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앞을 헤쳐 나갈 수 없는 막막한 분노와 거대한 슬픔이 성익권의 갈라진 목소리 안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성익권은 사실 이 여자도 그리 반갑지 않았다.
과연 저런 자들이 제 발밑을 기어가는 개미에게 신경이나 쓸까.
이 땅 위에서 괴물들의 힘겨루기가 시작된다면 피해를 보는 건 또다시 애꿎은 백성들뿐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에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제 나라는 현세의 연옥이 되어 가고 있으니.
그에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며 호통치는 이 여자가, 맡겨 놓은 것을 찾아가듯, 피도 눈물도 없이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던 이전의 괴물들을 조금이나마 막아 줄 수 있기만 바랄 수밖에.
“그자들이 네게 뭘 요구하더냐.”
“혈호(血湖)입니다.”
“혈호?”
“네.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언덕을 깎아 구덩이를 파고 재앙으로 죽은 시신을 그곳에 모으고 있습니다.”
“…….”
“그 안이 시신에서 나온 진액으로 가득 차야…….”
그때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그걸 혈호라고 불렀군.”
“!”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성익권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내관과 무관들을 모두 물렸다고는 해도 그들이 이 주위를 빈틈없이 지키고 있을 터인데.
‘대체 누가 갑자기? 어떻게?’
성익권이 당황하는 사이 새로 등장한 침입자가 걸어 들어왔다.
‘저 사내도.’
그를 본 성익권이 잠시 굳어졌다.
천녀의 현신 같은 이 여인 또한 성익권의 말문을 막아 놓았으나 뒤늦게 합류한 듯한 저 사내 역시도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분명 사람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이름 높은 옥인과 벽인을 모아 놓은들. 저 사내만큼 아름답고 우아하며 용맹하면서도 부드러운 분위기를 모두 갖출 수 있을까.
수려한 외모 위로 덧씌워진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위압감은 어좌에 앉은 성익권도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다.
상황이 상황이건만, 그런 현실마저 잠시 잊은 성익권의 울대가 자신도 모르게 움직였다.
“나서지 말라니까요.”
“일부러 그런 것 아니야. 저 얘기가 중요할 듯해 끼어들게 된 거지.”
“혈호를 직접 보고 온 거예요?”
“부패한 시신이 쌓여 있던 그 구덩이에 이상한 기운이 가득해 모를 수가 없었어. 분명 그 음기들을 흡수할 수 있도록 뭔가를 연결해 두었을 거야.”
눈을 가늘게 뜬 백기하가 낮은 목소리로 이를 갈듯 말했다.
“이미 구덩이 안에 생성된 음기가 지독해 들어가 볼 생각은 하지 못했어. 잘못하다가는 영력이 변질되어 버리겠던데.”
“그렇게 심해요?”
“그대는 특히 더 그곳을 피해야 해. 잘못하면 교룡이 되어 버릴지도 몰라.”
“…….”
세화의 눈매도 가늘어졌다.
만약 그녀가 전생에도 똑같이 가뭄이 왔다는 것을 몰랐다면, 혹 또 하나의 신수가 탄생하는 것을 막으려고 일부러 재앙을 일으켰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입술을 문 세화가 이내 성익권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감히 그들을 응시하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아래로만 내리고 있었다.
“이 가뭄은 내달까지 유지되고 끝날 것이다.”
“!”
성익권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직 혈호가 반도 차지 않았는데.”
“그렇겠지. 하여 가뭄이 끝나고 나면 이번엔 멈추지 않는 폭우가 쏟아져 내릴 것이야.”
“……!”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팔도의 모든 죽은 자들을 혈호로 옮겨 오고 있으나 새로 죽어 가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저 하염없이 방치된 시신들이 지천에 널려 있는데 그 사이로 폭우가 쏟아진다고?
“그, 그러면 지금보다 더 많은 이들이…… 잔뜩 굶주려 약해진 이들이건만. 분명 지독한 전염병이…….”
어찌하여 이런 괴물들이 제 나라에서 싸움을 벌이는가.
서러움을 넘어 분하고 원통했다.
성익권이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바닥에 이마를 쿵 찧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이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부탁드립니다. 부디 방도를 알려 주십시오.”
세화가 조용히 그런 그를 응시했다.
“막아 낼 방도를 알려 주십시오, 어떤 것이든 하겠습니다.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
“제 목숨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절을 하려는 순간, 세화가 그런 성익권에게 다가가 눈을 마주했다.
“목숨까지는 사실 필요 없고.”
그건 그저 어디까지 협조할 의지가 있나 알아보려 한 질문이었을 뿐이라.
긴 속눈썹 사이로 세화의 적자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두 눈매가 부드럽게 휘자, 성익권이 순간 홀린 듯 굳어진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결 방법이야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그들이 가뭄을 원하면 비를 내리고, 비를 내리려 할 땐 태양을 끌어오면 되겠지.”
* * *
괴물들의 개입은 사실 나라의 오랜 역사와 계속 함께해 왔다.
처음에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국운을 높이고 위기에 나서 주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 땅에 똬리를 튼 재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 버렸다.
성익권이 내미는 기록들을 세화가 재빠르게 훑었다.
신영의 치세 동안만을 살펴보려 하였으나, 신영이 몸을 바꾸며 살아왔을지 모른다는 어머니의 추측을 고려하여 더욱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러면 분부하신 일들의 준비를 마치는 대로 예판의 저택으로 연통 드리면 되겠습니까.”
“응. 그리고 하나 더.”
세화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저를 향하자 성익권이 움찔 굳어졌다.
“예판의 일 또한 말한 대로 처리하도록 하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성익권에겐 아직 이 여자를 믿어도 될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저를 대하는 태도나.
진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간을 동무로 부르는 그 모습은 지금껏 보았던 괴물들과는 전혀 달라 어떤 기대를 갖게 만들고 있었다.
혹시 정말 이 연옥에서 벗어나게 해 줄 이가 아닐까? 하는 그런 기대.
‘아니, 기대뿐만이 아니야.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해.’
하여 성익권은 괜찮다는 말에도 그녀를 직접 궁문까지 배웅했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주상의 모습을 궁 안을 지나던 이들이 몰래 훔쳐 볼 때였다.
저 멀리 궁문이 시끄러웠다.
무슨 일인지 알아 오라고, 성익권이 내관을 시키기도 전에 그의 앞을 걷던 여자가 뛰듯이 빠르게 걸어 나갔다.
수문장들이 겁을 주듯 강압적으로 막아서고 있던 한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정치화!”
뒤를 돌아보던 수문장들이 곤룡포를 입고 있던 성익권을 발견하고 굳어졌다가, 그의 눈짓에 자세를 바로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름이 불린 지저분한 행색의 여자가 제 몸가짐을 다듬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달려왔다.
“세화야! 다친 곳은. 다친 데는 없어? 나, 나 대신 네가 끌려가서…….”
그런 그녀를 성익권의 가느다랗게 좁혀진 시선이 뒤따랐다.
‘저 여인이 동무라 부르던 예판의 여식인가?’
“집에서 문 닫고 기다리라니까.”
“어떻게 그래! 나는, 난 네가 고초를 겪을까 봐.”
끅끅 숨이 차오르는 정치화의 얼굴이 붉어졌다.
“괜찮다고 했잖아. 아버지도 아무 일 없을 테니 염려 말고.”
“정말로?”
“응.”
“정말 전하께서 그리해 주시겠대?”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정치화는 그들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곤룡포를 입고 선 누군가를 발견할 정신도 없는 듯했다.
“응. 정말로.”
세화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럼 우리 집에, 아무 일도 없는 거야?”
쉽게 실감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세화가 몇 번이나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그 말이 믿어진 것인지 세화의 저고리를 잡은 치화가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한발 늦게 뒤따라온 춘영이 제 아가씨를 부축하며 지탱했다.
“한데 어, 어떻게? 전하께서 용서하신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아버지를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그건 걱정하지 마. 가만히 둘 수밖에 없을 테니까.”
“……둘 수밖에 없다고? 왜?”
세화가 대답 대신 미소 지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성익권이 이미 당신이 무슨 말을 할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확인한 세화가 친구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사흘만 기다려.”
* * *
궁을 나선 세화는 정치화를 먼저 저택으로 보낸 후, 이번엔 백기하와 함께 최덕문을 찾아갔다.
거대한 현판과 대문은 이 가뭄 속에서도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듯, 예전에 방문했던 때와 그리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세화가 왔다는 말에 달려 나오는 최장명의 얼굴은 환희와 감격으로 붉어져 있었다.
‘그녀가.’
기실 그는 흥분한 제 심장 박동을 숨기기 위해 여러 차례 심호흡을 반복해야 했다.
나무 문 너머로 세화의 모습이 보이자 최장명이 속도를 높였다.
“아가씨!”
너무나 반가워 그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세화의 시선이 최장명의 손으로 내려가기도 전, 누군가 그것을 빠르게 잡아챘다.
‘!!’
손목이 끊어질 듯한 통증에 다리가 풀리던 최장명이 그대로 굳어졌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내가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부러트릴 듯 잡은 팔에 힘을 준 남자가 최장명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조심해야지. 내가 오해할 뻔했지 않나.”
“……오해라니. 어떤…….”
“그야.”
잘 벼려진 검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최장명의 것과 맞부딪쳤다.
“감히 이 여인에게 손을 내미는 줄 알았다는 오해?”
그는 최장명의 시선이 세화에게 닿는 것마저도 불쾌한지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웃으며 제가 틀어쥔 최장명의 팔을 응시했다.
“검을 잡는 듯한데, 내가 실수하지 않아 다행이야.”
하마터면 부러뜨릴 뻔했다고.
그러니 앞으로는 처신을 좀 똑바로 해 달라고.
단단한 경고가 이어지자 최장명이 그 사내를 마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당장에라도 저 시선에 심장이 꿰뚫려 버릴 것 같은 두려움과 긴장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세화는 백기하와 최장명의 날카로운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최덕문을 찾기 바빴다.
“자네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가씨.”
최장명의 대답에 백기하도 팔을 놓아주었다.
최장명은 욱신거리는 팔을 매만지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저 남자는 악력만으로 제 팔을 뜯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런데도.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열렬한 감정만은 제대로 숨길 수가 없었다.
탈피하기 전의 모습도 그리 아리따울 수 없었는데, 지금 모습은 감히 바라보기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그녀가 권속 계약을 약속한 이후로 벌써 몇 달이 흘러갔다.
재앙이 거듭되는 이곳에 일부러 나타난 것은 그를 거둬가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토록 바라던 환계의 방문과 그 자신의 탈피가 눈앞에 놓여 있었건만. 기실 그는 그 모든 사실들보다 제가 그녀에게 속하게 되는 날만을 가슴 떨리도록 기다리는 중이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최덕문 또한 그녀를 발견하고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의 뒤에 선 백기하를 발견하고는 잠시 주춤하기도 했으나 지난번의 약속을 지키러, 내 아들과 권속 계약을 맺어 주고자 찾아온 것인가 하는 기대가 든 것이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기거할 곳이 있으시냐고 묻고 대답도 하지 않았건만 기꺼이 정실을 내어 주었다.
인계에 있는 주명윤의 저택은 세화가 환계로 돌아갈 당시 물건과 부리는 이들을 모두 데리고 돌아간 탓에 그간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인계의 상황이 좋지 못한데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환계분들께선 거의 다 넘어가신 듯하던데, 혹 환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자네야말로 이런 상황에서 피해는 없고?”
상석에 앉은 세화가 자연스레 말을 놓고 하대하였으나 최덕문은 조금의 불만도 없었다.
“제가 고용한 이들이야 거의 환족이니까요. 인간들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그럼에도 원하는 말은 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그 마음을 짐작하는 것처럼 세화가 피식 웃었다.
“약속을 지키러 온 것이 맞으니 어려워할 것 없네.”
“……!”
흔들리는 시선을 한 최덕문이 떨리는 시선으로 세화를 응시하다 물었다.
“그, 말씀은 장명이의 탈피를-.”
“한데 그 전에 말이네.”
“네. 뭐든 말씀하십시오.”
“예전에 내가 구입했던 환석들을 모두 가져다 주게. 사흘 후 기우제를 지낼 거니까.”
“!”