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254)

갑작스러운 말에 최덕문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이미 예조판서 정승택이 세 번의 기우제를 실패해 크게 곤경에 처했습니다. 아가씨께서 나서셨다 괜한 곤란을 겪으실 수도 있으십니다.”

“왜 내가 실패할 거라 생각하지?”

“못 느끼셨습니까. 이건 평범한 가뭄이 아닙니다. 곳곳에 불온한 영력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비를 조절하는 무언가가 따로 있다는 뜻이고요.”

“그래. 뭔가가 있지. 그래서 더더욱 비를 내릴 필요가 있어.”

“네?”

최덕문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지금 이분이 내게 뭐라고…… 비를…….’

“비를 내리시겠다고요?”

최덕문이 저도 모르게 세화의 몸 주위에서 영력의 기운을 탐색했다.

가느다란 그녀의 몸 옆으로는 인간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질 정도로 영력의 기운이 전무했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영력이 그의 탐색 능력을 월등히 상회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으나.

‘……아닌데. 신수가, 되시지는 못한 듯한데.’

자연을 조종하는 것은 모든 생명의 지배자인 용뿐이었다.

그녀의 영력은 심상치 않았지만, 신수로 탈피했다 여겨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비를 내리게 한다는 걸까.

“그건 자네가 알 것 없고. 일단 자네 아들의 탈피는 오늘 밤 시행할 것이니 자시까지 환석과 함께 예판의 저택으로 오도록 하게.”

* * *

비는 대체 어떻게 오게 한다는 것인지. 그 과정에서 왜 그 수많은 환석들이 필요한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

준비하라 이르신 것들을 그저 모두 준비해 두면 되는 것을.

세화가 떠나간 이후, 최덕문은 집안의 하인들을 진두지휘하며 많은 양의 물자를 빠르게 준비했다.

최장명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앞으로 어렸을 적 제 모습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허공 문을 관리하는 이들에게 묵직한 전낭을 쥐여 줘 가며 하염없이 문을 올려다보던 그 시간들이.

저 문을 넘을 수가 없어서.

때때로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상황을 추측하며.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이란 곳은 대체 어떤 곳일까. 떠올려 보던 그 시간들이 말이다.

너무 긴장이 되니 속이 쏟아져 나올 지경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손끝이 온통 차갑게 식어 버렸다.

짐을 실은 수레들이 모두 준된 듯하자 최덕문이 아들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최장명은 가장 질 좋은 환석이 든 상자 하나를 끌어안고 시간을 가만히 견뎌 내고 있었다.

“많이 떨리느냐.”

“……조금 그렇습니다. 저는 제가 감히 환계의 땅을 밟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미안, 하구나.”

어쩔 수 없이 어두워지는 최덕문의 목소리에 최장명이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를 원망하려 말을 꺼낸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어찌 제가 아직 살아 있겠습니까.”

최장명의 손이 환석이 든 상자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결국 이리 감히 바라지 못했던 행운까지 얻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권속 계약이 네 생각만큼 좋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고향 땅에서 추방당하기 전 이미 권속 계약에 대한 여러 기록들을 확인한 적 있는 최덕문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으나 최장명은 그 말에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버지는 모르십니다.”

‘제가 이날을 얼마나 바라 왔었는지를요.’

아주 오래전 그녀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하얀 옷을 입고 작은 얼굴 가득 걱정의 기색을 담은 채 그를 내려다보던 그녀를.

지옥처럼 그의 삶을 짓누르던 고통을 한순간에 앗아가 주었던.

그리하여 그날 이후부터 그가 완벽히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만들어 준 그녀를 만났던 순간부터 말이다.

그 순간이 그의 일생에 있어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다.

환영 같은 그 찰나의 밤을 그는 여전히 눈앞에 생생히 그려 낼 수 있을 정도로 소중히 기억해 왔다.

그런 그녀에게 속하는 일이었다.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바라지 못한 그녀였는데. 그런 그녀를 다시 만나서, 그녀의 곁에 속할 수도 있다니.

이런 행운이 도대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는 제 자리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감히 그녀를 가질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은 꿈에서도 해보지 못한 채, 그렇게 그는 홀로 제 가슴을 가득 메운 기대를 다스렸다.

“모두. 조용히 운반해야 한다.”

이런 짐을 실은 것들이 이동되는 것을 알면 굶주린 사람들이 분명 식량인 줄 알고 짐승 떼처럼 달려들 것이다.

자시(子時)가 되자, 최덕문은 추방당한 환족들로 구성된 호위를 세우고 예판의 저택으로 조용히 이동했다.

혹여 누군가 그들의 이동을 눈치채기라도 할까 봐 모두 검은 옷을 입었고 횃불도 들지 않은 채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예판의 저택 앞에는 기다렸다는 듯 세화가 서 있었다.

흐린 달빛과 짙은 어둠으로도 감출 수 없는 아름다움이 그녀를 향해 걷던 이들의 발을 잠시간 사로잡았다.

세화가 경쾌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와 최덕문을 향해 말했다.

“그 짐들은 모두 저택 안에 넣어 두게.”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적자줏빛 시선이 최장명을 향해 움직였다.

“가지. 환계로 가는 문은 축시(丑時) 안으로 넘어야 하니까.”

문을 넘는다.

그 간단한 말에 그는 앞서가는 세화의 뒤를 홀린 듯 따랐다.

늘 그를 애달프게 했던, 막막하게 했던 그 허공 문을 넘으러.

그리하여 그는 늘 바라만 보았던 허공 문의 앞에 있었다.

세화는 일렁이는 그 허공을 통과하기 전에 그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잡아.”

“!”

그는 되묻거나 놀란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가자.”

작고 가느다란 하얀 손이 그의 손을 맞잡아 왔다.

맞잡은 손은 따뜻하고 또 따뜻했다.

최장명은 울 듯 웃는 듯한 얼굴로 세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허공에서 일렁이는 대기의 틈을 향해 걸어갔다.

손이 잡힌 채로, 최장명이 그 틈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한데 그분은, 그 사내는 혹 함께 가시지 않는 걸까?’

환계의 문을 통과하는 그 찰나의 사이에 최장명의 뇌리로 그런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아주 짧은 순간만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를 통과한 최장명은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손이 떨어지자마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

그리고 눈만 깜빡였다.

‘여긴 뭐지?’

그는 여태껏 제 아버지가 해 주는 말에 의지해 환계를 상상해 왔다.

인계에선 신처럼 받들어지는 짐승들이 허공을 뛰어다니고 특별한 힘을 사용하고.

한 번도 보지 못한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환석 같은 신비한 돌들이 굴러다니는 그런 어떤 새로운 세계를.

한데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어떤 석조 건물이었다.

마치 국경을 지키는 초소처럼 그저 누군가의 침입을 막는 데만 충실한 멋없고 딱딱한 건축물.

우아한 모양새의 지붕도 기둥도 없었고, 그저 오래된 돌바닥 위에 흩어져 있는 날카로운 무기들이 보이는 전부였다.

‘잠, 잠깐. 무기들?’

그때 건물 한켠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려왔어?”

기척도 느끼지 못했건만 제게 경고하던 사내가 어느새 자리한 채 그를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세화와 맞잡은 최장명의 손께로 잠시 날아왔다.

이내 그가 두 눈을 휘어 웃었다.

하나 눈이 휘었다고 그 표정마저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둥글게 휜 눈 안쪽으로 번뜩이는 새까만 시선이 어찌나 예리하고 냉막하던지.

마치 야밤에 산을 넘다가 산주인을 만났을 때와 같은 두려움이 이 최장명에게 덮쳐들었다.

다리가 풀릴 정도의 위압이 유연해지는 것은 제 앞에 선 여성을 바라볼 때뿐이었다.

“초소병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쓰러졌는지 확인한 거죠?”

“그럼.”

성큼 다가선 사내가 세화와 최장명의 손 사이에 섰다.

그러곤 의아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한 팔로 휘어 감았다.

마치 소유권을 주장하듯 제게로 끌어당기고, 드러난 하얀 이마에 자연스럽게 입을 맞췄다.

‘……!’

나라의 풍조 상 저런 애정 행각을 드러내고 나누는 장면을 목격해 본 적 없던 최장명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나마 탈피하지 못한 환족들의 향락을 채워 주며 그들의 난잡한 유희와 연회를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제 앞에 펼쳐진 모습은 그런 모습과는 달랐다.

서로가 서로의 것임을 확인하는 어떤 뜨거운 마음이라든가.

너무 깊어 밖으로 우러날 수밖에 없는 절절하기 이를 데 없는 몸짓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손길이 그녀도 싫지 않은지 이내 입가가 부드럽게 허물어졌다.

최장명이 시선을 흐트러뜨렸을 때쯤 세화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최장명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미리 얘기를 못 했는데. 사실 지금 내 영력이 조금 문제가 있어서 생각대로 탈피가 잘 안 될지도 몰라. 그럴 때는 따로 치료를 도와줄 테니까.”

세화가 조금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혹시 꺼려지면 말하고.”

그런 게 있을 리가.

최장명이 고개를 저었다. 남자가 다정한 목소리로 다시한번 끼어들었다.

“그래. 지금이라도 이 계약을 무를 생각이 있는지 묻고 또 물어봐. 이런 중요한 일은 신중히 결정하게 해야지. 아니면 혹 계약을 내가 진행하는 건 어때? 나는 전혀 상관없으니 편하게, 정말 편하게 말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너한테 물은 것이 아니다.”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

최장명과 남자가 심상치 않은 시선으로 서로를 응시하자 세화가 그들 앞을 막아섰다.

“인장을 찍어야 하는데, 어디에 찍으면 좋을지 스스로 골라 알려 줘.”

최장명은 기꺼이 제 목을 내밀었다.

보고 싶지 않아도 시선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곳을 내줌으로써 그녀에게 스스로 제 목줄을 쥐여 주고 싶었다.

물론 최장명의 마음을 모르는 그녀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사내는 그 의미를 곧장 눈치챈 것인지 단번에 시선의 온도가 더 떨어질 곳 없는 곳으로 곤두박질쳤다.

미처 사내가 말릴 새도 없이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곧 뜨거운 온기를 담아 최장명의 살갗에 닿았다.

그 순간이었다.

“!”

최장명의 주위로 삽시간에 공간이 유리되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였다.

어떤 강풍의 회오리와 불꽃이 그의 주변에서 넘실거렸다.

푸른 물줄기가 그를 감싸는 듯도 했고 황금빛 햇살이 그에게 쏟아져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산 채로 그의 신체를 태우는 듯한 열기 속에서 눈을 떴을 때. 최장명은 제 앞에 선 어떤 낯선 짐승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환계엔 일곱 가문의 짐승들 이외에도 한 번도 신수로 거듭나지 못한 여러 작고 존재감 없는 생명들이 많았다.

지렁이, 들쥐, 가재나 더욱 하찮은 갯강구 같은 벌레까지.

그런 생명들도 환계의 오랜 영력 덕분으로 인간의 외형을 가지긴 했다.

하지만 비천한 신분으로 천하고 지저분한 일들을 도맡아 해야만 했다.

추방당하기 전의 최덕문 역시 그랬다.

들쥐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 그는 일곱 가문의 환족들에게 지배당하는 위치였다.

아무리 영력을 쌓아도 타고난 존재의 크기가 있으므로 만족할 만큼 힘을 보유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버지께 그 이야기들을 전해들은 최장명도 자신의 그런 본신을 모르지 않았다.

한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용을 닮기도 하고. 사슴을 닮기도 하고. 백호나, 거북이를 닮은 듯도 한.

이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의 짐승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 그의 몸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멍하니 멀어져 갔다.

목이 뜨겁게 타오르고 체온이 맞닿은 곳을 통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힘의 파도가 그를 상승시키고 확산시켰다.

등이 타는 듯 뜨거웠다. 시야가 점점 높아지는 듯 낮아지더니 등을 통해 무언가가 빠져나와 확 펼쳐졌다.

“…….”

그리고 세화는 그 신비하고 환상적인 모습을 보며 당황과 곤혹을 감추지 못했다.

눈만 깜빡이던 그녀가 마른침을 삼켜내고 물었다.

“뭐, 뭐죠.”

“…….”

“……왜. ……대체 왜 저런 모습이 되는 거죠? 이것도 내 영력 때문일까요?”

어느 순간 오색의 깃털을 가진 커다란 매가 허공에서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들쥐라고 했는데.”

그런데 매가 됐다고?

갑자기?

그녀가 그렇게 당황하고 있을 때, 백기하 역시 얼어붙은 듯 그 광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대한 매는 풍부한 영력을 품고 있었다.

환계를 장악한 칠문의 혈족들에게서나 볼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칠문의 혈족이 아니면서도 그에 걸맞은 모습으로 탈피하다니.

‘새로운…… 환족이 탄생하였다고?’

세화는 지금의 이 현상이 말하는 가능성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나 이미 가주의 자리에 있는 백기하는 이것을 모를 수 없었다.

아무도 태어난 본신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환계 전체에 퍼져 있는 가문이 없는 자들을, 그리하여 밑바닥을 전전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의 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수 있지 않겠는가.

‘……한데 그게 가능하다니.’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이미 그는 세화의 모습을 보고 알게 되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장면은 명백히 그것을 증명해 내는 것이라.

하여 놀라움과 감격을 담은 채 완연히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새로운 환족들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걸.

본신을 바꾼 저들에 의해 칠문이 환계를 장악하던 시절은 가고,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누구도 지배받지 않는 새로운 나날이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그런 그들의 사이에서 막 태어난 오색의 매가 울었다.

높은 울음소리가 인간계의 문이 있는 환계 주가 초소 안을 맑게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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