아나 도성에 없다잖아.”
그럼 이번엔 대체 누굴 희생양으로 세우기로 한 걸까.
기우제에 더 이상 기대를 가질 수 없던 이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여 갑론을박을 펼쳤다.
그러던 중 그들은 도성에서 도망갔다던 예판의 저택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서히 목소리를 낮췄다.
갑자기 뭐지?
언제 관인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대문을 꽁꽁 닫아걸고 숨죽이며 엎드려 있던 곳이 아닌가.
한데 오늘은 이른 시간부터 대문을 활짝 열어 둔 것도 모자라 하인들이 여럿 나와 마당이나 길을 쓸기도 하고 집 앞에서 분주히 무언가를 준비하기도 했다.
‘대체 뭘 하는 걸까.’
투박한 나무 탁자가 준비되고 뭔가를 잔뜩 이고 지고 온 하인들이 그 포대들을 탁자 옆에 내려놓았다.
“모두 줄을 서시오! 곡식과 약초를 나눠 줄 테니 어서 줄을 서시오!”
‘곡식?!’
‘곡식이라고?!’
어딜 겁 없이 대문을 여냐는 듯 저택을 흘겨보던 사람들이 눈이 뒤집혀 달려갔다.
투박한 탁자 앞에 서둘러 줄을 만들며 새치기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듯 제 앞뒤로 끼어드는 사람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양이 많으니 천천히 서도 됩니다! 모두 가져갈 수 있으니 밀지 마시고! 천천히 서시오!”
줄을 선 이들의 시선이 탁자 옆에 놓인 포대로 향했다.
꽤나 넉넉하긴 했으나 도성에서 굶어 죽어가는 입이 몇인가. 지금 달려와 줄을 서는 이들은 또 몇이고. 이들 모두에게 나눠줄 수 있을 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저택에서 물량이 더 운반되어 오나 싶었으나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저게 많다고?’
“자, 받으십시오.”
얼추 줄이 만들어지고 있는 듯하자 탁자 앞에 선 하인들이 포대를 열었다.
그 안에서 한 줌의 곡식을 쥐어 주머니에 넣고, 소량의 약초와 함께 넘겨주었다.
“…….”
왜 양이 많다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것도 없어 굶어 죽는 이가 많았으니 고마워해야 하는 건 분명 맞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꼴랑 요걸 주는 건가.’
“한데 받으시는 분들은 이 내용을 꼭 지켜 주십시오.”
포대를 지키기 위해 동원된 장정들 옆에서, 주머니를 챙기던 하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첫째! 이것들을 드리기는 하나 지금 드셔서는 안 됩니다. 둘째! 갈라진 밭에 최대한 널찍이 뿌려두십시오!”
“?”
“셋째! 이틀 뒤 기우제가 있을 것인데, 기우제의 시작 전까지는 반드시 그리하셔야 합니다!”
주머니를 받아 드는 이들이나 그걸 받겠다고 줄을 선 이들이나. 하인이 소리치는 말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긴 마찬가지였다.
나라님이 저를 잡아 족칠 거란 말에 예판이 혼이 나가 도망갔다더니.
‘예판 저택에 남아 있던 이들마저 깡그리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건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줄에 서 있던 누군가가 황당함을 감추지 않으며 물었다.
“갈라진 논밭에 뿌리라니. 지금 쥐나 새를 먹이라는 거요?”
“아, 사람이 먹을 것도 없는데 무슨 짐승을 먹이라고!”
“옘병. 움직일 힘도 없구먼. 이깟 쌀 한 줌 나눠 주면서 뭔 개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그래! 게다가 기우제? 그깟 걸 한다고 비가 오기라도 해?”
하나둘씩 터져 나오던 목소리들이 험악한 외침과 뒤섞였다.
이것도 없어서 못 먹는 판국이니 당연히 주는 걸 가지고는 가겠지만.
장정들이 버티고 있으니 저 포대를 훔쳐 갈 수도 없고.
꼴랑 손바닥만 한 주머니를 건네받으며 놀림을 받았다고 생각한 얼굴들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때였다.
“말한 대로 시행한다면 기우제 때 반드시 비가 올 겁니다!”
어제 온 길을 지저분한 행색을 한 채 방황하던 예판의 여식이 단정한 차림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냈다.
“이번 기우제는 하늘께서 반드시 비를 내려 주시기로 하셨으니 그걸 믿고 돌아가 꼭 밭에 뿌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